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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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을 구분하는 일은 참 중요합니다. 누군가는 단어 하나하나를 물고 늘어져 말장난 하는 거라 평가절하하기도 하지만 저는 개념을 잘게 쪼개고 또 다른 것들과 붙여 보는 과정에서 생각도 감정도 풍부해진다고 보거든요. 그리고 이렇게 여러 방향으로 개념을 가지고 노는(?) 일은 비단 생활에서뿐 아니라 업무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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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말의 의미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보단 '일의 의미'에 조금 더 가까울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개념을 쪼개다 보면 '아,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게 굉장히 두루뭉술하고 실체가 없는 것이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때가 있는데 그게 업무의 개념에서도 종종 발견되곤 하기 때문입니다. (연차가 높아진다고 해서 배울 거리가 줄어드는 건 결코 아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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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이 자꾸 길어지고 있는데... 일단 본론을 얘기하자면 이렇습니다.
저는 일을 정리하는 것과 일을 체계화하는 것과 일을 진행시키는 것, 이 세 가지는 아주 정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지금 이 말만 듣고도 '대충 감이 온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테고 '살짝 아리까리 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며, '일을 진행시키는 건 확실히 달라 보이는데 체계화하는 것과 정리하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라고 생각한 분도 있을 줄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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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일을 정리한다는 것은 의미 그대로 'arrange'에 가깝습니다.
즉, 두서가 없거나 우선순위가 잡히지 않았거나 한눈에 흐름이 파악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일에 정리가 필요하다'는 표현을 씁니다. 때문에 일을 정리한다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각각의 개별 사건에 따라 다른 솔루션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업무를 수행하는 개인 혹은 일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방식이라면 사실 형태도 크게 중요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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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일을 체계화(systemization) 한다는 것은 특정한 트리 구조를 가지거나 이를 시스템으로 확장해서 동작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비슷한 일이나 현상이 계속 반복될 경우 이를 어떻게 다루고, 평가할지에 대한 프로세스를 갖추는 거라 할 수 있죠. 그래서 나보다 해당 업무를 먼저 선행한 사람이 '체계화'에 능한 사람이라면 본인은 3대가 덕을 쌓은 거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보다 더 훌륭한 선임은 없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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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콕 짚고 넘어가고 싶었던 건 바로 이거였습니다. '일을 진행시킨다는 것' 말이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앞의 두 가지를 어느 정도 분리해 내고 나면 일을 진행시킨다는 것의 의미는 좀 더 뚜렷해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일을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것을 마치 일 자체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이쯤에서 반론이 예상됨은 당연합니다. '일이 되게 하려면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게 필수이지 않나요?'라고 말이죠. 물론 백 번을 물어도 백번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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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진행된다는 건 '목표한 결과값에 얼마나 가까워지고 있나?'를 기준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즉,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두서 있게 잘 정리했다고 해서, 혹은 꽤 괜찮은 프로세스와 시스템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결과값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죠.
때문에 이른바 정리와 체계화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 중에는 일을 진행시키는 부스터가 약한 사람도 상당수 있습니다. '한눈에 업무가 파악되어야 한다', '일이 체계적으로 진행되었으면 좋겠다'는 걸 이유로 앞으로 나아가는 걸 주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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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장단점은 있습니다. 일을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것도 중요하고 실제로 일을 진행시키는 것도 중요하죠.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앞서 말한 것처럼 일의 결과값에서 부터 역산을 해본 다음, 이 일에 어느 정도의 정리와 체계화가 필요한 지 대충이라도 산정하려는 태도입니다. 민첩하게 움직여서 빠르게 결과물에 다다라야 하는 일에도 '일단 엑셀부터 켜서 정리 좀 해보자' 하는 건 오히려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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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런 태도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이게 실제 일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자기만족에 그칠 확률이 높다는 겁니다. 사람은 어떤 상황과 마주하면 본능적으로 익숙한 포맷을 먼저 꺼내듭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민 없이 꺼내든 포맷은 생각보다 우리의 일에 크고 중대한 영향을 미칠 때가 많습니다. 그 포맷을 기반으로 생각하고, 조사하고, 관리하고, 평가할 가능성이 크니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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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정리가 필요하다' 혹은 '체계화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게 맞다'고 섣불리 예단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보다는 어느 정도의 정리가 필요한지, 어떤 체계화가 어느 타이밍에 어느 수준으로 필요한지를 살피는 게 훨씬 중요하거든요.
그러니 '우리 팀은 체계가 없다'는 말만 달고 살 게 아니라 일을 진행하기 위해 어떤 개념들을 실제로 적용해 볼 수 있는지 스스로가 정확히 인지하는 게 우선이라고 봅니다. 그저 느낌적으로만 접근했다가 큰 낭패를 보는 것들 중에는 이렇게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것들이 의외로 많으니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