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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May 11. 2017

늦은 봄, 이른 여름, 고베 맑음

봄기운이라기 보다 초여름의 느낌에 가까운 오사카는 평소보다 더 북적였다. 

쇼핑 구역이고 관광명소고 가릴 것 없이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래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선택한 것이 고베였다. 오사카에서 전철로 40분 남짓, 하루에 둘러보기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도시. 밤에는 시원하고 낮에는 조금 덥다 싶을 늦은 봄(혹은 이른 여름)의 어느 날 고베를 찾았다. 




#. 커피의 도시


이른 아침 고베에서 맞이한 건 공교롭게도 커피였다. 

기타노이진칸에 위치한 스타벅스도 명물이라고 소문이 자자했지만 그보다 고베를 중심으로 그 명성을 넓혀가고 있다는 니시무라 커피가 궁금했다. 기타노 거리를 오르기 전 큰 사거리에 위치한 니시무라 커피 나카야마테 본점을 찾았다. 


수 많은 사람들이 열고 닫았을 거무튀튀한 문을 들어서면 고풍스러운 실내가 펼쳐진다. 오전 시간에도 사람은 빼곡하고 커피와는 어울리지 않는 메이드 복장을 한 여종업원들이 주문을 받는다. 정확히 말하면 스타벅스의 파트너 보다는 Pub의 바텐더와 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입구에 가까워지면 문 밖으로 스며나온 커피향이 그대로 전해진다. 



강한 향의 커피를 주문한 탓이기도 했지만 실제 눈 앞의 커피잔에서 꽤 진한 향기가 올라왔다. 내게 배정된(?) 종업원이 열심히 커피를 설명해주었는데 (꽤나 영어를 잘했다) 향은 강하지만 쓴 맛이 세지는 않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직접 마셔보니 정말 산미가 강한 커피다. 한국에서 흔히 마시는 핸드드립의 경쾌한 맛은 아니지만 무거운 바디감이 꽤 매력적인 맛이다. 클래식한 커피잔과 나무결이 그대로 드러나는 테이블도 멋스럽다. 


기타노 거리 중간에 정원처럼 꾸며진 니시무라 커피점이 하나 더 있고 길을 조금 더 오르면 동화같은 외관과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스타벅스도 있지만 기회가 된다면 나카야마테 본점을 찾는 게 좋다. 유리창 너머로 하루 종일 커피 기계 앞에서 로스팅을 하는 장인 할아버지를 구경하는 것도 재미다.  



테이크 아웃 잔에 익숙한 우리 세대에겐 불편하고 낯설다. 하지만 여행지니까 이쯤이야.



계산을 하려하자 종업원이 나에게 고베가 처음이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자 들뜬 표정으로 얘기한다.


'고베는 동양의 샌프란시스코에요. 높은 언덕, 멋진 항구, 다양한 문화가 있죠. 시내에는 높은 빌딩과 상점이 있지만 조금 벗어나면 아주 조용한 마을이 있어요. 고베는 그런 곳이에요.' 


그렇다. 나는 지금 동양의 샌프란시스코에 와 있다. 




#. 고베는 모든 골목이 예쁘다.


고베를 온 사람은 무조건 찾는다는 기타노이진칸으로 향했다. 커피 가게 종업원의 말을 듣고나니 왠지 샌프란시스코의 롬바드 언덕과 조금 닮은 것도 같다. 규모는 작고 훨씬 조용하지만 군데군데 이쁜 상점도 많다. 메인 거리를 오르며 양 옆에 위치한 골목을 조금씩 기웃거리다 보면 힘들지 않게 외국인 거리에 다다른다. 


영국관, 프랑스관 등 각국의 문화로 꾸며놓은 집들이 많지만 꼭 다 볼 필요는 없다 싶다. 

규모에 비해 입장료가 은근 비싸것도 이유였지만 깨끗하고 전망 좋은 거리에 머무는 게 훨 이득인 느낌이다. 그리고 고베의 하늘은 정말 맑다. 항구와 가까워 바람은 제법 부는 편이지만 여행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딴 얘기지만 미세먼지와 황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기타노이진칸 역시 관광객이 많다. 하지만 요란하거나 복잡하지는 않다.



