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23
01.
저는 기획과 브랜딩을 업(業)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매일이 비판과 논쟁의 연속이며, 또 매 순간 선택과 결정이 필요한 직업입니다. 그럼에도 일을 하며 가장 어려운 포인트는 아무래도 '정답이 없는 분야에서 일한다는 것'일 겁니다. 100% 옳다고, 맞다고 생각한 다음 실행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기에 늘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더 정교히 디벨롭 해 가는 게 숙명과도 같죠.
02.
좋은 태도란 분야를 막론하고 환영받는 법이지만 저는 정답이 없는 분야일수록 이 '태도의 힘'이 더 크게 발휘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답이 없기 때문에 최대한 긍정적이고 친절한 태도를 유지하며 일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좋은 게 좋다는 것도, 모난 행동으로 눈 밖에 나지 말라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죠. 오히려 답이 정해져있지 않은, 또 답을 정할 수 없는 분야에서 한 줄기 빛을 따라 출구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감히 해봅니다.
03.
그중에서도 커뮤니케이션 매너는 꽤 많은 것들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직장 생활을 해오며 느끼는 건 예쁜 말투, 안 예쁜 말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상대방의 가능성을 여는 말투와 닫는 말투를 구분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즉, '이 사람과 소통을 할수록 해결책이 발견되네'라는 느낌을 줄 수 있거나, 설사 '이렇게 이야기해 보니 뭔가 다른 의견들도 끄집어 내서 보태고 싶다'는 의지를 북돋는 것만 해도 정말 큰 효과를 볼 수 있거든요. 그러니 커뮤니케이션 매너는 태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전략이기도 한 셈이죠.
04.
제가 자주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는 상대가 질문을 닫아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가 주니어이던 시절에 TF에 함께 합류하게 된 선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뭔가 이상하다 싶어도 망설이지 말고 물어보고, 뭐 그냥 심심해도 물어보세요."
그땐 유머라고 받아들인 이 말이 사실 제겐 예상외로 큰 힘이 되었습니다. 흔히들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라고 하지 그 외 상황에서 질문하라는 이야기는 잘 안 하잖아요. 근데 '본인 의견과 달라도 이야기해달라', '꼭 이유가 없더라도 자주 소통하자'라는 그 의지치를 보이니 저 또한 질문을 하고 의견을 내는 데 큰 걸림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가끔 선배의 유머를 차용해 후배들에게 말을 건네고는 하죠.
05.
다음으로는 피드백을 전달할 때 상대가 무안해질만한 뉘앙스를 풍기지 않는 것입니다.
대면 커뮤니케이션 외에도 메일, 메신저, 전화 등으로 소통해야 하는 업무 환경 속에서는 의외로 상대를 무안하게 하는 피드백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바쁘다는 핑계와 얼굴 보고하는 게 아니니 그렇다는 핑계를 백번 감안하더라도 사실 이거야말로 태도의 문제이자 매너의 문제죠. 사람은 학습의 동물이니 한 번이든 여러 번이든 그런 경험이 쌓이면 커뮤니케이션 욕구가 확 줄어드니까요.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지는 순간이 바로 이때일지도 모릅니다.
06.
따라서 피드백을 할 때는 팩트 자체에만 기반해서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특히 저는 피드백에 빠져서는 안되는 3가지 요소가 있다고 보는데요, 바로 '목표', '의견', '근거'입니다. 다시 말해, 내 의견을 전달하기에 앞서서 우리가 이것을 통해 무엇을 얻거나 달성하고자 하는지를 다시 한번 체크하고, 그다음 내 의견을 정확하게 설명한 다음,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이유와 근거를 설명하는 겁니다.
07.
아주 쉽고 심플한 과정이죠. 하지만 의외로 이걸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의견만 제시하고 이유를 설명하지 않거나, 목표는 잊은 채 그때그때 떠오르는 감정만을 피드백하는 건 진짜 해서는 안 되는 피드백이니까요, 사소한 어젠다에 관한 것이라도 상대가 무안해지거나 애매모호함 속에 빠지지 않게 명확하고 간결하게 답하는 것이 좋습니다.
08.
마지막으로는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 상대방의 디테일을 잘 기억해 주는 것이 좋은 결과를 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정답이 없는 분야에서 일을 할 때 가장 힘든 건 더 발전적으로 키워갈 수 있는 대화를 조기 종료 시키는 화법의 사람들을 만날 때죠. 독단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거나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여러 사람을 당황시키거나 남들과 포인트를 맞추지 못해 헤매는 상황을 만드는 등 그 유형도 참 가지각색입니다.
09.
하지만 이전의 대화들을 잘 기억해 놓거나, 타인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포인트, 싫어할 만한 언행들을 미리 학습해 놓으면 이런 충돌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하나하나 다 기억하냐'라고 하지만 ⟪기억의 뇌과학⟫이라는 책을 쓴 '리사 제노바' 박사에 따르면 '기억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철저히 의지의 문제'라고 합니다. 즉, 내가 기억할 의지를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는 남겨 놓고 학습하면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이죠. 가만히 돌이켜보면 금방 공감되실 겁니다. 본인에게 유리한 것은 희미한 조각들까지도 기억하면서, 본인에게 불리한 건 블랙홀에 밀어 넣은 듯 흔적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을요. 이런 선택적 기억력을 기반으로 대화하는 사람들은 결코 최상의 토론을 이끌어낼 수 없는 법이죠. 상대방 역시 진정성 있는 태도로 대화를 임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10.
그러니 매번 토론하고, 비판하고, 소통하며 일해야 하는 우리 모두에겐 이 커뮤니케이션 매너가 단순히 태도의 문제에만 그치지 않는 게 확실해 보입니다. 더 좋은 결과물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자 지름길로서도 충분히 활용이 가능한 도구니까요, 좋은 평판을 유지하고 원만한 관계를 만들어 갈 목적 외에도 순수히 '일이 잘 동작하게' 할 의도로 커뮤니케이션 매너를 장착해 보면 어떨까 싶네요. 정답이 딱 정해져 있지 않은 분야라면 더더욱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