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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Oct 17. 2020

생각의 '조각 모음'

사람의 머리도 하드디스크처럼 조각 모음이 필요합니다. 

#기획자의 독서법

기획 일을 하는 모든 분들을 위한 '책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기획자라고 했지만 마케팅, 브랜딩, 광고, 컨텐츠, 상품,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 만들고 - 내놓는 일을 하는 분들을 위해 글을 씁니다. 





컴퓨터를 사용하다 보면 어느 순간 점점 느려지고 성능이 저하되는 때가 옵니다. 파일을 읽어들일 때도 버벅대고 데이터를 저장하는 속도도 느려지죠.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대표적인 이유는 하드디스크의 파일들이 여러 개로 조각 났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파일이 깨진 것은 아니고 순서대로 잘 정리되어 있어야 할 데이터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이렇게 되면 일부 파일들은 지워진 채로 존재하게 되고 저장 공간 역시 중간중간 공백이 생기게 되죠. 


컴퓨터의 연산 장치는 사람의 뇌를 본떠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머릿속에서도 가끔 ‘생각들이 조각나는’ 경우가 생깁니다. 아마 기획자로 일하는 분들이라면 출근부터 퇴근까지 적게는 수십 통에서 많게는 수백 통의 메일을 읽거나 쓰실 겁니다. 각종 어젠다들이 난무하는 회의와 보고도 이어지죠. 수정에 수정을 거치며 원래 의도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기획서는 또 어떡할 건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업계 동향 파악과 케이스스터디, 고객(혹은 사용자) 반응 수집에 내부 의견 조율까지. 이쯤 되면 우리 머릿속 하드디스크가 ‘뻑이 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거겠죠. 


그럴 땐 우리에게도 컴퓨터처럼 ‘조각 모음’ 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 과정을 ‘생각의 조각 모음’이라고 부릅니다.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던 정보와 아이디어를 정리해서 제 자리에 가져다 놓고, 더 고민이 필요한 생각들은 따로 꺼내어 잘 보이는 곳에 배치하는 것이죠. 그리고 저는 이 작업들을 책을 읽으며 진행하곤 합니다.

언젠가부터 책을 읽을 때 연습장이나 노트북을 곁에 두고 읽는 경우가 많습니다. 책 속에서 발견한 좋은 문장을 기록해두기 위한 것도 있지만 도중에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큽니다. 그러다 보니 책을 진득하게 읽기보다는 중간중간 열심히 쓰고 타이핑하며 요란하게 읽는 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책을 읽다 보면 참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서 한편으로 묵혀놨던 문제들이 책 속의 어느 대목과 만나며 불현듯 튀어나오는 것이죠. 

‘어!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것과 본질적으로는 똑같구나.’ ‘아! 그 문제를 이렇게 접근해볼 수도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면 주저 없이 바로 메모해 둡니다. 일단 조각난 파편들을 하나둘씩 주워모으는 것이죠. 

그러고 나서 메모된 내용들을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저는 이럴 때 ‘에버노트’나 ‘노션’ 같은 메모 프로그램들을 자주 이용하는 편입니다. 책을 읽으며 수집한 문장이나 떠오른 생각들을 빠르고 간편하게 기록할 수 있거든요. 필요하면 직접 손으로 쓴 글이나 그림들을 사진으로 찍어서 그대로 붙여 넣을 때도 있습니다. 가벼운 책 한 권을 읽어도 꽤 쏠쏠한 양의 조각들이 모아집니다.



