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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Nov 17. 2023

긴 호흡의 업무가 주는 고유의 맛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53

01 . 

최근 긴 프로젝트 하나를 끝마쳤습니다. 심지어 저는 프로젝트가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시점에 합류했음에도 초기 기획부터 최종 마무리되는 지금의 시점까지 거의 9개월가량이 걸린 대규모 프로젝트였죠. 그러니 실제 그 일의 전 단계를 밟아오신 분들은 수년에 걸쳐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었음이 분명하기에 딱히 엄살을 부리기도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02 . 

사람은 긴 호흡의 업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짧은 호흡의 업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짧은 호흡이란 흔히 '손이 빠르다'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경향이 큰 업무인데 작은 미션 하나하나를 클리어하며 새롭고 도전적인 일로 재빠르게 옮겨가는 특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죠. 반면 긴 호흡의 일은 시간은 제법 걸리더라도 실현 가능한 스케일이 확실히 다르고 그로 인해 얻어진 결과물이 꽤 오랫동안 동작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오래 준비한 만큼 긴 수명을 가지는 일들이죠. (물론.... 잘 되었을 경우의 이야기입니다.)


03 . 

둘 중에 뭐가 더 값진 업무인가를 비교하는 것은 세상 어리석은 일일 겁니다. 긴 호흡의 업무가 더 중요하고 짧은 호흡의 업무가 덜 중요하다고 보는 건 정말 일을 해보지 않은 사람의 입장에서나 하는 말이기 때문이죠. 실제로 일하다 보면 너무너무 중요한 일을 짧은 호흡으로 끝장 봐야 하는 순간도 있고, 짧은 호흡이라 생각하고 시작한 일이 나도 모르게 점점 그 파이를 키워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일도 있으니까요. 누구도 쉽게 예측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일의 호흡이기도 합니다.


04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건 긴 호흡의 업무에는 그 호흡만이 주는 고유의 맛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짧은 호흡의 업무에 대한 장점이나 재미는 비교적 잘 공유가 되는 편이지만 상대적으로 긴 호흡의 업무는 그렇지 못합니다. 심지어 종종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하죠. 제 경험에 비춰보더라도 긴 호흡의 업무에 투입되면 한숨부터 푹푹 내쉬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이유도 제각각이었는데 '언제 끝이 날지도 모르는 일이니 시작할 엄두가 안 난다', '해가 바뀌도록 이 업무만 하고 있으면 너무 지루할 것 같다', '이 프로젝트 끝날 때쯤이면 시대가 바뀌고 트렌드가 변해있을 것 같은데, 나만 도태되는 것 아닌지 겁난다' 등 다채로운(?) 사유가 존재했습니다.


05 . 

여기에 제 생각을 얹어보자면 이렇습니다.

우선 긴 호흡의 업무에는 두드러지는 몇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상위 기획의 중요성입니다. 호흡이 긴 업무는 실제 적용될 세부 기획의 방향타가 되는 상위 기획이 훨씬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이뤄집니다. 준비과정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산출물이 유지되는 기간 또한 결코 짧지 않기 때문에 여러 변수를 고려하고 많은 대안을 살펴보는 노력이 필요하죠.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배우며 성장하는 포인트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긴 호흡의 업무를 하고 나면 자의든 타의든 눈에 띄게 성장했다고 평가받는 경우가 많죠.


06 . 

두 번째는 선택과 집중의 의사결정이 체득된다는 사실입니다. 긴 호흡의 업무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A가 맞고 B가 틀리다라는 명제를 서로 공유하게 됩니다. 짧은 호흡에서는 쉽게 눈에 띄지 않거나 가치 판단을 하기 어려웠던 것들이 꽤 긴 시간을 거치다 보면 자연스레 입체화되는 거죠. 이 과정을 몇 번 반복하면 무엇을 선택해야 하고 또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기준이 생기고 스타일이 확보됩니다. 저는 이게 긴 호흡이 주는 업무의 아주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07 . 

세 번째는 협업하는 동료들에 대한 파악이 비교적 정확히 이뤄진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건 짧은 호흡의 일에서도 드러납니다. 아무리 호흡이 가쁜 일이더라도 몇 차례 이어지다 보면 '이 사람은 이렇게 일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일한다'는 사실이 쉽게 파악되니 말이죠. 

하지만 긴 호흡의 일에서는 마치 이게 한 사람의 생애 주기(?)처럼 더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언제 힘을 얻고 언제 지치는지, 어떤 포인트에 취약하고 반대로 어떤 점에 강점을 보이는지, 초반부터 치고 나가는 스타일인지 천천히 달아올라 끝까지 온도를 유지하는 타입인지 각자의 성향이 꽤 정확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긴 시간을 함께 하다 보면 서로에게 이 사실을 숨기기도 매우 어려워지죠. 


08 . 

여기에 마지막 하나를 덧붙이자면 저는 '수정과 발전'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을 꼽겠습니다. 쉽게 말하면 호흡이 긴 업무의 과정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고치고 업데이트해야 하는 부분이 늘 발생하는데 이걸 역으로 잘 이용하면 내 성장에도 꽤 큰 도움이 된다는 거죠.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긴 호흡의 업무는 진행하는 도중에 트렌드가 바뀌고 상황이 급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럼 멀쩡하던 것들도 눈물을 머금고 갈아엎어야 하는 순간과 마주하게 되죠. 


09 . 

이런 상황이 스트레스일 수도 있겠으나 이 업데이트의 과정을 잘 아카이빙 해두면 그 자체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레슨 런(lesson learned)들이 정말 많습니다. 여기에 더해 이 자체가 하나의 큰 스토리텔링이기 때문에 나중에 내 포트폴리오로 활용할 때도 중요한 변곡점마다 그 위기를 어떻게 관리하고 대응했는지 더 실감 나게 설명할 수 있죠. 

뭐 당연히 의도적으로 이런 상황을 설계할 필요는 없겠지만 혹여나 우리에게 이런 순간이 찾아온다고 해도 원망이나 당황보다는 그 포인트에 감사해야 할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10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짧은 호흡과 긴 호흡은 서로의 장단이 존재하는 영역입니다. 다만 긴 호흡의 업무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거나 시작하기도 전에 겁을 먹고 회피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임은 부정할 수 없겠으나 하나를 제대로 완성하고 나면 그 뒤에 따라오는 성취감과 성장 동력은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여러분도 언젠가 긴 프로젝트에 합류해야 하는 시점이 온다면 스스로를 이렇게 다독여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건 프로젝트 자체도 성장하고, 나 자신도 성장할 수 있는 기회다'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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