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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Oct 27. 2023

누군가에게 쓸 최소한의 마음은 남겨둬야지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49

01 . 

심심하면 버릇처럼 '하얗게 불태웠다'는 말을 쓸 때가 있었습니다. 몰아치는 업무들과 그 과정에서 받은 스트레스, 그럼에도 하루를 무사히 마친 감사함이 마치 휘핑크림 얹은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호흡을(?) 자랑하며 뒤범벅이 되는 순간에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던 말이었죠. 그럴 때면 저 스스로도 하루를 잘 산 건지 아니면 그저 하루를 소모하고 있는 건지 헷갈리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02 . 

하지만 그런 말이 무색하게 또 하루의 중요한 루틴인 운동을 하러 가는 저 자신을 보면서 '그래도 이 와중에 운동 즐길 에너지는 남아있네'라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이번엔 흡사 '배가 불러 죽을 거 같아요. 그치만 디저트 들어갈 공간은 따로 빼두었습니다'라고 외치는 모양새였죠.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이 가진 모순들이 발견될 때면 나만 아는 머쓱함이 느껴지지만 가끔은 이런 포인트에서 의외의 교훈을 얻기도 합니다.


03 . 

최근 담당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프로젝트가 끝을 향해 달려가는 시점은 모두가 예민해지는 시점이기도 하죠.

사람이 절박할 때 본성이 나온다고 이때는 각자가 가진 인격의 클라이맥스를 보게 되는 때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들을 다독이며 조금이라도 좋은 에너지를 전달하려는 사람이 있고 그와는 완전히 반대로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 갉아먹으며 '저 지금 예민하니까 건드리지 마세요'라며 작은 정전기도 허용하지 않는 사람이 있거든요. 자신의 기분, 상황, 조건, 생각에 무조건 타인이 싱크를 맞춰야 한다는 꽤나 이기적인 애티튜드죠.


04 . 

그러나 타인을 위해 쓸 최소한의 마음 씀씀이를 남겨둬야 하는 타이밍도 이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얗게 불태웠다고 해도 하루의 루틴을 챙길 에너지는 남겨두고, 배가 터질 듯이 먹었대도 대미를 장식할 디저트 배를 따로 분류해두는 것처럼 가끔은 내 마음의 일부를 떼어내 이건 타인을 위해 사용한다는 생각을 하는 게 훨씬 속 편할 때가 있다는 얘기죠.


05 . 

착한 사람 코스프레를 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그 마지막 마음의 공간조차 비워두지 않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니까요. 내 마음이 문드러지는데 그래도 사회생활은 해야 하니 억지로라도 웃으며 마침표 찍자는 말은 더더욱 아니니 오해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누가 뭐래도 감정의 중심은 나 자신이고 그게 휘청거릴 만큼 타인을 챙기다간 오히려 나와 상대 모두를 놓칠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이니까요.


06 . 

대신 '내가 어떤 식으로 압박을 당하더라도 최소한 타인에게 이 정도의 배려는 해줄 수 있다'는 마지노선을 정하고 일을 시작하면 의외로 감정 컨트롤이 쉬워지더라고요.

저 역시 무덤덤한 스타일보단 민감한 스타일에 가까운 타입이라 뭔가 조여오는 상황이 되면 일정 부분 스트레스를 받는 포인트가 늘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최소한의 마음 공간(?)을 두고 상대를 대하니 다소 껄끄러운 상황도 꽤나 스무드하게 넘기는 경우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07 . 

예전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친한 선배에게 했더니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흔히 '자비를 베풀라'라고 할 때 쓰는 '자비'라는 말이 실제로는 한 단어가 아니라 '자(慈)'와 '비(悲)'가 따로 구분되는 용어라고 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자(慈)는 적극적으로 상대에게 이익과 기쁨을 주는 것을 뜻하고 비(悲)는 고통받는 이의 불이익과 근심을 일부 덜어주는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사실상 '자'와 '비'를 모두 행하면 베스트이지만 그럴 수 없다면 일단 '비'를 먼저 실천하라고 한다는 거죠.


08 . 

저는 이게 내가 예민한 순간에 타인에게 마음을 쓰는 현명한 방법의 기초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힘든 마당에 타인에게 큰 기운과 새로운 에너지를 주는 '자'의 능력을 발휘하기는 여간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대신 적어도 상대방에게 (특히 함께 일하는 가까운 대상에게) 불필요한 근심과 걱정을 안길 필요는 없다고 보거든요. 그리고 이건 아주 작은 마음 씀씀이만으로도 어느 정도 해결되는 문제임이 분명하고 그건 개인의 애티튜드와 직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09 . 

힐튼 호텔의 창업자인 '콘래드 니콜슨 힐튼(Conrad Nicholson Hilton)'은 사업 초창기에 모블리 호텔이란 작은 모텔급 숙박 시설을 운영했습니다. 천부적인 사업 재능을 가진 그는 현대 어메니티 문화의 시초가 되는 호텔 용품을 기획, 개발하고 세탁물 이송 장치 및 객실 환풍구에 관한 특허도 가지고 있죠.

재미있는 건 그런 지독한 비즈니스맨이 늘 호텔의 객실 하나는 빈 방으로 두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아주 예외적인 상황이 생길 수 있으므로 방 하나는 비워둔다'는 원칙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10 . 

저는 불교의 자비도, 콘래드 힐튼의 빈방 원칙도 결국 그 궤는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타인을 위해 내 공간의 일정부분은 내어줄 각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죠.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도 그런 공간이 존재할 때 조금이나마 더 나은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모든 빗장을 걸어 잠근 채 스스로를 전소(全燒) 시키며 살 것이냐, 아니면 누군가를 위해 아주 작은 사랑방 하나를 남겨둘 것이냐는 전적으로 각자의 애티튜드에 달려있는 것이니까요, 오늘은 내가 내어줄 마음 씀씀이의 스펙을 한 번 정의해 보는 것도 괜찮은 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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