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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Nov 02. 2020

더 이상 책에 밑줄을 긋지 않게 되었다.

내가 책을 깨끗하게 보기 시작한 이유.  

#기획자의 독서법 

기획 일을 하는 모든 분들을 위한 '책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기획자라고 했지만 마케팅, 브랜딩, 광고, 컨텐츠, 상품,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 만들고 - 내놓는 일을 하는 분들을 위해 글을 씁니다. 





책에 정통한 전문가들의 조언 중에 자주 언급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책을 막(?) 다루라는 것이죠. 언제든 읽기 쉽도록 책을 곁에 두면서 밑줄도 긋고 메모도 하며 적극적으로 읽으라고 말합니다. 

저도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책을 읽을 때는 항상 연필을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중요하다 생각되는 단어에 동그라미를 치고 기억하고 싶은 문장에는 밑줄을 그었습니다.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에는 물음표를 달아놓기도 하고 개인적인 생각이 떠오르면 책에 가볍게 메모 해두는 편이었습니다. 그렇게 읽고나면 마치 시험 공부를 한 것 같은 느낌에 괜히 뿌듯하기까지 했죠. 


그런데 언젠가부터 조금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깨끗하게 보기 시작한 것이죠. '책을 깨끗하게' 본다? 감이 잘 안오시나요? 혹자는 그런 제게 책을 너무 대충 읽는 것 아니냐고 핀잔을 주기도 합니다. 깨끗하게 본 책은 머릿 속에서 깨끗하게 지워지는 법이라며 조금 더 따끔한 충고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책을 깨끗하게 보는 이유는 '더 잘 기억하고 더 깊게 생각하고 싶어서'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가장 많이 반복해 읽은 책이 무엇인가요? 아마 누군가에게는 교과서나 전공서적일 수도 있고 다른 누구가에게는 성경책일 수도 있겠죠. 저는 '드래곤볼'입니다. 만화책이죠. 만화 분야는 고수가 워낙 많아서 함부로 명함을 내밀면 안되지만 드래곤볼 만큼은 저도 꽤 깊은 애정이 있는 편입니다. 정확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42권짜리 전집을 어림잡아 100번 정도 반복해서 본 것 같습니다. 한 권 당 30분을 잡아도 전권을 읽는데는 하루 가까이 걸리는 시간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제 인생의 100일은 드래곤볼에 바쳤다고 봐야하는 셈이죠. 이쯤되니 대사를 외우는 것은 물론이고 대충 눈대중으로 펼쳐도 원하는 장면을 찾아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이 만화는 봐도봐도 새롭게 다가오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자세히 못봤던 배경들이 눈에 띄기도 하고 이전에 읽었던 대사가 전혀 다른 늬앙스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제 기억 속에 왜곡되어 저장된 부분들도 상당합니다. 하마터면 이 걸작의 명장면을 잘못 이해하고 넘어갈 뻔 했다고 생각하면 아찔하기까지 합니다. 


그림으로 가득한 만화도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글로만 된 책은 어떨까요? 

꽤 재미있게 읽었다고 생각되는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보세요. 단 번에 아실 겁니다.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구절이 한두군데가 아니 거든요. 그리고 더 흥미로운 것은 간혹 엉뚱한 부분들에 무작위로 밑줄을 쳐놓은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읽는 데 집중하려고 그랬던 건지 그 순간 어떤 문장이 눈에 띄어서 그랬던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그것 또한 내가 책을 읽는 과정 중 하나였기 때문에 소중한 기록과 흔적으로 남겨둘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른 방법을 써보기로 했습니다. 책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이죠. 이렇게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입니다. 


첫 번째는 책의 중요한 대목이나 수집하고 싶은 문장을 컴퓨터에 저장하는 습관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책을 읽을 때 주로 노트북이나 타블렛 PC를 곁에 두고 읽습니다. (물론 소설책을 읽을 때는 예외입니다.) 마음에 드는 구절이나 단어가 나오면 책을 옆에 끼고서 열심히 타이핑을 해 옮겨 놓습니다. 읽다가 좋은 아이디어나 나름의 생각이 떠오르면 역시 컴퓨터에 저장해놓습니다. 

귀찮지 않냐구요? 네 귀찮습니다. 책 한 권 읽는데 시간도 꽤 듭니다. 그 뿐인가요. 비행기 같이 좁은 공간에서 노트북과 책을 같이 펴놓고 있을 때면 '꼭 돈 많이 벌어서 비즈니스 타야지'라는 생각이 절로 납니다. 하지만 그 귀찮고 더딘 일을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해두면 언제 어디서든 나만의 방식으로 정리된 책 한권을 다시 꺼내볼 수 있기 때문이죠. 요즘은 검색 기능도 잘 되어 있으니 필요할 때는 키워드 하나로 여러 책에서 좋은 소스들을 발췌해낼 수도 있습니다. 노력 대비 꽤 쏠쏠한 수확임에 틀림 없습니다. 


