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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Feb 29. 2024

꽤 괜찮고 제법 매력적인 '선선한 관계'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80

01 . 

엊그제 친한 친구를 만나 대화를 나누다가 '우리는 왜 친할까?'라는 이야기가 주제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공유하는 상식선이 비슷하다', '비교적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할 줄 안다', '빡침코드(?)가 통한다' 등의 재미난 답변, 공감 가는 답변이 오가며 한참 웃음이 끊이지 않았죠. 그러다 친구 한 명이 이런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우리는 선선한 관계다'라고 말이죠.


02 . 

그 표현이 너무 좋아서 맞장구를 치며 반응했는데 원래는 가수이자 방송인이신 양희인 선생님께서 쓰신 말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서로의 거리를 인정할 때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양희은 선생님의 인간관계 철학을 잘 표현한 단어였는데 되새김을 할수록 참 매력적인 단어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더라고요. 그래서 오랜만에 양희은 선생님의 세바시 강연과 관련한 기사, 사두기만 하고 읽지는 않고 있던 에세이집 등을 꺼내 다시 한번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03 . 

“저는 친한 사람 자주 안 만나요. 그쪽에서 (연락이) 오거나 또는 진짜 내 마음에서 걔 생각이 굉장히 난다고 할 때 그럴 때 연락해요. 친하다고 막 만나고, 맨날 만나서 어쩌고저쩌고하는 게 없으니까 오히려 그게 오래갈 수 있는 비결 아닌가, 싶기도 하고.”

(...)

“난 어떤 면에선 별과 별 사이처럼 바로 붙어 있는 별도 몇억 광년의 시간 차이가 나듯,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그렇게 긴밀하고 밀착된 거보다는 조금 바람이 통하는 관계? 선선한 바람이 지나가는 사이. 그런 게 있으면 좀 더 오래갈 수 있을 거 같아요. 우리 사이엔 이만한 거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관계의 거리를 유지할 때, 좋은 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04 . 

간단히 발췌한 문장만으로도 그 울림이 어마어마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조금 바람이 통하는 관계'라는 단어가 저는 그렇게 좋더라고요. 물론 인간관계라는 것에 올바른 형태가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때로는 '이런 관계도 있다'는 예시 하나를 알고 나면 '내 방식도 틀린 것은 아니구나'라는 위로를 받게 되는 법이잖아요. 그러니 굳이 매일 연락을 주고받지 않아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도, 서로의 존재를 속속들이 파악하지 못해도 꽤 괜찮은 사이로 존재할 수 있는 거죠.


05 . 

대학생 시절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일입니다. 그때만 해도 현장에서 하나둘씩 깨닫게 되는 삶의 이치(?)를 배워가는 재미가 쏠쏠하던 터였는데 어느 날은 매니저님께서 저를 부르더니 '도영아. 현수막에 구멍 내러 가자'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있으니 씨익 웃으시며 가게 근처에 걸린 홍보 현수막 앞으로 저를 데려간 다음 손수 시범을 보이시더군요. 알고 보니 가위로 현수막 군데군데 작은 구멍을 내서 바람이 통하도록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06 . 

"이렇게 안 해두면 맞바람 때문에 현수막이 무게를 못 이기고 떨어져 나가거나 가끔은 기둥이 휘기도 하거든. 그리고 바람이 세게 불때는 현수막 자체가 휘어서 멀리서는 제대로 안 보이기도 하고 말야. 그니까 일부러 구멍이라도 내서 얘도 숨 좀 쉬게 해줘야지. 결국 이게 숨구멍이여 숨구멍."


07 . 

이렇게 또 생활 속 지식이 하나 생겼다는 기쁨에 나이브한 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나는데 참 신기하게도 그날의 장면과 대사가 꽤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인생을 살아오며 조금씩 제 목을 조여오는 것들이 생길 때마다 '아. 지금 현수막에 구멍이 필요한 타이밍인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지 않은 임팩트를 주는 에피소드가 되었죠. 

맞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자니 삶이 너무 버겁고, 그렇다고 당장 눈앞의 현수막을 찢거나 철거할 용기는 또 없을 때 멀리서는 금방 눈치채지 못할 만큼의 작은 구멍을 송송 뚫어놓는 것도 나쁜 방법은 아니니까 말이죠.


08 . 

그리고 머지않아 인간관계에서도 그런 현수막에 뚫린 구멍 같은 틈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무엇보다 상대방이 조금 예민하거나 다운되어 있다고 느낄 때는 '쟤가 요즘 왜 저러지?'라는 생각을 하기에 앞서 '아, 저 사람 지금 구멍 하나 없이 주변의 바람을 홀로 받고 있겠구나' 싶은 생각과 함께 '거창한 솔루션 대신 작은 구멍이라도 낼 줄 수 있는 방법이 뭐 없나?'라며 현실적인 도움을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가장 좋은 건 나도 부담이 없고 상대도 부담을 가지지 않는 방식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섣불리 상대의 상처를 까뒤집는 것보다야 백번 나은 거죠.


09 . 

사회생활에 연차가 쌓이신 분들은 느끼겠지만 직장인이 되면 일 년에 두 번 정도 보는 사이도 굉장히 친한 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일 년에 한 번을 만날까 말까 하는데도 메신저로는 거의 매일 연락을 주고받는 단체방이 만들어지기도 하죠.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저는 그렇기 때문에 더 오래 관계가 유지되는 건 아닐까도 싶습니다. 실제로 매일 보고 이야기를 나눴거나 대부분의 중요한 일을 함께해야 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으면 누구 하나는 못 버텼을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10 . 

그러니 꼭 누군가를 새로 사귀어야겠다, 아니면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단절해야겠다는 목표만 둘 게 아니라 현수막에 작은 구멍 내듯 '조금 바람이 통하는 관계'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요? 그렇게 덥지도 춥지도 않은 선선함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면 굳이 인위적인 온도를 맞추려는 노력도 줄일 수 있을 테니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 선선한 관계의 감도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 많아지길 바라봅니다. 누가 '우리 무슨 사이야?'라고 물었을 때 이렇게 답하면 은근 매력적일 거 같거든요.

'야 지금 딱 좋지 않냐. 적당히 바람 불고 적당히 선선한 이 사이.'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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