우리네들의 하루. 머리가 '뻑이 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며 책을 읽어야 하나 싶으신가요? 그런데 책을 읽는 순간에도 우리의 생각들은 무수히 조각나고 있습니다. 집중해서 책 한 권을 다 읽었다고 생각해도 실제 우리의 머릿속에 남는 것은 대강의 이야기거나 책 전체의 분위기 정도입니다. 게다가 그마저도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조각난 파일처럼 이리저리 흩어져 쉽게 찾을 수 없게 되죠. 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읽은 책이 그렇게 휘발되어 버린다면 좀 아깝지 않나요? 게다가 책에서 발견한 좋은 소스들을 조금만 공들여 정리해 놓으면 내가 직면한 문제를 푸는데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4년 전 쯤 컨텐츠 기획일을 담당할 때였습니다. 당시 맡고 있던 서비스를 한 단계 성장시키기 위해 꽤나 큰 마케팅 프로젝트를 기획할 일이 있었습니다. 대규모 예산이 들어가는 일이었고 관련된 부서와 이해관계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좀처럼 방향이 모아지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어떤 컨셉으로 밀고 나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지고 있던 상황이었죠. 셀 수 없이 많은 회의를 하고 정말 많은 사례 조사를 했지만 뭔가 ‘한 방’이 없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찝찝한 마음으로 맞이한 주말. 기분 전환 겸 책 한 권을 집어 들었습니다. ‘야구 병법’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원래 스포츠를 좋아하는 데다 야구만큼 지략 대결이 첨예한 종목도 없다고 생각해 야구 관련 서적을 종종 읽는 편입니다. 


그런데 책에서 나온 대목 하나가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자타 공인 명장이라 평가받는 한 감독이 자신의 야구 철학을 풀어놓는 내용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이기려는 마음으로 경기를 구상하면 십중팔구 계획이 틀어진다. 그보다 어떻게 하면 타자가 1루까지 살아나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라. 그러면 그다음이 보인다.’

갑자기 조각나 있던 생각들이 여기저기 모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왜 꼭 한 방을 노려야 할까? 예산이 큰 프로젝트라서? 투입되는 인원이 많아서? 이해관계자들의 기대가 커서?’ 생각의 관점을 바꾸고 나니 놓치고 있었던 부분들을 하나씩 새로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제 자리에 놓이지 않은 생각과 아이디어들 사이에서 홀로 힘겹게 일하던 제 머릿속 하드디스크와 마주한 것이죠.  


그리고 돌아오는 월요일 회의에서 저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시리즈물로 잘게 쪼개자고 제안했습니다.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소개하며 우선 1루까지 간 후에 다음 작전을 짜자고 한 거죠. 그러자 해당 프로젝트를 이끌던 리더님께서 맞장구를 치셨습니다. 

‘하긴. 제일 멍청한 게 만루 기회에서 득점 못하는 거 아니겠냐. 우선은 출루부터 하고 보는 거지.’

그 후 저희는 각각의 프로젝트를 시리즈로 기획하며 단계적으로 완성도를 높이기로 했습니다. 큰 한 방을 노릴 때보다 다들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었고 회를 거듭해가며 미흡했던 부분들도 보완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는 꽤 성공적이었고 무엇보다 기회가 한 번뿐이라고 생각해 서로 스트레스를 주고받던 동료들 사이의 부담도 크게 줄었습니다. 


제가 책 속에서 길을 찾은 것이었을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 그때 그런 업무와 마주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넘어갈 수도 있었던 대목이었겠죠. 그보다는 책을 통해 제 머릿속에 조각나 있던 생각과 아이디어들을 한 데 모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필요한 고민을 덜어내고, 서로 끊어져 있던 생각들을 연결한 다음,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준 것이죠. 


저는 책의 힘이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물론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생각을 정리해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책이 주는 힘은 밀도가 확실히 다릅니다. 활자를 따라가며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장면들이 어느 순간 제 기억 저 편의 다른 조각들을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연결된 생각들은 기대 이상의 화학반응을 하며 더 좋은 생각으로 바뀌어갑니다.  

혹시 여러분 앞에 복잡한 일거리가 놓여있다면 오늘은 맘에 드는 책 한 권을 골라 천천히 읽어내려가보시는 건 어떨까요? 아마 나도 모르게 단편화된 기억의 조각들이 알아서 제 짝을 찾아갈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여담 (餘談)
개발자 동료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돌아온 대답이 당황스러웠습니다. 
‘어? 근데 하드디스크 말고 SSD(반도체로 데이터를 저장하는 정치)에서는 디스크 조각 모음 안 해도 되는데요? 물리적으로 움직이는 부품이 없어서 속도 저하가 거의 없거든요!’  
이럴 때마다 내가  IT기업에서 일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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