두 번째는 다시 읽을 때의 즐거움 때문입니다. 저는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을 꼭 한 번 다시 읽어 봅니다. 이미 익숙한 책이고 대략의 내용들을 기억하고 있는 터라 친근하게 문장들을 읽어내려 갈 수 있습니다. 처음 읽을 때보다 시간도 덜 걸려서 마음도 가볍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정말 반드시) 새로 눈에 띄는 문장과 단어들이 그물망에 걸리기 마련입니다. 전에와는 다른 늬앙스의 내용도 제법 많이 느껴지죠. 그럴 때는 이전에 정리해둔 컴퓨터 파일에 덧붙여 메모해둡니다. 가끔은 처음 읽을 때 이미 중요하다고 기록해둔 문장을 완전히 까먹은 채 또 메모해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 가차 없이 폰트 크기를 확 키워서 강조해두죠. 저에게 정말 정말 필요한 문장일 테니까요. 


물론 책 읽는데 정답이 어디있을까요. 책에 온갖 낙서를 해놔도 나에게 주는 울림이 크다면 그 보다 더 좋은 독서법은 없겠죠. 하지만 때때로 작은 변화가 의외의 소득을 가져다 주는 법 아니겠습니까. 속는 셈 치고 한 번 실천해보세요. 아래에는 제가 책을 깨끗하게 보기 시작한 이유로 몸에 붙인 작은 습관들을 소개해 놓습니다. 



1. 깎지 않은 새 연필을 사용해보세요.


요즘은 책을 읽을 때 새 연필을 한 자루 준비합니다. 아직 한 번도 깎지 않아 앞 뒤 모양이 비슷한 연필이죠. 흡사 지휘봉 같기도 하고 굵은 젓가락 같기도 합니다. 저는 이 새 연필을 들고 책을 읽어 내려갑니다. (이왕이면 연필의 아이코닉한 이미지를 느끼고 싶어 노란색 연필을 애용합니다. 종이와 대비되는 색깔이라 눈에도 잘 띄고 끝에 달린 지우개를 턱에 괴고서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도 재미납니다.) 집중이 필요할 때는 문장 밑에 연필을 대고 나즈막히 소리를 내어 읽습니다. 중요한 단어가 나오면 책 위에다 커다랗게 그 단어를 써보기도 합니다. 어차피 연필심이 깎여있지 않은 상태니 허공에 그리는 것과 같습니다. 쓸 수 없는 연필이 제겐 오히려 더 쓸모 있는 순간인 셈입니다. 



오늘도 깎지 않은 새 연필과 함께 책을 읽습니다




2. 마음에 드는 문장은 워드나 에버노트에 모아보세요.


귀찮은 일이긴 합니다. 책을 읽으며 주요한 내용을 노트북이나 타블렛 PC에 다시 타이핑 해서 옮기는 일은 분명 인내심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익숙해지면 꽤 효율적으로 책을 정리하고 오래 기억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저는 책에서 발견한 좋은 문장을 적기도 하고 저만의 생각들을 메모하기도 합니다. 정말 마음에 드는 챕터는 책 사진을 통째로 찍어서 이미지 형태로 저장해놓습니다. 

그리고는 필요할때 미리 저장해놓은 키워드로 책 내용을 검색하거나 특정 책에 관한 메모들을 통째로 다시 읽어봅니다. 그럼 그 책을 조금은 더 선명하고 오래 기억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그 때 느꼈던 감정이나 생각들이 같이 메모되어 있다보니 아이디어를 얻는데도 쏠쏠한 도움이 됩니다. 



최근엔 에버노트 대신 '노션'이라는 툴을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해두면 한 눈에 보기 편하고 검색도 쉬어집니다.




3. 인상 깊었던 책은 꼭 다시 읽어보세요.


의외로 드뭅니다.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났더라도 두 번 이상 읽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하긴 바쁜 현대인에게 같은 책을 두 번 읽어보라는 것은 쉽게 권할 수 없는 독서 습관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강력 추천하는 방법입니다. 같은 음악도 여러번 반복해서 듣다보면 들리지 않던 작은 효과음까지 더 자세히 들리기 시작합니다. 케이블 채널에서 수도 없이 반복해주는 유명 영화임에도 볼 때마다 새로운 요소들을 찾을 수 있죠. 여행지는 어떤가요? 제주도를 좋아하는 제 지인은 제주에 100번을 가면 100가지 모습의 제주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경험이 반복되면 보는 눈이 조금 더 넓어집니다. 그 넓어진 시야로 숨어있는 모습들을 새로 발견하고 전에 모르고 지나쳤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슬며시 책장 앞으로 가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책 한권을 꺼내어 읽어보세요. 어제 읽은 책도 오늘 또 다른 법이니까요. 



한 때는 저도 이렇게 책에 열심히 낙서하며 읽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벤다이어그램까지 그려놨는데...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




여담 (餘談)


미생이라는 히트작을 탄생시킨 윤태호 작가의 말입니다.
"반복에 지치지 않는 자가 성공한다. 반복적인 일에서 어떻게 새로움을 찾고 유지해 나가느냐가 핵심이다."
 무의식적으로 책을 들고, 눈으로 글을 따라가다가, 더 이상 넘길 책장이 없으면 '다 읽었다'고 마무리 짓는 것. 이제 그 반복적인 일에서 조금 특별한 새로움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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