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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Jun 11. 2023

잘 할 자신은 없지만, '잘 준비할' 자신은 있습니다.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20

01. 

최근 들어 예전에 읽었던 책 두 권을 번갈아가며 다시 발췌독 하고 있습니다.  한 권은 얼마 전 글을 통해 소개했던 <신경끄기의 기술>이란 책이고, 다른 한 권은 스토아학파의 철학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는 <스토아적 삶의 권유>라는 책입니다.  

두 책을 동시에 읽고 있는 이유는 묘하게 관통하는 메시지 때문입니다. 바로 '활을 떠난 화살에 대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대신 활을 놓는 그 순간까지는 최선을 다해야 된다'이죠.  


02. 

이런 태도를 갖기 위해서는 중요한 관점 하나가 필요합니다. 다름 아닌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에 대한 구분입니다. 듣고 나면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가 알면서도 잘 실천하지 못하는 것 중 하나가 '내 힘으로 결정지을 수 없는 것'에 대해 크게 집착하거나 미련을 갖는 것이죠. 더 이상 내가 예측할 수 없는 것, 평가의 권한이 상대에게 있는 것, 복합적인 이유로 계획에 없던 일이 발생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노력이란 힘이 작용을 하지 않는 단계에 들어서기 시작하는 때니까요, 활에서 화살이 떠나는 순간부터는 그 결과를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일지에 관해서만 신경을 써야 하는 겁니다.  


03. 

몇 해 전부터 인지는 모르겠지만 업무에서든, 업무 외적인 것에서든 '잘 할 자신이 있나요'라는 말을 들으면 꼭 하는 대답이 있습니다.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잘 준비할 자신은 있다'고 말이죠. 이 말을 들으면 반응이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에이, 그래도 시작하기 전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야죠. 무조건 잘 할 수 있다고 믿어보세요.'라는 쪽과 '잘 준비할 수 있다는 게 곧잘 할 수 있다는 거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라는 반응이죠.  


04. 

애석하게도 둘 다 제가 의도한 것과 일치하는 해석은 아닙니다. 저는 의지의 문제를 보여주고자 한 것보다 타이밍의 문제를 강조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거든요. 제 의지와 노력으로 결과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순간까지는 최선을 다해 잘 준비할 자신이 있지만, 제 손에서 화살이 떠난 이후로는 그 결과값을 노력의 문제와 연관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듣고 나면 꽤 냉정한 관점이기도 하죠. 하지만 저는 이 태도가 일에서든 삶에서든 꽤 중요하고 좋은 영향을 발휘한다고 생각합니다. 


05. 

이런 태도를 이해하기 시작한 뒤로 가장 크게 바뀐 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세상엔 생각보다 내 힘이 미칠 수 없는 곳도 많고, 반대로 예상했던 것보다 내 노력을 더 쏟아부을 수 있는 곳도 많구나'라는 것을 깨달은 거죠.  예전에는 '진심'이나 '진정성' 같은 말들이 참 달콤하게 느껴졌습니다. 내가 기획하는 것에 이런 좋은 가치들을 녹여내면 그게 사용자나 소비자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줄 알았었죠.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이동 과정에는 촘촘한 거름망 같은 것들이 존재하기에 늘 중간에서 여과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진심과 진정성을 담아 준비하는 것과 그것이 느껴지도록 잘 전달하는 것은 아예 본질부터가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겁니다.  


06.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활에서 화살이 떠나기 전까지가 내가 오롯이 노력을 투입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하면 어디에 집중을 해야 하는 지가 정말 잘 보이더라고요. 그 타이밍이 구분되기 시작하니 활을 준비하고 자세를 잡는 단계를 훨씬 촘촘히 쪼갤 수 있었고 그 각각의 스텝에서 내가 부족한 것은 없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예전에는 이미 떠난 화살을 향해 입바람이라도 불어 힘을 보태고자 용쓴 적도 있지만 사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보단 활을 놓는 그 순간에 마지막 호흡과 텐션을 얼마나 잘 유지할지를 끊임없이 연습하는 게 훨씬 중요하죠.  


07. 

그래서 저는 이제 '준비만 잘하면 된다'라는 말은 잘 안 쓰게 되는 것 같아요. 결국 '준비가 전부이니까' 말이죠. 대신 어디까지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지치지 않고 준비할 수 있는지를 기획하는 게 몇 배는 더 현명하고 좋은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잘 준비했으니까 잘될 거야'라는 말도 즐겨 쓰진 않습니다. 잘 준비하는 것과 잘 되는 것은 인과의 문제는 아니더라고요. 잘 준비하면 좋은 결과가 따라붙을 확률은 높아지지만 우리 힘이 작용하지 않는 부분에 있어서는 초연한 자세를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쉬운 결과에 대해 내 노력 부족 탓만 하는 걸 방지할 수도 있으니까요.  


08. 

흔한 말로 '무엇을(what)'보다, '어떻게(how)'가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집중'과 '준비'라는 차원에서는 적어도 '무엇을'이 더 중요해지기도 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집중할 거냐, 어떻게 준비할 거냐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지점이 어디고, 진짜 우리 노력으로 준비할 수 있는 지점은 또 어디까지인지를 정의해야 헛수고를 하지 않을 수 있거든요. 저는 이게 중요한 과업에 임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09. 

글을 끝내기 전에 오늘은 재미난 토막 상식 하나를 공유하려고 합니다. 제가 자주 소개하는 어원에 관한 것인데요, 정말 많이 쓰는 영어 단어 중 하나인 'prepare'는 사실 '먼저(pre) 깎아두다(pare)'에서 시작된 단어입니다. 어떤 자세를 취하거나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의 뉘앙스와는 전혀 다르게 그저 언제든 바로 사용할 수 있게 껍질을 벗겨놓거나 화살 촉 등을 깎아 놓는 걸 의미하죠. 저는 이게 우리가 준비를 준비하는(?) 가장 현실적이고 좋은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10. 

그러니 어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다면 '잘해야 한다'는 생각 대신 '잘 준비해야 한다'는 목표를 한 번 스스로에게 부여해 보세요. 이 단순한 문장 하나로도 아마 여러분이 마주하고 있는 그 일 자체가 다시 규정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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