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 속에서 무엇인가에 그렇게 집중해볼 수 있는 공간이 어디 흔할까요
#기획자의 독서법
기획 일을 하는 모든 분들을 위한 '책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기획자라고 했지만 마케팅, 브랜딩, 광고, 컨텐츠, 상품,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 만들고 - 내놓는 일을 하는 분들을 위해 글을 씁니다.
저는 서점에 가는 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오래 살던 동네를 떠나 새로 이사를 왔을 때도 아주 가까운 곳에 대형 서점이 있다는 걸 알고 크게 기뻐했던 기억이 납니다. 주말에는 꼭 한 두 번씩은 들르는 편이고 평일에도 퇴근 후에 잠깐씩 방문하곤 합니다. 딱히 책을 사지 않을 때도 그냥 구경 삼아 기웃거리고 커피 한 잔을 마시러 갈 때도 이왕이면 서점 안에 자리한 카페를 더 자주 찾는 편입니다.
제가 서점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 구경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서점에서 책은 안 보고 웬 사람 구경이냐 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서점만큼 시장 조사에 완벽한 곳도 드뭅니다. 물론 사람 구경은 거리에서도, 지하철에서도 또 백화점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하철에서 이어폰을 끼고 있는 사람이 어떤 음악을 듣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영화관에서는 모두가 같은 영화를 봐야 하는 데다 내부가 어두워서 관객들의 반응을 파악하기가 힘들죠. 음식점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이 둘, 셋 이상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기 때문에 가게 주인도 음식 맛이 어땠는지 직접 물어봐야만 고객 반응을 체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점만큼은 좀 특별합니다. 모두가 각자 원하는 책을 한 권씩 골라 보고 있으니 그 사람이 어떤 분야의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이면 책을 읽는 사람이 푹 빠져서 집중하고 있는지, 방금 보던 것과 유사한 책을 다시 집는지, 함께 온 친구와 책에 관해 뭐라고 얘기하는지도 살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점만큼 오랜 시간을 자세하게 그것도 개개인별로 사람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은 없을 겁니다.
회사에서 회의를 하다 보면 심심찮게 등장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바로 ‘요즘 사람들은 뭐에 관심이 있지?’라는 질문입니다. 회의에 참석한 본인들도 ‘요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면서 정작 우리가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사는지 쉽게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현대인의 슬픈 단면이기도 하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사람들을 서점에 데려다 놓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딱히 마음에 정해둔 책이 없는 상태에서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금방 특정 코너 앞에 발길을 멈추고 이내 책 한 권을 골라 훑어보기 시작합니다. 자신도 모르고 있던 ‘스스로의 관심사’를 조금씩 좁혀가는 것이죠. 아니면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뭔가 본인을 끌어당기는 책을 본능적으로 발견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저는 서점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동선을 정말 유심히 보는 편입니다. 신간 도서나 베스트셀러 위주로 구경하는 사람부터, 들어오자마자 익숙한 발걸음으로 특정 코너로 달려가는 사람, 도서 검색용 PC와 진열대를 열심히 오가며 원하는 책을 찾는 집요하게 찾는 사람까지. 구경하는 재미가 정말 쏠쏠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재미있는 경우는 커플이 함께 서점에 왔을 때입니다. 아마 하루 종일 데이트하며 한 시도 떨어지지 않았을 두 사람이 서점에만 들어오면 암묵적 합의(?)를 한 듯 각자의 책을 찾아 떠납니다. 그렇게 한동안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며 유랑하다 이내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찾아와서 무슨 책을 보고 있는지 궁금해합니다. 세상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아는 두 사람도 각자가 어떤 책을 손에 들고 있을지는 쉬이 가늠이 안되기 때문이죠.
