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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Jul 16. 2023

넓은 인간관계 대신 '기준이 있는 인간관계'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27

01. 

어제 tvN의 나영석 PD가 진행하는 ⟪나영석의 나불나불⟫에 배우 차승원 님이 출연한 영상을 봤습니다. (TMI 지만 요즘 웬만한 토크쇼보다 훨씬 재미있게 보고 있는 컨텐츠 중 하나입니다.) 

차승원 님의 시시콜콜한 농담을 즐기면서 재미나게 보고 있던 중 영상 중반에 이르러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한 이야기는 정말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포인트가 구석구석 녹아있는 말들이었죠. 


02. 

주요 멘트를 정리해서 전달해 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자정능력이 떨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땐  나도 모르게 상대방에게 송곳 같은 말과 행동을 하게 되고 온전히 내 실수로 관계가 훼손된다. 모든 관계를 깊게 가지고 갈 수 없다. 나는 좋은 관계와 안 좋은 관계가 있을 뿐이지 괜찮은 관계란 없다고 생각한다.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는 순간 내 자정능력이 떨어지고 굳이 그렇게 정리하지 않을 관계도 스스로 못 참고 안 좋게 정리해버리는 경우가 생긴다." 


03. 

저는 이 말이 근래에 들은 그 어떤 말보다도 좋았습니다.  사실 나이를 조금씩 먹고, 또 사회 경험이 조금 더 쌓이면서 자주 듣게 되는 질문은 의외로 인간관계에 대한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인간관계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뾰족한 답을 내리기 어렵고 섣불리 조언을 해줄 만한 분야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만 '적어도 나는 인간관계에서 이런 부분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이렇게 사람을 대하고 있다'는 타인의 포인트들을 하나씩 주워모으면서 저 나름대로의 생각과 기준들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을 뿐이죠.  


04. 

제가 지금껏 느낀 인간관계에 대한 깨달음 중 하나도 '어설픈 관계가 많아지면 좋은 관계까지도 그르친다'입니다. '어떻게든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니 계속 연락은 하고 지내야지'라든가 '이렇게 하나씩 관계를 쌓아가는 것도 인생을 배워가는 과정이라 생각하자' 같은 마인드는 사실 진짜 좋은 인간관계를 만드는 데 있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오히려 자꾸 스스로 이상한 가면을 쓰게 만들고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왜 저 사람은 내가 마음을 쓰는 만큼 본인은 뭔가를 하려고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계산기만 두드리게 되는 순간이 더 많았습니다. 


05. 

그래서 저는 '인맥'이나 '연줄'이라는 단어에 조금은 염증이 있는 것도 같아요. 단어의 뜻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인맥의 '맥(脈)'이든 연줄의 '줄'이든 그저 끈을 놓지 않으려는 그 단순한 심정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는 단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었죠. 어쩌면 서로가 서로의 진심을 헤아리지는 못한 채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그 파르르한 줄 하나에 의지해 그걸 인맥이나 연줄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싶었죠. 


06. 

때문에 저는 더더욱 '관계'라는 말이 좋아졌습니다.  

관계라는 말은 관계할 '관(關)'에 묶을 계(係)'자를 씁니다. 재미있는 건 이 '관'자의 모양자 안에 '실로 꿸 관 자'가 하나 더 들어가 있다는 거죠. 그러니 본래의 뜻을 해석하자면 관계란 '실로 꿰어 매듭을 묶은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인맥이나 연줄에 비하면 그저 걸쳐있거나 닿아있는 수준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둘 사이가 꿰어지고 묶여있는 결속의 모양새인 것이죠.  


07. 

차승원 님의 말을 듣고서 이 한자들의 뜻이 다시금 다가온 것도 이 때문인 것 같아요. 어떡해서든 관계는 어느 정도 자신의 기준으로, 그게 어떤 관계인지 실로 꿰고 매듭지을 수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싶거든요. 꼭 모든 관계가 끈끈하고 타이트하게 조여진 관계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그 각각의 관계들을 내가 잘 인지하고 있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으니까요. 좋은 관계, 안 좋은 관계는 있지만 괜찮은 관계는 없다는 것에서 이 '괜찮은 관계'야말로 양쪽 모두에게 꿰어지지도, 매듭지어지지도 않은 그저 스을쩍 걸쳐있는 인맥과 연줄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죠.  


08. 

물론 저부터도 반성이 됩니다. 저도 참 많이 하는 말 중에 하나가 '지인입니다'라는 말이거든요. 누군가가 '저분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 친한 사이세요?'라고 물으면 늘 하는 대답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답이 바로 '지인'이었기 때문이죠.  저 혼자서만 내적 친밀감이 높은 상태라 상대의 동의를 구하지 못해서 그렇게 답하는 경우도 있고, 정말 서로의 존재만을 알고 있을 뿐이지 특별한 게 없어서 그렇게 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만 늘 이 지인의 바운더리 안에서 각각의 객체와 어떤 매듭을 짓고 풀고 있는지 정도는 염두에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09. 

안 그래도 피곤한 세상에 이런 것까지 생각하고 살아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이해됩니다. 하지만 무엇이든 '줄'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들은 기준에 따라 정리해두지 않으면 늘 엉키고 말더군요.   

지금 여러분의 TV 뒷면, 데스크탑이 놓인 책상 아래, 각종 충전기가 꽂혀있는 멀티탭 위를 한 번 봐보세요. 아마도 높은 확률로 둘 중 하나일 겁니다. 잘 정리되어 있거나, 전혀 정리되어 있지 않거나. 그마저도 '괜찮은 상태'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게 중요한 포인트죠.  


10. 

그러니 여러분도 한 번쯤은 스스로의 관계를 돌아보며 자신만의 기준으로 각각의 관계를 '정의'하고 '정리'해보면 좋겠습니다. 멀쩡하던 관계를 당장 끊으라는 얘기가 아니라는 건 누구나 다 아실 겁니다. 대신 '내가 사람을 대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나는 어떤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일까? 그렇다면 나는 나의 사람들을 앞으로 어떻게 대해야 할까?'에 대한 것들을 고민해 보는 거죠. 어쩌면 그게 우리에겐 진짜 관계 다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첫걸음이자 진정한 의미의 자정작용 일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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