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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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도 몇 번 글로 남긴 적이 있지만, 저는 회고란 '어디서, 어떻게 끊어서' 하느냐에 따라 그 감도가 아주 다양해진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자기 전 매일 짧은 일기를 쓰고 누군가는 주말의 끝을 붙잡고서 한 주간 있었던 일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듯, '뒤를 돌아보고 나름의 정리를 한다'는 그 행위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지가 우리의 기억을 지배할 때도 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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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저만의 작은 행동 양식이자 회고 방법인 '쿼터 다이어리'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해보려고 합니다.
쿼터 다이어리란 말 그래도 1년을 4번으로 쪼갠 다음 돌아오는 3개월마다 그 기간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회고해 보는 것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한 분기마다 쓰는 짧은 일기라고 하면 금방 이해가 되실 겁니다.
(참고로 이 개념도, 용어도 제가 혼자 만들어본 것이니... 검색해도 관련 정보는 안 나온다는 걸 미리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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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터 다이어리를 쓴 지는 햇수로 약 5년 정도가 된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2019년 하반기부터 제 나름의 3개월 들을 정리해 보기 시작했으니 이제는 이 경험도 제법 익숙해졌고 또 진해졌다고 할 수 있죠. 덕분에 쿼터 다이어리 하나를 쓰고 나면 '이번 3개월은 이렇게 살았구나, 그럼 다음 3개월은 또 어떻게 살아봐야 할까?'라는 좋은 고민들이 생깁니다. 그리고 저는 제 생활에 있어 이 리듬이 퍽 괜찮다는 생각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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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터 다이어리를 쓰는 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 우선 저는 3개월 동안 했던 일 중 가장 큰 임팩트를 남겼다고 생각하는 일을 고릅니다. (가끔은 여러 가지 일들을 묶어 하나의 사건으로 구성하기도 합니다.)
/ 그리고 그 팩트들이 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한 줄 문장으로 추출해 봅니다. 즉, 객관적인 사실로서의 일 위에, 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 남겨보는 것이죠.
/ 그런 다음은 그런 제게 어떤 작은 보상을 해줄 수 있을지 고민해 봅니다. 물질적인 선물을 해줄 수도 있고 여행과 같은 경험적인 보상도 가능하지만 이왕이면 앞선 두 과정과 결을 같이 하는 선물을 고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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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3개월 동안의 일을 팩트로 마주한 다음' → '나만의 의미를 찾아서 문장으로 남겨보고' → '이 과정에 걸맞는 작은 보상을 스스로에게 선물하는 것'쯤 되겠네요.
참고를 위해 예시를 들어보자면 저의 2023년 마지막 쿼터 다이어리(10월-12월)는 이랬습니다.
/ Fact : 10년 만에 선보이는 네이버의 두 번째 데이터센터, 각 세종의 공간 브랜딩 업무를 완료하기 위해 분당과 세종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던 기록들
/ Meaning : (앞으로의 수십 년을 준비하는 차원에서의 브랜딩이었기 때문에) '10년 후 미래의 네이버에게 보내는 짧고도 긴 영상 편지'같은 업무를 했었다고 기록함
/ Reward : (스스로에게도 기록과 보관에 대한 의미를 남기고 싶어서) 평소 눈여겨보던 LAMY 펜 세트를 또 하나 구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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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짧은 회고지만 사실 저는 분량이 크게 중요하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외의로 이 쿼터 다이어리는 방법과 실천이 진짜 핵심이라고 보거든요.
3줄 남짓한 짧은 기록이지만 이 3줄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때론 몇 주의 시간이 소요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 분기가 끝나고 나서 바로 작성하는 것이 아닌 한 분기가 마무리될 때쯤이다 싶으면 미리미리 쿼터 다이어리를 준비하게 되죠. 어느 순간부터는 이때가 은근 또 기다려지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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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3월의 셋째 주를 시작하며 이 쿼터 다이어리에 대한 글을 쓴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곧 누그러질 날씨로 인해 '봄이 왔구나'라는 걸 실감하게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2024년의 4분의 1이 슈웅 하고 지나갔다는 걸 깨닫게도 될 겁니다.
물론 우리는 '컵에 물이 4분의 3이나 남았네'라는 무한 긍정의 회로를 가동시키겠지만 생각해 보면 섬뜩한 일이기도 하죠. 이렇게 인생의 토막들이 성큼성큼 사라지기 시작한다고 치면 시간과 기회의 소중함이란 게 새삼 다시 떠오르곤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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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쿼터 다이어리를 통해 짧게나마라도 내가 한 일들을 기록하고, 그 기록 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발견하고, 또 작은 보상을 통해 나를 위로하고 응원한다면 한 쿼터가 끝나는 게 그렇게까지 허무하거나 슬프지는 않을 겁니다.
아니, 오히려 저는 점점 그 반대의 경험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동안은 누군가가 시키는 일을 쳐내듯 사는 삶의 연속이었다면 (비록 그 본질은 바뀌지 않았습니다만........) 적어도 지금은 그 일련의 기억들을 어떻게 남기고 받아들일 것인가를 더 깊게 고민하게 되었으니까요, 그것만으로도 삶이 주는 큰 변화가 있음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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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이 쿼터 다이어리는 팀 단위로 해도 좋고, 혹은 친한 동료나 친구끼리 모여 (꼭 업무가 아닌) 개인적인 삶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사용해도 좋습니다. 저 역시도 어느 순간부터는 굳이 일로서만 이 쿼터 다이어리를 쓸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물며 지난 3개월이 너무 소모적이었다거나, 후회가 가득했다거나, 나 자신에게 실망했던 시기였다 하더라도 이걸 덮어두고 지나가느냐 일련의 과정으로 받아들일 것이냐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는 걸 꼭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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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토막 상식 하나 또 전달해 드리자면 'diary'란 단어의 어원인 라틴어 'dies'는 고대 로마시대 때 '하루에 정해진 양'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때는 정확한 시간 개념도, 기록 장치도 없었으니 공동체 생활에서는 아침마다 어제의 일을 회고한 다음 오늘 할 일을 정해서 부여했는데 그때 각자가 받은 분량이 바로 'diary'였던 거죠.
그러니 이 쿼터 다이어리도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어요. 지난 3개월을 회고한 다음 앞으로의 3개월이 나에게 어떤 기대와 역할과 결과를 가져다 줄지를 고민해 보고, 더불어 그 기간 동안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기회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