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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May 19. 2020

내가 컨버스를 사랑하는 이유

누군가 그랬다. 컨버스는 '젊음'과 '자유'의 상징이라고.

내가 지금껏 살아오며 구매한 컨버스를 모두 합치면 아마 30족은 되지 싶다. 학창 시절에도 늘 컨버스를 신었고 대학교에 가서도 일주일에 절반 이상은 컨버스를 즐겨 신었다. 다행히 복장에 규제가 없는 IT 회사에 입사한 덕분에 내 컨버스 사랑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지금도 며칠 간의 여행을 떠나게 될 때는 무조건 컨버스 하나 정도는 여분으로 캐리어에 넣어간다. 패브릭 소재라 공간도 많이 차지하지 않는데다 심하게 구겨져도 언제든 원상복구가 가능하니까.


그렇다고 컨버스 매니아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다. 종류와 색깔별로 스니커즈를 수집하는 멋진 취미도 없다. 심지어 신발은 소모품이라는 생각에 여지껏 비싼 신발을 사본 적이 거의 없을 정도다. 오래 신던 구두가 낡을대로 낡아 작년에 40만원을 주고 사본 구두가 내 평생 가장 고가의 신발이다. 그 외에는 운동할 때 신는 런닝화 정도가 나름(?) 비싼 축에 속한다. (물론 그것도 10만원 남짓이지만).

내가 지금껏 구매한 30족 가까운 컨버스 중 20족은 언제나 똑같은 제품이었다. 검정색 척테일러 하이. 매해 조금씩 업그레이드 된 버전들이 나오며 소재나 디테일이 아주 미묘하게 변하긴 하지만 본질은 언제나 똑같은 녀석이다. 컨버스 특성 상 뒷굽이 빨리 닳고 발볼 옆 부분의 옷감 소재가 잘 뜯어지기 때문에 오래 신을 수는 없다. 그래서 소모품처럼 닳으면 다시 사고, 더러워지면 또 다시 사고를 반복해왔다. 예전보다 가격이 좀 오르긴 했지만 여전히 7-8만원 정도면 언제든 쉽게 구할 수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보다 완벽한 신발이 없다.



내가 대학에 들어갈 무렵  <아이로봇>이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당시로서는 먼 미래인 2035년이 배경이었는데 인공지능화된 로봇들이 인간보다 뛰어난 두뇌를 가지기 시작한다는 다소 뻔한 클리셰의 SF영화였다. 영화의 재미와는 상관없이 여기엔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등장하는데 바로 주인공인 윌스미스가 30년 후의 미래에도 컨버스를 즐겨신는다는 사실이다.


새로 배송된 가죽 컨버스 제품을 신고 나서자 같이 사는 할머니 조차 요즘 시대에 누가 그런 운동화를 신느냐는듯 쳐다본다. 하지만 "무려 컨버스 올스타 2004 빈티지라구요!"를 외치는 주인공 델(윌 스미스)은 자랑을 넘어 뿌듯해하는 표정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제품은 몇 해전 아이로봇 기념 에디션 가죽 제품으로 발매되기도 했다.  



영화 '아이로봇 (2004)'의 한 장면


영화 '아이로봇'을 모티브로 제작된 기념 에디션



당시의 기억이 꽤 강했는지 컨버스는 그 자체로 내 머리 속에 각인되었다. '수십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멋진 운동화. SF 영화 속 주인공이 신어도 시대적 이질감이 없는 아이콘.' 이미 컨버스를 하나 가지고 있던 시절이었지만 왠지 더 사랑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리에 나가면 5초마다 보이는 신발이지만 왜 그런 마음 있지 않은가. '그래.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어!'


그런데 기대 이상으로 이 녀석의 가치는 쏠쏠했다.

무엇보다 어떤 룩에도 편하게 신을 수 있다는 장점이 가장 크다. 외부에 중요한 미팅을 갈 때도 셔츠나 자켓 정도로만 예의를 갖추면 컨버스를 신은 것으로 나무라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청바지부터 치노팬츠, 홈웨어, 가벼운 산책룩에도 두루 착용할 수 있으니 신발 한 켤레로 여러 스타일에 활용이 가능하다.


나는 컨버스 하이 제품의 끈 묶는 행위 또한 좋아한다. 사실 발목이 낮은 로우 버전에 비해 하이 제품은 매번 신발끈을 묶었다 풀었다를 반복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주위 사람들은 그 귀찮은 일을 어떻게 매번하냐고 묻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신발끈을 묶는 느낌이 좋았다. 아침마다 타이트하게 묶여진 신발끈 아래로 패브릭 소재의 질감이 밀착되는 게 유난히 매력적이다. 수트를 입고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타이를 정갈하고 예쁘게 매는 것이 하나의 의식이라면 내겐 이 컨버스의 신발끈을 조여 묶는게 비슷한 의미로 다가온다.


'아이코닉한 이미지' 또한 가끔 장점을 발휘한다. 컨버스는 흔히 '젊음'과 '자유'의 상징으로 분류되곤 하는데 이는 상대방에게 약간의 편안함과 활동성을 느끼도록 도와준다. 나만 하더라도 누군가가 싱글 수트 아래 컨버스를 신은 모습을 보거나 다소 어두운 룩에 과감한 원색의 컨버스를 매치한 것을 보면 괜히 긴장이 풀어지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성공한 젊은 사업가인가? 아니면 IT업계의 구루같은 존재는 아닐까?', '저 신사분은 연세가 있어보이는 데 컨버스를 신으셨네. 뭔가 힙해 보이는군.' 하는 식의 상상이 꼬리를 물 때도 많다. 누군가 매번 나를 그렇게 봐주길 기대하고 신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나도 그 '젊음'과 '자유'에 올라탄 것 같은 느낌은 지울 수 없다. 그러니 컨버스는 내게 신발이자 일종의 '메시지'이기도 한 것이다.



인기 미드 '슈츠'의 주인공 마이크(패트릭 J. 아담스) 또한 클래식 한 차림에 컨버스를 자주 신는다.


이런 나에게 회사 동료들은 가끔 컨버스 패밀리 세일 링크를 보내주거나 새로운 에디션 발매 소식을 전해주기도 한다. 컨버스를 보면 내가 떠오른다는 사람도 있고 죽기 전가지 몇 켤레의 컨버스를 살 것 같으냐는 질문을 하는 이도 있다. 주위 사람들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아봐 주고 그 자체로 나를 기억해준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그리고 그 요소가 내가 사랑하는 '컨버스'라는 것 또한 퍽 마음에 든다.


나는 사실 오랫동안 '컨버스(converse)'가 사전적 의미 그대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다'라는 뜻을 지녔거나 패브릭 소재인 '캔버스(canvas)'에서 따 온 것인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마퀴스 밀 컨버스(Marquis Mills Converse, 1861~1931)'라는 사람이 만든 '컨버스 고무 신발 회사'에서 시작된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계단에서 굴러 크게 다칠 뻔한 일이 있었는데 그 후 미끄러지지 않는 신발창을 고안하다 컨버스의 기초가 되는 신발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히스토리를 알고나서 조금 뻘쭘해지긴 했지만 아무렴 어떨까. 내가 사랑하는 신발에 내가 의미를 부여하고 만족하면 그만인 것을. 나에게 컨버스는 다른 사람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상상하도록 만드는 '대화(converse)'의 일종이기도 하고 어떤 룩도 과하지 않게 다 받아주는 '캔버스(canvas)'이기도 하니 말이다. 아마 내 발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는 이 녀석과 함께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난 오늘도 발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든든하게 날 맞이하는 컨버스 하이에 끈을 묶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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