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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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독서 클럽을 운영해온 지 이제 1년 9개월 정도가 됩니다. 세상에 흔하디흔한 게 책 모임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들과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냐에 따라서 그 색깔은 천차만별로 달라지죠.
모임을 리딩하다 보면 특정한 책이 특정한 누군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겠다 싶은 순간도 있고 또 누군가의 이야기 덕분에 다른 누군가가 새로운 것들을 시작하게 되는 장면도 목격합니다. 그럴 땐 이른 바 '연결'이 갖는 힘의 가치를 중력만큼이나 크게 체감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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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제가 처음 모임을 시작했을 무렵 초기 멤버분들에게 드렸던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본진(本陣)'에 관한 것이었죠.
요지는 이렇습니다. 대부분 커뮤니티 활동을 하는 분들은 회사에서든 일상에서든 어느 정도 갈증을 느끼는 분들일 확률이 높습니다. 현재 하고 있는 일 외에 다른 분야의 세계가 궁금하다든지, 다양한 사람을 만나 함께 대화하며 좋은 영감을 얻는다든지, 매일 비슷비슷한 삶 속에 작지만 이색적인 경험을 끼워 넣고 싶다든지 각자가 원하는 갈증의 형태가 저마다의 모습으로 존재하기 마련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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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주 가끔은 자신이 하는 커뮤니티 활동을 갈증의 해소가 아닌 현실 도피의 창구나 타인의 피드백을 부정하는 용처로 생각하는 분들을 보곤 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머물고 있는 본진에서 겪는 부침을 애써 외면하려고 하거나 현재 소속된 사람들과의 갈등을 내 탓이 아닌 것으로 합리화하기 위해 커뮤니티 활동을 이어가는 것이죠. 다행히 저희 독서클럽에서는 아직 그런 분을 뵙지 못했지만 예전에 제게 DM을 통해 이런 질문을 해오신 분이 있었습니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어서요. 독서모임이라도 하며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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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 심정이 어떤지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아니 오히려 제가 질문하신 분의 상황을 잘 모른 채 괜한 훈수를 두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죠.
그러나 모임을 이끄는 입장에서는 그 모임에 참여하고자 하는 동기를 잘 파악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라고 생각하기에 깊이 고민할 수밖에 없더군요. 결국 그분께는 솔직하되 나름 정중하게 거절 의사를 밝히며 저희 모임의 취지를 설명드렸고 그 설명을 드리는 가운데 '본진'이라는 개념을 떠올렸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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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진은 말 그래도 내가 한동안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이자 내 일과 내 삶의 중심이 되어주는 곳입니다. 이미 N잡러라는 말이 새로울 것 없는 시대고, 복수의 활동을 하고 있지 않으면 마치 게으르게 사는 것 마냥 눈치 주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본진이 주는 무게감과 의미는 결코 작지 않죠. 본진에서 너무 멀어지면 내 일과 삶이 흔들릴 뿐 아니라 나중에는 나의 본진이 어디였는지 쉽게 그 위치를 찾기조차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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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본진에 녹아들지 못한다고 해서 자꾸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고 그곳에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문제가 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커뮤니티 활동을 하는 것은 다시 내 본진으로 돌아가 일상을 잘 살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함입니다.
마치 여행을 떠나는 이유와도 같죠. 어딘가로 훌쩍 떠나 그 낯섦을 만끽하고 즐기는 이유 역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전에 없던 관점으로 내 삶을 다시 잘 가꿔가기 위함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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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본진을 떠나 새로운 베이스캠프를 방문할 때는 다시 귀로(歸路) 하는 여정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나는 어느 포인트에서 갈증을 느끼고 있는지, 무엇을 찾아 이 길을 떠나는지, 다시 돌아오는 그 순간에 내 손엔 뭐가 들려있기를 바라는지, 그게 본진의 일상에 또 어떤 도움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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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도 '모임 하나 하는데 그런 큰 결심이 필요한가요'라는 반문에 자신 있게 '네!'라고 답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했다가 뜻하지 않은 행운이 얻어걸려올 수도 있고 마실 삼아 나간 길에서 내 인생의 새로운 본진을 발견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하지만 제가 드리고 싶은 메시지는 '반드시 귀환하라'가 아니라 '지금 머물고 있는 본진을 늘 의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 지금의 우리를 만들고 또 성장하게 하는 것이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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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먹을텐데'라는 콘텐츠로 더 널리 알려진(?) 가수 성시경 님께서 이런 말을 하시더군요.
"댓글 보면 왜 가수가 노래 안 하고 처먹기만 하냐고 욕한다? 근데 나는 이것도 노래 잘하려고 하는 거야. 이것저것 다 해보면 나 스스로가 알거든. '아, 내가 먹는 것도 정말 좋아하지만 결국 나는 노래할 때가 제일 행복하구나' 하고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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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겠지만 (농담입니다...) 저는 적어도 이렇게 본진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삶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내 두 다리가 어느 땅에 붙어 있는지 그리고 그 두 다리가 지금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번갈아 가며 체크하는 게 우리 삶의 불확실성을 많은 부분 제거해 주기도 하니까요. 무작정 '싫다 싫어'만 외칠 게 아니라 가끔은 의도적으로 내 본진을 리마인드해 보는 것도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