거리 곳곳에 지도가 서 있기는 하지만 사실 굳이 안내를 따라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길이 워낙 정직하게(?) 나뉘어져 있는데다 어느 길로 가더라도 위를 향해 오르다보면 거의 한 곳에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인 관광객들에게는 거리 맨 꼭대기에 위치한 녹색 페인트로 칠해진 이른바 '연두색 집'과 그 옆에 위치한 '풍향계의 집'이 유명하다. 딱히 볼거리가 있다기보다는 랜드마크의 의미가 더 강하다. 


오히려 근처의 조그만 광장에서 펼쳐지는 이벤트들이 더 흥미롭다. 어느날엔 마술쇼가 벌어지기도 하고 곡예사가 공연을 펼치기도 한다. 운이 좋은 날이면 아마추어 극인들의 즉석 연극도 볼 수 있단다. 광장이라 해도 요란스럽지 않아서 주위를 구경하는데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다. 기타노이진칸은 그런 곳이다. 그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고 곳곳에 숨은 소소한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 아마 이 곳에 처음 정착했던 외국인들도 그런 삶을 익히며 지냈는지도 모른다.    



풍항계의 집은 북편 언덕에서 고베 시내와 함께 살짝 내려다 보는 뷰가 가장 아름답다. 




#. 그래도 고베는 항구다.


샌프란시스코는 항구 도시다. 고베도 그렇다. 

하지만 Pier39와 같은 다채로운 볼거리와 문화가 섞여있는 곳이라기 보다는 실용적이고 간결한 모습이다. 기타노이진칸에서 포트타워가 위치한 하버랜드까지 걸어내려오는 길은 조금 멀다. 그래도 중간중간 차이나 타운이나 다이마루 백화점을 들릴 수 있어 쉬어가는 겸 포인트를 찍고 오면 그리 힘들지는 않다. 


개인적으로는 점심을 먹고 오후 즈음해서 하버랜드 근처로 가는 것을 추천한다. 도착해서 바다와 맞닿은 넓은 광장에서 여유를 즐기다 항구 맨 끝에 위치한 모자이크 쇼핑몰을 둘러보다 보면 슬슬 일몰을 구경할 수 있는 시간대가 되기 때문이다.  



고베항은 정직하고 반듯한 모양이다. 항구 특유의 생동감 보다 여유와 낭만의 크기가 더 크다.



하버랜드의 넓은 광장에서 바다를 보고 있으면 딱히 뭘 하지 않아도 즐겁다. 관광객이 많아도 장소가 워낙 넓어서 붐빈다는 느낌은 거의 없다. 낮은 낮대로 밤은 밤대로 이쁜 곳이란 말이 딱 맞다. 

여행 책자나 블로그를 보다보면 포트타워 전망대는 해가 진 후 야경을 보라고 권하는 경우가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석양을 보는 게 제일이라 생각한다. 5월 즈음이면 저녁 6시 정도에 모자이크 쇼핑몰을 나와 10분 정도 걸어 포트타워에 도착하면 붐비지 않는다. 일찌감치 전망대에 올라 명당 자리를 잡고 있으면 서서히 붉어 오는 고베 시내를 한 눈에 즐기기에 제격이다. 



전망대에서 모자이크 쇼핑몰 방향을 쳐다보면 그림같은 석양을 감상할 수 있다.



다시 오사카로 돌아와야 한다면 최소한 8시 이전에는 전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샌프란시스코가 좋았던 이유는 생활지역을 중심으로 한 관광지였기 때문이다. 문화가 다양하고 여러 사람이 섞여있는 모습도 한 몫했다. 그런 점에서 고베는 다시 한 번 동양의 샌프란시스코가 맞다. 시내 한 가운데 있으면 넥타이 차림에 점심을 먹으러 나온 금융권 회사원들을 쉽게 볼 수 있지만 거기서 조금만 내려오면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푸른 눈의 관광객들과 마주한다. 

관광객 틈에서 목 조이지 않아서 좋고, 나만 홀로 이방인인 듯한 느낌을 받지 않아서 좋은 곳이 고베다. 


누군가 그랬다. 고베는 여행을 하다보면 한 번 살아보고 싶은 곳이라고. 

아니 굳이 그러지 않아도 혼자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고베로 떠나라. 

커피, 맑은 하늘, 쇼핑 거리, 바다 그리고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도시 생활. 

2017년의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 있다. 


여기. 5월. 고베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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