제가 서점을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의외성’입니다. 낯선 타인을 만나면 우리는 외부 요인으로 상대방을 파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에 관한 정보가 지극히 외적인 것들로 제한되기 때문이죠. 무슨 옷을 입었는지, 풍기는 분위기가 어떤지, 어떤 물건을 들고 다니는지 정도가 전부일 것입니다. 그런데 서점에서만큼은 조금 다릅니다. 타인이 들고 있는 책을 통해서 그 사람의 관심사와 취향을 유추해 볼 수 있거든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손에 든 책 사이에 놀라운 의외성들이 나타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한 번은 나이가 지긋하신 노신사 분께서 <만화로 보는 재즈의 역사>라는 책을 매우 집중해서 읽고 계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가수 이름인지 곡의 제목인지는 모르겠으나 무엇인가를 입으로 반복하고 손가락으로 써보기도 했습니다. 어떤 대목에서는 어린아이같이 피식피식 웃으시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시더군요. 그럴 때는 갖은 상상력이 동원되곤 합니다. ‘왕년에 재즈 아티스트의 꿈을 꿨던 분이 아닐까? 아니면 배철수 아저씨 못지 않게 음악에 정통한 분일 수도 있겠다.’ 길에서 만났더라면 그냥 인상 좋은 이웃집 어르신 정도로 여겼을 낯선 사람을 저도 모르게 관찰하고 궁금해하는 것이죠.
반대로 지금 당장 힙합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해도 어색하지 않을 자유로운 복장의 청년이 미간을 움켜쥐어가며 부동산 서적을 읽는 장면도 봅니다. 또 수능 문제집을 몇 권 집어든 교복 차림의 학생이 여행 서적으로 가득한 진열대 앞에서 한참을 서있는 모습과도 마주하죠.
그때마다 저는 머리가 말랑말랑해지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들이 한꺼풀씩 벗겨지는 것이죠. 기획 일을 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지름길을 찾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기관에서 발표한 데이터나 신문 기사에 소개된 사례들 몇 가지를 훑어본 뒤 ‘대충 이런 흐름이겠구나’하고 단정해버리는 것이죠. 저도 그런 실수를 참 많이 했습니다. 아마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 중에도 뜨끔하시는 분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서점이란 공간에서 마주하는 ‘기분 좋은 의외성’들은 저를 하얀 도화지로 만들어주곤 합니다. 무엇인가를 기획할 때 선입견을 가지고 있거나 이미 스스로 답을 내린 채 시작하면 좋은 가능성들을 다 놓친 채 시작하는 셈이잖아요? 그러니 나를 비우고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워밍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워밍업을 서점이란 공간해서 해보는 걸 적극 추천합니다.
마지막으로 서점이 주는 공간감을 느끼는 것도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점을 자주 가다 보면 분명 며칠 전에 왔을 때와 진열대의 위치나 각 코너의 배치가 조금씩 달라졌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처음엔 당연히 매출을 위한 세일즈 기법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보다 훨씬 복잡한 배경이 숨어있더군요. 계절과 날씨는 물론이고 뉴스에 오르내리는 이슈와 올해의 컬러 같은 요소까지 고려해 배치를 수정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작업을 담당하는 분 중에는 심리학을 전공한 분들도 많다고 들었어요.
독립서점에서는 이런 경험을 더 진하게 해볼 수 있습니다. 요즘엔 골목 사이사이에 작은 독립서점들이 자리한 경우가 많은데요, 대부분 서점 주인이 자신만의 주관을 가지고 책을 모아놓은 공간이라 그 정체성이 뚜렷합니다. 어떤 곳은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는 직장인들을 위한 책을 다루는 곳도 있고 또 어떤 곳은 일러스트나 가벼운 손그림을 위주로 한 책들이 가득한 공간도 있습니다. 맥주 한 잔을 걸치며 술과 책에 함께 취할 수 있는 서점이나 모든 책에 주인의 추천사가 붙어있는 서점도 있습니다. 이런 곳을 방문했을 때는 공간 전체가 하나의 잘 구성된 브랜드와도 같이 느껴집니다. 마치 그 책을 그 공간에서 만났기 때문에 더 특별해지는 경험도 할 수 있죠.
그러니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서점에 자주 가보시길 권합니다. 책만 고르고 오는 것이 아닌 사람도 구경하고 공간도 느껴보는 거죠. 그렇게 나를 조금씩 비워내고 기분 좋은 경험들로 머리를 말랑말랑하게 만들어보세요. 분명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의 틈을 열 수 있을 거예요.
여담 (餘談)
서점에서는 그냥 바닥에 털썩 앉아 한참이나 책을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무엇인가에 그렇게 집중해볼 수 있는 공간이 어디 흔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