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21
01.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다 보면 과거에 나를 지배했던 말이나 행동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는 일이 꽤 자주 일어납니다. 그중엔 스스로 만들어낸 선입견이나 고정관념도 있지만 솔직히 타인이 우리에게 심어준 것이 훨씬 많죠. 특히 회사나 학교처럼 위계가 있는 곳이라면 좋든 싫든 간에 나보다 직위가 높은 사람의 가치관이 우리를 짓누를 수밖에 없으니 이런 현상이 더 두드러지곤 합니다.
02.
돌이켜보니 제게도 그런 이상한 관념들이 참 많이 쌓여있다 싶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정말 스스로 고민해 보고 과감히 털어내지 않았다면 정말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겠다 싶은 잘못된 가치관이 하나 있었습니다. 제목에서도 소개했듯이 '대안이 없으면 비판하지 말라'는 문화가 바로 그것이었죠.
03.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습니다. 혹시 새로운 생각이나 아이디어를 막는 부정적인 피드백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저희도 예전에 해봤는데요~'로 시작하는 맥빠지는 피드백부터 '본인이 내신 아이디어니 실행도 직접 하실 거예요?' 같은 으름장 섞인 공격도 어렵지 않게 떠오르실 겁니다. (제가 최근에 겪은 가장 황당한 피드백은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하니까 그럼 본인이 감당하는 걸로 하세요' 였습니다. 텍스트로 쓰니 제가 다 부끄러워지는군요... 여전히 무슨 의미인지도 잘 모르겠고요)
04.
이런 갖가지 피드백에도 불구하고 제가 '대안 없이는 비판도 하지 말라'를 왜 최악의 피드백 문화라고 꼽은 걸까요? 물론 표면적으로는 건전한 비판조차 하지 못하게 아예 입을 닫게 만드는 결과가 만들어지는 게 첫 번째 이유일 겁니다. 더 좋은 아이디어가 없다면 평가에 참여조차 하지 말라는 셈이니까 말이죠. 대부분 이런 문화의 조직은 개선 사항이 발생하더라도 자신들이 규정한 본질을 흔들지 않는 선에서만 변화를 시도합니다. 눈 감고 쳐다봐도 사이즈가 나올 만한 일에만 손을 뻗는 거죠. 모래성 뺏기로 치면 제일 안전한 맨 아래 가장자리만 긁고 있는 형국쯤 되겠네요.
05.
하지만 정작 더 무서운 건 따로 있습니다. 저도 과거에 '비판하려면 대안을 들고 와라. 그렇지 않은 비판은 무책임한 비판이다'라는 관점의 리더 밑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정말 놀라운 일이 하나 벌어지더군요. 비판하지 않는 문화가 만연한 것은 기본이고, 오히려 사람들이 기존의 방식을 훨씬 탄탄하게 만들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근거로 이를 신봉하기 시작한 것이죠. 뭐라고 해야 할까요. '깔 수(?) 없다면 그냥 믿겠다'라는 심리라고 해야 맞을까요? 비판을 하자니 대안이 없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 일을 안 하는 것처럼 보이니 자신들의 기존 논지를 훨씬 강화하는 데만 열을 올리는 식이었습니다.
06.
그러다 보니 사용자 지표나 시장 분석 자료도 모두 자신들이 유리한 방향으로만 해석하기 시작했고, 전혀 상관없는 국가에 언어도 생소한 서비스를 레퍼런스로 가져와 '이들이 하는 걸 보니 우리도 맞는 길을 가고 있는 것 같다(?)'는 씁쓸한 자위를 하는 케이스만 늘어났습니다. 결과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되실 겁니다. 돌이켜봐도 가슴 아프고 민망한 시기였죠. 그때 뼈저리게 느낀 건 '대안은 없거나 천천히 생각해도 좋다. 능률을 저해할 정도가 아니라면 비판은 늘 편하고, 가볍고, 빠르게 할 수 있는 게 더 낫다'는 거였습니다.
07.
예전에 '좋은 피드백을 이끌어 내는 법'이라는 글을 통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요, 생산적인 비판을 원한다면 무엇보다 우리가 평가받으려는 대상에 대한 정확한 브리핑이 필요합니다. '일단 보고 떠오르는 느낌을 말해주세요' 같은 추상적이고 자유로운 관점의 피드백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적어도 논리와 근거에 대한 체크가 필요하다면 '우리가 이걸 만든 이유는 무엇이고, 이렇게 결과물이 나온 것은 어떤 포인트에 집중했기 때문인지', 더불어 '우리는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고, 이걸 통해서 어느 정도 목표 달성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려줘야 합니다. 그래야 비판하는 사람들도 어떤 포인트에서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 줘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으니 말이죠.
08.
한편 정말 좋은 대안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이걸 비판과 연결 지어서는 안됩니다. 적어도 비즈니스 세계에서 대안이라는 건 A를 대체할 B를 고르는 상황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아예 판을 뒤집거나, 문제를 재정의하거나, 이전에는 생각조차 못 해본 관점을 새롭게 던질 수 있는 방식도 대안으로 떠오를 수 있거든요. 기존에 작동하던 방식을 아예 뒤집어버리는 게임 체인저의 접근인 것이죠. 이럴 때는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이 맞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라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물으며 어느 정도 합의된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여러 측면에서 질문을 공유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입니다.
09.
'나는 그런 말 안 하니까'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은연중에 우리 맘속에서 '자기는 뾰족한 답도 없으면서 까기만 엄청 까네'라는 생각이 몽글몽글 피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 역시도 좋은 애티튜드라고 볼 수는 없겠죠. 하지만 적어도 대상을 분리할 필요는 있어 보여요. 눈앞에 있는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부분이 잘못되어있는지를 찾아내는 것과 이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강구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는 것을 말이죠. 세상에 모든 문제를 열쇠로 열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때로는 엉킨 실타래처럼 그 문제를 들여다보면 스스로 풀리는 경우도 있으니 두 방식의 차이를 잘 이해하는 것도 꽤나 지혜롭게 일하는 방법 중 하나일 겁니다.
10.
그러니 대안이 없는 사람이 비판하는 것에도 조금은 유연해지면 어떨까요? 반대로 대안이 없더라도 나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정확한 피드백을 하려고 노력한다면 또 어떨까요? 저는 그게 훨씬 좋은 지점을 향해 모두가 각자의 한 걸음을 옮기는 행위라고 봅니다. 그래서 저도 앞으로 열심히 해보려고요. 비판하는 것이든, 비판을 수용하는 것이든 간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