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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Jul 18. 2023

나는 나를 통제할 의무가 있다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28

01.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자신의 '아날로그(?) 삶'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을 보니 새삼 그 철학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놀란 감독이 CG를 쓰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제 웬만한 영화 팬들이라면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그게 꼭 실제 상황을 구현해 촬영하겠다는 영화감독으로서의 소신에서 비롯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오히려 놀란 감독 자신이 '기술'과 '집중력'이라는 항목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것에 훨씬 근접한 주제인 것 같기도 합니다.  


02. 

놀란 감독은 영화 각본을 집필할 때 인터넷에 연결되지 않은 PC에만 글을 쓰고, 평소에도 이메일이나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습관에 대해 놀란 감독은 "기술이 제공하는 편의는 놀랍지만, 이 기술에 얼마나 빠질지는 내 개인의 선택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과거 인터뷰를 통해서도 "나는 러다이트 지지자도 아니고, 기술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그저 관심이 없을 뿐이다. 나는 쉽게 산만해지기 때문에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을 피하고 싶어서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멀리 한다."고 했죠.  


03.

 저도 최근에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놀란 감독처럼 '기술'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요즘은 '일한다는 것', '논다는 것', '쉰다는 것' 이 3가지에 대한 경계 구분을 잘하는 것만으로도 시간 활용을 정말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저는 '일할 때 하고, 놀 때 놀고, 쉴 때 쉬기'만 해도 아주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봅니다. 대신 '일하려고 앉았다가 딴짓하면서 노느라 쉬어야 할 때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것'이 최악의 습관이 아닐까 싶어요. 우리가 죄악시(?) 해야 하는 건 많이 놀거나 많이 쉬는 게 아니라 집중해야 할 때 집중하지 못하는 것일 테니 말이죠.  


04.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 알아도 잘 안되는 것'이 문제죠. 저 역시도 집중력에 관한 책이 나오면 흥미로라도 읽어보는 편이고, '단순하게 살기', '채움보다 비움', '정리하는 습관' 같은 키워드의 아티클은 눈에 밟힐 때마다 저장해두는 편이지만 이 좋은 내용들을 어떻게 해야 내 습관으로 정착시킬 수 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05. 

어쩌면 저는 '내가 나 자신에게 물리적인 강제력을 얼마나 동원할 수 있느냐'가 집중의 성패를 좌우한다고도 봅니다. 좀 무서운 워딩을 사용하긴 했지만 사실 놀란 감독이 사용한 방법도 이와 다를 바 없죠.  

아예 시작부터 인터넷을 off-line 상태로 만들어 글을 쓰고, 스마트폰 대신 2G폰을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것 역시도 집중하기 위한 환경을 얼마나 제어할 수 있느냐의 문제일 테니까 말이에요.  


06. 

예전에 곤도 마리에의 인터뷰 기사를 보다가 이런 문장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정리가 안되는 이유는 정리가 안될만한 환경을 계속 만드는 데 있어요. 옷을 엉뚱한데 두게 되는 건 옷을 둘 만한 적당한 장소가 보이기 때문이에요. 옷장까지 가는 게 귀찮아서 일단 거기에 둔다는 거거든요. 그러니 목적지까지 가는 경로에 이상한 거처들을 만들지 마세요. 그게 정리를 방해하는 첫 번째 요소에요." 


07. 

개인적으로 크게 공감했던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집중이 안 될만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서 집중이 안 된다고 투정 부린 제 자신이 진짜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했죠. 때문에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건 굳은 마음가짐이나 명상 수련법에 앞서 물리적으로 내 환경을 통제하는 용기는 아닐까 싶어요. 딴짓을 하게 될까 걱정된다면 딴짓 자체를 못하는 환경을 만들고, 딴생각이 자꾸 떠올라 힘들다면 생각이 이탈되는 즉시 책상에서 일어나 차라리 과감히 쉬어버리는 게 답일 수도 있으니 말이죠.  


08. 

그래서 저 역시도 최근엔 계속해서 이런 물리적인 강제력(?)을 스스로에게 행사해 보려고 노력 중입니다. 

자기 전에 스마트폰 보는 습관을 덜어내고자 불을 끄기 전에 아예 스마트폰을 저 멀리 충전기에 꽂아둔 채 눕습니다. 손에 쥐고 침대에 눕는 그 행위 자체를 통제하는 거죠.  책을 읽는 도중 핸드폰 알람이 오면 거기에 신경 팔리는 게 싫어서 주말엔 가끔 핸드폰은 집에 두고 집 근처 카페로 갑니다. 그렇게 한두 시간이라도 책을 읽고 오면 그나마 오롯하게 집중해서 제 시간을 사용할 수 있더라고요. 별것 아니지만 통제를 통해 무엇인가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게 꽤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09. 

세상엔 특별한 비법이 있는 분야도 있지만, 왕도가 없는 분야가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설사 왕도라는 게 있다고 해도 그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방법일 확률이 높죠.  그러니 좀 잔인한 얘기긴 해도 집중을 위해서는 나 자신을 덜 신뢰하는 게 답일 수도 있습니다. 

'진짜 내가 10시부터 뽝 집중해서 1시간 만에 뽝 끝낸다' 해놓고 그렇게 해보신 적 있나요...? 우리 각자도 사람인지라 목적지까지 가는 경로에 이상한 거처들이 있으면 들어가 보고 싶고, 앉아 쉬고 싶고, 괜히 기웃거려보고 싶은 게 당연한 거죠.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은 뒤로 하고 일단 통제부터(?) 해보는 게 더 효과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10. 

한 가지 더 위로의 말씀을 드리자면 나를 통제하는 것도 내 선택이고 내 자유입니다.  보기 싫은 거 안 보는 것, 하기 싫은 것 안 하는 것도 일종의 통제이듯이 내가 진짜 달성하고 싶은 것을 위해 주변 환경을 선택적으로 제어하는 것도 자유에 이르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죠.  그래서 저는 적어도 습관에 있어서는 저 자신을 좀 덜 믿기로 했습니다. 대신 계속해서 저를 효율적으로 몰아갈 수 있는 장치들을 연구하는데 매진하려고요. 스스로에게 '우쭈쭈' 해줘야 할 순간이 있다면, 반대로 '에라이 이놈아'해야 하는 순간도 반드시 필요한 법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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