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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Jul 30. 2023

브레인스토밍에는 '폭풍전야'가 필요하다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29

01. 

토막 상식을 하나 알려드리자면 불과 몇 년 뒤면 '브레인스토밍'이란 단어가 탄생한 지 딱 100년이 됩니다. 

브레인스토밍이란 용어는 1930년에 광고 제작책임자로 일했던 알렉스 오스본이란 사람이 자신의 저서 ⟪Applied Imagination⟫이란 책에서 처음 사용한 개념이었고, 이후 1948년에 쓴 ⟪Your Creative Power⟫를 통해 창조적인 생각을 끌어내기 위한 브레인스토밍의 4가지 기본 규칙을 제시하며 대중화되기 시작했거든요. 우리가 흔하게 쓰는 단어의 유서가 대공황 시대까지 올라간다는 사실이 무척 신기할 따름이죠.  


02.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애니메이션 그룹 '픽사'에는 이 브레인스토밍을 특이하게 활용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바로 픽사 스토리 작가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Pause Storming이 그것이죠. 픽사와 디즈니에서 모두 활동한 경험이 있는 스토리 작가 엠마 코스트는 이를 두고 마치 '폭풍전야(calm before the storm)'와도 같은 시간이었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03.

개념은 간단합니다. 어떤 작품에 대한 초기 컨셉과 아이디어를 상징하는 '로그 라인(log-line)'이 설정되면 그 즉시 더는 아이디어를 디벨롭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회의를 멈추고 모두 자리를 떠나는 방법입니다. 

다소 의아하죠...? 좋은 컨셉이 확정되었다면 회의에 불이 붙어도 모자랄 텐데 찬물을 쏵 부어버린 채 회의를 종료시켜버리는 문화가 쉽게 이해되지는 않으니까요.  


04. 

여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수많은 가능성이 휘발되어 버리지 않도록 브레인스토밍 전 단계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는 취지 때문입니다. 

즉, 컨셉이 정해진 뒤에 곧바로 브레인스토밍을 이어가면 좋은 아이디어를 먼저 제시한 한 명에게 이목이 집중되고 머지않아 그 사람의 제안대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시작한다는 거죠. 그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떠올릴 수 있는 여러 가지 생각의 옵션은 자연스레 차단되고 결국 브레인스토밍이라는 명목하에 다들 쉽게 내린 결론만 만지작거릴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05. 대신 픽사의 스토리 작가들은 로그 라인이 던져지면 회의실을 박차고 나가 각자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상상력을 발휘해 저마다의 이야기를 써 본다고 합니다.  실제로 '니모를 찾아서'를 기획할 당시 "호기심 많은 아기 물고기와 그를 과잉보호하는 아빠 물고기가 바다 깊은 곳에 산다. 그러던 어느 날 아기 물고기가 사라진다."라는 문장만 가지고 각자가  어마어마한 상상력을 붙여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며칠 뒤 함께 모여 이야기를 하는 도중 실제 스토리의 뼈대가 완성되었다고 하죠. 훗날 스핀 오프로 제작된 '도리'라는 캐릭터는 또 전혀 다른 이야기를 써낸 한 작가의 이야기에서 차용해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06. 

이 장황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꼭 픽사 같은 크리에이티브 집단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일하는 회의 문화 속에서도 가끔은 Pause Storming 하는 단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운 회의 유형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결론이 안 나는 회의보다 오히려 너무 어이없게 결론이 나버리는 회의를 꼽을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꺼낼 수 있는 생각의 가능성을 모두 막아버린 채 너무 쉽게 길을 정해버리는 안타까운 사태가 벌어질 때죠.  


07. 

물론 장기간 고민하기 전에 우선 빠르게 결정하고 움직여야 하는 순간이 훨씬 많다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 유형을 좀 구분해 볼 필요는 있는 것 같아요. 속도가 중요해서 어딘가라도 깃발을 꽂고 달려가야 하는 상황인 건지 아니면 그저 그 당시 회의 분위기에 취해 살을 붙이고 뼈를 세우는 과정에만 몰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죠. 혹시라도 후자라면 (그리고 아직 우리에게 조금의 시간이라도 허락이 된다면) 저는 기쁜 마음으로 과감히 폭풍전야를 맞이해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08. 

가장 최악의 사례는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빠르게 초안을 진행했다가 나중에 가서야 다른 가능성은 없었는지 그 불안한 마음을 안고 샛길로 빠져버리는 경우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행동하는 대상이 전체를 이끌어가는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건 악수 중에서도 최악수를 두고 있는 거겠죠. 아이디어를 발산해야 하는 순간에는 가능성을 막고, 정작 추진력이 필요한 순간에는 엔진을 꺼버린다면 조직 자체의 동력이 기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09. 

픽사처럼 그 순간 회의를 종료하고 자리를 떠날 수 없다면 현실적으로 작은 장치를 두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브레인스토밍을 하는 중간중간 '확정할 것'과 '확정하지 않을 것'을 분류해서 다른 옵션을 생각할 수 있도록 문틈을 조금 벌려 놓는 방법이죠.  더불어 이어지는 다음 회의에서 이전에 했던 브레인스토밍 내용들을 한 번 복기하고 넘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이전 회의 때는 다들 동의했던 사안이 며칠 뒤에 생각해 보면 께름직한 경우도 부지기수니까 말이죠. '이미 대다수가 좋다고 한 건데 이제 와서 내가 이상하다고 하면 피해를 주는 거겠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그 사안을 공개적으로 테이블에 올리고 자유롭게 의견을 받은 다음 넘어가는 방법을 쓰는 겁니다.  


10. 

꼭 불타오르고, 합심을 하고, 결과를 부러뜨려 뭔가를 확정하는 것만이 좋은 회의는 아닙니다. 좋은 회의란 '왜 회의를 열었는가'라는 목적이 분명하고, 그 회의를 통해서 결정하기로 한 것만 빠르게 정리할 수 있는 회의를 뜻할 겁니다.  그러니 거대한 폭풍을 맞이하기 전에 스스로 폭풍전야 속에 생각을 담가보는 것은 어떨까 싶네요. 질보다는 양을 추구했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비판하지 않는 문화를 추구했던 오스본의 브레인스토밍 방식이 빛을 발하려면 언제 어떤 방식으로 폭풍을 몰아치게 할 지가 훨씬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니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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