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열문단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영 Aug 09. 2023

언제든 '가운데'로 모일 수 있는 사람들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30

01. 

제가 좋아하는 ⟪드래곤볼⟫이란 만화책에는 '정신과 시간의 방'이라는 공간이 나옵니다.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된,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이죠. 그곳에서는 시간의 개념 또한 다르기 때문에 바깥세상인 지구에서의 1년이 정신과 시간의 방에서는 1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극한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수련이 필요할 때면 주인공들은 여지없이 이 공간을 찾습니다.  


02. 

등장인물들은 이 공간에 들어갈 때마다 함께 훈련하는 동료들에게 '너무 멀리 가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당부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이 가끔은 일을 하는 우리들에게 보내는 당부의 메시지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뭐 흔히 말하는 '회의 중에 안드로메다로 갔다', '저 사람 혼자 완전히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지칭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조금 더 중요하고 필수적인 상황을 설명하고자 하거든요. 


03. 

수많은 가능성을 타진해 본다는 건 비단 기획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도 매우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각자가 가설을 세우고, 스터디를 해보고, 아이디어를 디벨롭 해본다는 것은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업무 루틴이지만 결국 그 속에서 위대한 제품과 서비스들이 탄생했음을 생각해 보면 결코 등한시할 수 없는 과정이죠.  그래서 저는 어젠다가 하나 떨어지면 여러 사람이 각자의 나침반을 들고 항해를 떠나보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간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면 사실상 좀 뻔하고 일방향적인 의견으로 급하게 수렴할 가능성이 높아지죠.  


04.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각자가 아무리 멀리 항해를 떠났다고 하더라고 우리가 다루고 있는 어젠다, 다시 말해 그 본질의 한 가운데로 언제든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동쪽으로 떠난 사람은 동쪽에서 '여기에 뭔가가 있다'고 소리치고, 서쪽으로 떠난 사람은 서쪽에서 '다들 여기로 와보라'고 고함치면 사실상 따로따로 여정을 떠난 의미가 없죠. 본인이 아무리 멀리 갔어도 결국에는 다시 우리가 위치한 '가운데'로 돌아와 그곳에서 모두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05. 

회사 동료가 우스갯소리로 '저는 주말이 무서워요'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본인의 팀장님이 주말만 지나고 나면 '내가 주말 동안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라는 말과 함께 본인이 탐험(?)을 떠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고 하더군요. 듣다 보면 흥미로운 것들도 여럿 있지만 가장 난처할 때는 원래 논의하기로 한 어젠다는 제쳐두고 본인이 감동받은 포인트만 늘어놓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원래의 논의를 시작했던 그 '가운데'로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슬픈 이야기였죠.  


06. 

물론 어젠다 자체를 옮겨야 할 때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원점이던 그 '가운데'를 이동시켜 새로운 기준을 만들고 본질을 재정의해야 할 때도 있죠.  하지만 그럴 때면 본인이 발견한 것들을 근거로 왜 우리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논의를 시작해야 하는지를 설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모두가 다시 만나기로 한 그곳으로 복귀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죠. 저는 이게 조직생활의 기본이자 합의 문화의 시작이자, 올바른 협업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07. 

한편으로는 개개인의 삶에서도 이런 방식이 참 중요하다고 느껴져요. 살다 보면 누구나 각자에게 기준이 되는 원점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 원점에 발이 묶여있을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무게중심을 두고 사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꽤 멀리 여정을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와 나의 고민들을 정리할 줄 아는 게 현명한 삶의 태도는 아닌가 싶습니다. 


08. 

그래서 예전에는 여럿이서 회의를 할 때든 아니면 혼자 계획을 세우든 간에 화살표를 참 많이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고 어떤 방향으로 뻗어나가야 하는지를 표시하고자 했던 거겠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흰 종이에 점하나를 찍고 거기서부터 빙빙 둘러 큰 원들을 그리는 방식을 자주 이용하는 거 같아요. 그럼 마치 양궁 과녁 같은 그림이 계속 겹쳐 그려지게 되죠. 아마도 우리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결국 다시 돌아와야 하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설명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09. 

좀 과한 의미 부여인지는 모르겠지만 ⟪드래곤볼⟫에서의 정신과 시간의 방도 비슷한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닐까 싶어요. 그 안에서 몇 배 강한 중력으로 몇 백배나 긴 시간을 있다 보면 외부 세상과 점점 단절되는 경험을 하겠지만, 결국 방문을 나서 현실 세계로 돌아올 때는 본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시금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을 테니 말이죠.  


10. 

그러니 저도, 또 여러분도 한 번 고민해 보는 건 어떨까 싶어요. 나에겐 그런 '중심'이라고 부를 수 있는 원점이 있는지 그리고 그 점으로부터 자유롭게 멀어져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는 정신과 시간의 방과 같은 공간이 있는지, 마지막으로 아무리 멀리 도망(?) 쳤다고 해도 다시금 돌아올 수 있는 나만의 이정표가 있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브레인스토밍에는 '폭풍전야'가 필요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