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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Jul 03. 2023

잘했을 때의 그 '세팅값'을 기억하기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24

01. 

며칠 전 예능인 김종민 님이 나영석 PD의 유튜브 채널에 출연한 것을 보았습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맛깔나게 주고받는 것이 재미있어 빠져들듯 봤는데, 곧 마냥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주제 하나가 등장했습니다. 바로 슬럼프에 대한 이야기였죠.


02. 

2007년부터 16년간 ⟪1박2일⟫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는 김종민 님은 병역을 마치고 복귀한 그 시점이 지금도 트라우마로 남아있다고 했습니다. 공백기의 부담감 때문에 제 기량을 펼치기가 어려웠고 예능 사상 최초로 하차 청원 운동까지 일어나며 악플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지금도 그때의 상황, 그때의 멤버들을 생각하면 (감사함과는 별개로) 두려움의 공황 증세가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03. 

스포츠에도 비슷한 증상들이 있습니다. 보통 장기간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부진의 늪, 이른바 슬럼프라고 불리는 현상들이 참 많죠. 

하지만 그중에는 슬럼프와는 조금 다른 개념들도 존재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야구에서 사용하는 '입스(YIPS)'라는 용어죠. 입스란, 심리적인 압박감이나 불안 등이 요인이 되어 신체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도 평소 잘 하던 동작들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현상을 뜻합니다. (투수의 경우 70년대 이 증상을 처음 보인 스티브 블래스의 이름을 따 '블래스 신드롬'이라고도 부릅니다.)


04. 

아직도 뚜렷하게 증상의 원인과 해결 방법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입스나 슬럼프를 극복한 사람들의 노력을 뒤따라가다 보면 공통된 모습이 하나 보입니다. 바로 본인이 가장 좋은 컨디션을 가졌을 때, 그리고 가장 좋은 결과물을 냈을 때의 환경과 심리 상태를 복기해 본다는 것이었죠. 설사 뚜렷한 인과관계를 확인할 수 없는 요소들이라 하더라도, 그 당시 내 자신이 어떻게 세팅되어 있었는지를 떠올리며 그와 유사한 설정을 해보는 것으로 하나씩 감을 찾아가는 방법입니다. 


05. 

기획을 비롯해 창작을 다루는 분야의 많은 사람들도 슬럼프라는 것을 겪습니다. 사실 야구 선수처럼 '입스'에 해당할 정도의 부진이 찾아오는 경우는 아주 드물겠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연이어 고배를 마신다거나 착착 진행될 줄 알았던 프로젝트가 번번이 어그려져 세상의 빛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면 누구나 심리적인 영향을 받게 되죠. 그러다 점차 상황이 심해지면 결국엔 '여기서 이 일을 계속하는 게 과연 맞는 걸까?', '어쩌면 나라는 사람은 애초에 이 직업 자체와 어울리지 않았던 사람은 아니었을까?'라는 부정적인 생각들과도 마주하게 됩니다. 


06. 

저는 그때마다 필요한 게 바로 우리 각자가 과거의 잘했던 순간을 복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그 당시 우리를 좋은 결과물로 인도해 준 그 세팅값을 복원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꼭 원인과 결과가 분명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를 떠올려보면서 '그 때 나는 적어도 일주일에 2-3번은 산책하는 시간을 가졌었구나', '그때 나는 영화든 책이든 좋은 콘텐츠로부터 영감을 받으려고 한 것 같은데...', '그때 나는 막막한 게 있으면 가끔 이 사람을 찾아가서 조언을 구했었지', '그때 나의 일하는 루틴은 아침에 메일부터 쳐내고, 오후엔 바짝 기획서 쓰기에 몰입하고, 되도록 회의는 하루나 이틀에 몰아서 처리했고...' 이런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씩 주워모아보는 거죠. 그리고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그때의 세팅값을 따라서 살아보는 것이 의외로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07. 

개인적으로는 아직까지 큰 슬럼프를 겪었다거나 장기적인 부침을 경험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은 없지만, 저는 사람에 대한 고달픔이 다가오면 그게 꽤 큰 데미지로 작용하는 적이 종종 있습니다. 비상식적인 사람이라던가, 비즈니스 매너가 크게 떨어진다거나, 지나치게 독불장군 스타일의 사람과 장기간 일을 하게 되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지치게 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 같거든요. 당연히 그 상처를 회복하는 데는 일정 수준의 시간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08. 

저 역시 그때마다 떠올린 건 '좋았을 때의 세팅값'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당장 저 사람을 피할 수 없다면 오히려 나에게 가장 좋은 영향을 줬을 때의 그 환경을 의도적으로 복원해 보려고 하는 거죠. 긍정의 요소들로 부정적인 요소들을 상쇄시키는 노력을 일상에서 실천해 보는 겁니다. 

물론 이게 원론적인 해결책일 리는 만무합니다. 솔직히 며칠 하다가 제풀에 꺾여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을 때도 있죠. 하지만 그때마다 떠올린 생각은 단 하나였습니다. '만약 지금 내가 겪는 부정적인 요소가 사라지는 순간이 왔을 때, 나에게 그 좋은 날을 맞이할 에너지가 부족하다면?'이라는 생각이었죠.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마치 투수가 입스를 극복하는 그날, 감각은 되찾았는데 체력이 받쳐주지 않아 기존의 실력을 발휘할 수 없다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일이 없는 것처럼요. 


09. 

그러니 잘했을 때의 세팅값을 기억한다는 건 이 풍파가 지나가고 난 다음에도 내가 다시 좋은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노력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슬럼프가 온 것도 속상한데 그게 사라진 후에 내 자신까지 잃어버린다고 생각하면 천배 만배 더 슬픈 일이니까요, 이 순간이 영원하지는 않을 거란 생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것들부터 세팅해 보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은 아닐까 싶습니다. 


10.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지금 떠올려보시면 과거의 어느 찬란했던 순간이 금방 떠오르시나요? 그럼 그때의 기분을 다시 느끼기에 앞서 그 당시 나를 둘러싼 환경은 어떻게 세팅되어 있었는지, 또 내 마음가짐의 설정값은 어땠는지를 한 번 더듬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아, 혹시라도 '나에겐 그런 순간조차 없었는데...'라는 생각이 드신다면 본인이 가장 컨디션이 좋았다고 생각이 드는 그 시기를 복기해 봐도 좋을 것 같아요. 어쩌면 결과물이 좋았던 때보다, 순수히 과정을 즐기며 무엇인가에 몰입했던 시기가 슬럼프를 극복하기에는 더 현명한 답을 줄 수도 있을 테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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