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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May 02. 2023

방전회복력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14

01. 

현재 저는 휴가차 여행 중에 있습니다. (자랑하는 건 아니고... 오늘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연관이 있으니 너른 마음으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  언젠가 한 번 이야기하고 싶었던 주제였는데 마침 여행 중에 글로 전해드리면 더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오늘의 주제는 '방전회복력'입니다.  


02. 

일단 이건 흔히 통용되는 '회복탄력성'과는 좀 다른 의미인 것 같습니다.  회복탄력성이 '실패나 부정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원래의 안정된 상태로 빨리 복귀하는 능력'을 뜻한다면 제가 오늘 말하고 싶은 '방전회복력'은 마치 배터리를 오래 사용하면 방전되는 속도가 빨리지는 것처럼 우리의 능력에도 가성비가 나빠지는 순간이 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여행'이라는 매개체가 꼭 필요했죠. 


03. 

그 먼 옛날 신입사원 시절에는 여행 한 번이 주는 효과가 참 대단했습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연차 휴가를 잘개 쪼개 3박4일 일본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그 기억을 에너지 삼아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갔더랬죠.  그리고 다시 또 일상을 등지고(?) 훌쩍 떠날 그날을 간절히 기대하면서 전역 일자 기다리는 군인의 심정으로 일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회사 동기들과 서로 여행 계획 공유하면서 부러움을 사기도, 팔기도 했던 적이 많았던 것 같아요. 


04.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점점 연차가 높아지면서 이 여행이 주는 달콤함이 꽤 빨리 시들시들해진다는 거였습니다. 물론 여행은 언제나 좋고, 너무나 신나지만 여행을 다녀온 뒤로 일상생활에 다시 젖어드는 속도가 너무 빨라지기 시작하는 거죠.  '내가 휴가를 다녀온 게 맞긴 한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치 어제 못다 한 일을 오늘 출근해 이어가는 것 마냥 자연스런 일상 복귀가 가능했습니다. 당연히 여행이 주는 리프레시 효과도 점점 짧아지게 되었죠.  

05. 

그런데 저는 이게 꼭 여행에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획 일을 하면서도 이런 달콤함들이 꽤 빨리 방전된다는 걸 느끼거든요.  과거에는 아주 작은 성취라도 있으면 그걸 굉장히 소중하게 아껴가며 스스로에게 동기부여를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지금 하고 있는 일보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훨씬 작은 레벨의 성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레버리지 삼아 다른 것에 더 욕심을 부리고, 설사 조금 재미없고 어려운 일이 주어지더라도 모쪼록 잘 풀어나가게끔 노력했던 것 같거든요. 


06. 

그런데 지금은 딱 여행과 같은 개념이 된 것 같기도 합니다. 주어지는 과제는 훨씬 어려운 것들이고 어찌어찌해서 그걸 나름 잘 처리한다고 해도 돌아서면 다시 고민에 빠지고 걱정만 앞서는 삶을 맞이하게 되거든요. 3박4일 일본여행이 아니라, 하와이 한 달 살기를 한들 나 스스로에 대한 리프레시의 강도와 유지 기간이 엄청 짧아지고 만 것이죠.  저는 이게 (특히 기획하는 사람에게는) 자칫 잘못하면 번아웃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07. 

그래서 요즘은 이런 습관을 들여보려고 노력 중입니다.  저는 나름대로 '성취했다' 혹은 '선방했다'라고 평가되는 일이 있다면, 그 일에 대한 좋은 피드백들을 잘 정리하여 저장하려고 하는 편입니다. 오글거리는 칭찬을 정말 싫어하는 제가 이렇게라도 하는 이유는 매우 명확한데요, 설사 잘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애써 부족하고 아쉬웠던 부분을 찾아내 개선하는 일에만 몰두한다면 지나치게 스스로를 옥죄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행을 다녀와서 좋았던 기억에 관한 폴더 대신 미련이 남는 기억만을 모아두는 폴더에 집중한다면 이것만큼 슬픈 일도 없기 때문이죠.  


08. 

물론 내 돈 내고 떠나는 여행과 남의 돈 받고 일하는 업무 자체를 비교한다는 게 무리라는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일을 잘하고 싶고, 또 오래 하고 싶다면 이 '방전회복력'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스스로 '배터리가 빨리 소진되는 유형'으로 자신을 몰아가지 않으려면 최대한 좋은 기억들을 잘 흡수해서 나의 장점이자 에너지원으로 저장해놓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09. 

혹시 배터리 수명을 빨리 닳게 하는 나쁜 습관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복합적인 이유가 존재함이 당연하지만 대표적인 예로 '(너무 춥거나 너무 덥거나 하는) 극한의 환경에 놓아두는 것' 그리고 '0% 가까이 방전했다가 다시 급속충전을 하는 것' 두 가지를 들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 사람도 똑같은 것 같아요. 우리 자신을 지나치게 극한의 환경으로 몰고 가면서 그걸 마치 일을 열심히, 잘하는 것으로 포장하는 경우도 있고, 자신의 능력치를 고려하지 않고 번아웃에 가까운 에너지 소모를 했다가 거의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돌아오고를 반복할 때가 있으니까요. 어쩌면 '나'라는 배터리를, 이 좋은 에너지원을 정말 함부로 사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를 일입니다. 


10. 

당연히 저 자신부터 반성합니다. 사실 여행을 떠나오기 전날까지도 자정 가까이 야근을 했거든요.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슬아슬하게 방전될 때까지 놔두면 안 된다'라고 말이죠.  저는 이 '방전회복력'의 첫 단계는 자신의 배터리 잔량을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니 언젠가 또 채워지겠지라는 생각 마시고 지금 내 배터리는 몇 %일까라는 생각으로 냉정하게 한 번 체크해 보면 어떨까요? 저는 그게 우리를 더 오래, 더 잘, 더 재미있게 일하게 해주는 아주 기본적인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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