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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Oct 22. 2023

특별한 인풋이 없다면 '생각의 조리법'을 다양하게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47

01 . 

재미있는 통계가 하나 있습니다. 유럽 내륙이나 미국 중부 지방처럼 바다에 접해있지 않은 곳의 사람들은 평소 섭취하는 어종이나 해산물의 수가 극히 제한적이라는 것이죠. 그나마도 가공식품으로 접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평생 살면서 약 10종의 어종도 채 맛보지 못하는 사람도 수두룩하다고 합니다. 


02 . 

그래서 내륙 지방에는 생선에 관한 요리법이 엄청 발전해 있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 싶으시겠지만 본인들이 수급할 수 있는 어종이 몇 종류 되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 이걸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수많은 요리법들을 개발한 것이죠. 

때문에 가끔 유럽 여행을 가면 평소 잘 알던 생선임에도 불구하고 그 맛이 기가 막힌 요리를 만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최대한 재료의 풍미를 돋우려 여러 방법을 동원하고 갖가지 소스와 사이드 메뉴를 곁들여 아주 훌륭한 요리로 내놓기 때문이죠. 


03 . 

반면 우리나라나 일본처럼 전국 어디에서든 쉽게 바다로 접근이 가능한 곳들은 이야기가 좀 다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나라에서 잡히는 어종을 생각하면 우선 동해, 남해, 서해가 다 각기 다르고 거기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조합하면 평소 맛볼 수 있는 생선의 조합은 오만가지로 늘어납니다.

그렇다 보니 회로 먹거나 구워 먹거나 조림 혹은 매운탕 정도의 요리만 하더라도 원재료가 가진 맛이 워낙 다양해 지루할 틈이 없는 거죠. 어쩌면 우리는 이런 천혜 환경의 감사함 덕분에 딱히 다양한 생선 조리법이 발전하지 않은 걸지도 모릅니다.


04 . 

왜 이렇게 긴 얘기로 포문을 여는지 궁금하실 텐데요, 이유는 딱 한 가지 입니다. 바로 '생각의 조리법'을 말하고 싶어서죠. 

기획이나 마케팅, 브랜딩, 디자인 등 뭔가를 생산해 내는 사람들은 늘 이 '재료'에 대한 고민이 정말 큽니다. 조물주처럼 아예 없던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한계가 있고 그렇다고 내 안에서 뭔가를 쥐어짜자니 거긴 더 큰 한계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늘 받거든요. 그래서 남들이 해봤다는 건 나도 가서 일단 경험하려 애쓰고, 외부로부터 받는 일정한 자극이 줄어들면 의도적으로 자극을 세팅하는 노력을 들이기도 합니다. 


05 . 

하지만 이건 각자의 환경과 생활방식과 삶의 가치관에 따라서 모두 다른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솔직히 누군가에겐 경험의 인풋이 훨씬 많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마치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사계절이 뚜렷해 그물만 던져도 매번 다른 어종이 쑥쑥 잡혀올라 오는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그런 분들은 자기가 가진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며 늘 새로운 것들이 쏟아져 나오니 마치 새로운 어종이 매번 탄생하는 바다를 끼고 사는 것과도 같죠.)


06 . 

그러나 대부분은 그리 자극적인 일상을 살 수 없습니다. 매일 인풋을 찾아 어디론가 떠난다고 해도 그 역시 적지 않은 비용과 에너지가 드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저는 이럴 땐 관점을 조금 바꿔서 '조리법'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노력을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DM으로 연락 주시는 분들께서 '근데.. 어떻게 그렇게 꾸준히 글을 쓰세요? 글감이 넘쳐나는 거 같은데 어디서 영감을 얻으시나요?'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럼 저는 진짜 억울한 마음을 꾹 누르고 이렇게 답하죠. 

'안 넘쳐나는데요.... 글감도.. 영감도..'


07 . 

대신 제 삶 역시 아주 특별할 것이 없으니 늘 두 가지를 소중하게 대하며 삽니다. 

하나는 원재료의 귀중함을 느끼는 것이죠. 매일 색다른 인풋을 얻을 수 없는 삶이기에 저는 제 주변 사람들이 던져주는 말과 글, 생각할 거리들이 너무 소중합니다. 그래서 제 책에는 지인들이 해준 말들이 마치 어록처럼 자주 등장하죠. 누군가는 흔한 물고기라며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 주는 쿨함을 가지고 있겠지만 저는 뼈에 붙은 살 하나도 떨어질세라 아낌없이 요리하고 싶은 마음이 크거든요. 그러니 타인이 무심코 내뱉은 말도 곱씹고 또 곱씹으며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와 인사이트에 집중해 봅니다. 


08 . 

다른 하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생각의 조리법을 다양화시키는 겁니다. 저는 제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단초들을 만나면 일단 이걸 어떻게 풀어볼지 고민하는 게 습관처럼 자리하고 있는 거 같아요. 그중에서도 글로 풀어내는 걸 가장 좋아하지만, 글이라고 해도 다 같은 글이 아니니 어떤 에피소드와 엮어서 무슨 메시지를 전달할지 또 어떤 풍미를 전달하는 글이 되게 할 건지 등을 꽤 진지하게 고민합니다. 


09 . 

그러다 얻은 작은 수확 중 하나는 점점 제 글맛을 좋아해 주는 분들이 늘어간다는 겁니다. 즉 '아주 특별할 것 없는 얘기더라도 이왕이면 당신의 글로 만나는 게 좋습니다'라는 반응을 보여주시는 거죠. 저는 이게 글을 쓰며 정말정말 보람차고 기쁜 포인트 중에 하나입니다. 흔하디흔한 게 광어, 연어라 해도 '저 집은 좀 다르게 요리하더라. 맛이 특별해'라고 해준다면 그만한 칭찬도 없으니 말이죠.  


10 . 

우리 인생 특별할게 없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푸념에 '인생이 원래 그런 거지'라고 말하는 분들의 진심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손에 주어지는 재료들을 감사히 생각지 않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임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걸 어떻게 조리해 낼 거냐 하는 건 온전히 우리에게 달려있고요. 

그러니 여러분도 각자가 하는 영역에 반추해 이 사실 하나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천혜의 환경이 없는 자들에겐 주어진 것들을 활용할 수 있는 지혜가 더 빨리 길러진다는 사실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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