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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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엔 오랜만에 대학생분들을 대상으로 작은 세션과 Q&A를 진행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중 몇 가지 질문을 받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영감을 수집하고 인사이트를 얻는 방법에 대해 궁금해하시더군요. 뾰족한 답변을 해드리면 좋았겠지만 저 역시 '이 방법이 최곱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죄송스러운 마음이 컸습니다. 대신 작게나마 이런 답변으로 제 생각을 표현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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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이유를 찾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요즘엔 감상과 감탄은 정말 잘하는데 그 이유를 물어보면 답변 자체를 귀찮아하는 사람들도 종종 보거든요. 하지만 제게는 그 작품만큼이나 추천해 주는 상대방이 왜 좋았는지, 뭐가 아쉬웠는지를 얘기해 주는 게 몇 배는 더 의미 있는 포인트입니다. 그러니 나름의 이유를 찾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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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기획자의 독서⟫를 통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저는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일이 어쩌면 '이유를 기획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봅니다. 저마다 뭔가를 써야 하는 이유, 사야 하는 이유, 봐야 하는 이유, 가야 하는 이유, 해야 하는 이유 등을 만들고 전달하는 영역에서 일하고 있을 확률이 매우 크기 때문이죠.
그러니 이유를 찾고 만들고 전달하는 걸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이유를 설명하는 것에 귀차니즘을 느끼는 건 업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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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이나 인사이트라는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일 수 있겠죠. 저는 업무적으로 영감을 주는 포인트든, 아니면 개인적으로 쓰는 글의 글감이 되었든 간에 누군가가 관심 있어 하는 포인트와 그 관심의 이유를 연결 지어보는 대서 많은 단초를 발견합니다. 천명, 만명이 즐기고 소비하는 콘텐츠라고 해도 내가 주목한 그 한 사람이 자신이 호감을 가진 대상에 대해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데서 더 또렷한 실마리를 발견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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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론 이런 생각을 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좋고 싫음엔 이유가 없다'라고 말이죠. 맞는 얘기기도 합니다. 그렇게 이유를 표현하려고 드는 순간 솔직함보다는 꾸밈의 언어가 먼저 튀어나오는 경우도 있죠. 때로는 말이나 글로 치환하는 대신 오롯이 가슴에서 느껴지는 뜨끈뜨끈함으로 맞이해야 하는 콘텐츠가 있음에 저도 크게 공감합니다. 이유를 찾는 게 촌스러워지는 순간이 바로 이 때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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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말이 이유 찾기의 소중함을 전면 부정하는 근거로 쓰일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경험을 빗대서 표현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저는 책이나 영화를 보든 아니면 좋은 공간을 방문했든 하물며 지인들에게 좋은 말을 듣든 간에 그걸 수집하고 기록해둘 때는 작게나마 제 마음이 움직인 포인트를 기록해둡니다. 그 아카이빙의 결과물도 이제 제법 쌓여있죠.
그런데 가끔 예전에 써놓은 이유들을 읽어보면 '이게 정말 내가 쓴 글이 맞나?' 싶은 대목들이 발견됩니다. 마치 다른 사람이 써놓고선 제게 장난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마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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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 기분이 불쾌하느냐하면 전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그런 저를 발견하는 게 신기하고 반갑습니다. 그건 그때의 콘텐츠를 소비할 때 내가 어떤 심정을 가졌는지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증표이자 또 시간이 지난 만큼 나의 생각과 성향이 업데이트되었다는 일종의 히스토리이기 때문이죠. 아마 그냥 마음속 그 뜨끈뜨끈함으로만 남겨두었다면 저는 제 변화를 가늠해 볼 어떠한 기준도 갖지 못했을 겁니다. 이유가 저를 다시 깨웠고, 이유가 저를 다시 생각하도록 해준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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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계의 살아있는 거장 중 한 명인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전 세계에서 캐스팅 파워가 가장 높은 감독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헐리우드에선 '스콜세지가 전화를 걸거든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참여하겠다고 말해라'라는 농담반 진담반의 풍문이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중 거의 유일하게 '왜 저인가요?'를 집요하게 따져 물었던 배우가 바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였다고 합니다. 이젠 거의 스콜세지의 페르소나가 된 지 오래인 그이지만 늘 새로운 작품이 들어갈 때는 해당 캐릭터에 자신이 캐스팅된 이유를 상세하게 따져 묻는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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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그런 디카프리오를 높이 평가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레오는 '왜?'라는 질문에 대한 집요함을 가졌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고집불통의 자아를 가진 사람이란 얘기는 아닙니다. 레오는 현장에서 늘 '그건 왜 그런가요?'라는 질문을 던지고선 상대방의 답변을 요구합니다. 그리고는 집중해서 그 이유를 듣고 난 다음 딱 한마디 하죠.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레오는 상대방이 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그게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얼마나 비슷하고 다른지를 비교해 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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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이유 없어요', '그냥 하는 거죠 뭐', '생각하거나 의식해 본 적은 없습니다' 같은 말이 얼마나 쿨해 보이는지는 저 역시도 너무 잘 압니다... (멋지죠 그런 말). 하지만 매일 아침 자신의 뮤즈로부터 영감을 로켓배송 받는 분들이 아니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건 왜 이렇고 저건 왜 저런가' 일일이 두드려보며 생각의 땔감을 하나 둘 주워모으는 일일 겁니다. 이유만 따지고 있는 건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이지만 나름의 이유를 찾아 새로운 원동력으로 삼는 행위는 세상 스마트하고 효율적인 일일 테니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