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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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취소선 많이들 쓰시나요?
이젠 여러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기도 하고, 실제로 공적 업무든 사적인 대화에서든 간에 이 취소선을 곧잘 사용하기도 할 텐데요, 이 선의 정확한 영문 명칭은 strikethrough로 문자의 가로 횡 위에 이음선을 긋는 행위를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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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소선에 대한 역사는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지만 크게 두 가지 썰(?)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기원전 때 문서에서도 문자 위에 가로 선으로 글자를 덮은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에 '지우고 싶지만 지울 만한 마땅한 도구가 없을 때' 문자의 무효화를 의미하기 위해 썼다는 주장입니다. 지금의 쓰임새와 아주 다르다고도 할 수 없고 추측건대 아마도 이런 행위는 문자의 사용과 동시에 이뤄졌을 확률이 크니 그 기원이 더 과거로 올라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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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14세기 경 지중해를 탐험하던 선박의 항해 일지에서 새로운 의미가 더해졌다는 썰입니다. 기본적인 쓰임새는 비슷하지만 단순히 취소만을 사용해 썼다기보다는, '원래 쓰려던 내용은 아니었지만 취소한 내용 역시 중요한 기록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전할 가치가 있다'는 뜻으로 사용했다는 얘기죠. 선박을 운항하려면 수정한 값을 계속 기록해 둘 필요가 있었는데 그때부터 이런 표식을 자주 썼다는 건 정설처럼 내려오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취소를 했지만 기억해 둘 필요는 있다'는 묘한 뉘앙스의 의미가 새로 더해진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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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는 글을 쓸 때는 취소선보다 괄호를 훨씬 많이 애용합니다. 분명 제가 쓰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괄호를 쳐서 귓속말하듯 얘기하면 더 솔직한 이야기도 할 수 있을뿐더러 글 안에 또 다른 재미 요소를 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책을 낼 때마다 괄호 속에 들어간 글자들의 디자인과 색상에 어떤 변주를 줄까를 고민하며 편집자님과 상의하는 것 또한 하나의 큰 즐거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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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그동안 취소선은 그다지 즐겨 사용하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는 취소선을 긋는 것이 일종의 찝찝함처럼 느껴졌거든요. 무엇보다 공식적인 문서나 책에 취소선이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보니 이를 연습하는 과정에서도 굳이 취소선을 활용하지는 않았던 겁니다. 거기다 아예 삭제하지 않은 채 취소선으로 두면 자꾸 다음 글을 쓸 때 신경 쓰게 되는 게 너무도 싫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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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연히 한 작가님의 이야기를 듣다가 이 취소선에 대한 철학 하나를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취소선을 흉터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이정표라고 생각할 때가 더 많아요. 글을 쓸 때마다 한 번에 지름길을 찾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요. 매번 빙빙 돌아 겨우 제가 하고 싶은 말에 다다르는데 저는 그렇게 온 길을 나름의 기억으로 잘 보관해두고 싶어요. 그래서 글을 쓸 때면 백스페이스 키를 눌러 우두두두 지우는 것보다 취소선을 활용하는 경우가 꽤 많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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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행위를 두고도 여러 갈래로 해석이 나뉠 수 있다지만 저는 이 경험만큼 쨍하게 부서지던 선입견은 없었던 것 같아요. 마치 그동안 달의 한 면만 바라보고 있었던 마냥 취소선의 부정적인 부분에만 몰두했던 건 아닐까 싶었거든요.
한편으로는 '나는 목적지에 다다른 기쁨에 취해서 그동안 어떻게 그 길을 걸어왔는지에 대한 경험은 모조리 지워버렸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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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 후로는 아주 작은 오타를 제외하고는 저 역시 취소선을 적극적으로 애용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쉽게 되진 않더라고요. 게다가 취소선 때문에 한눈에 글이 들어오지 않으니 오히려 더 헷갈리는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름의 방법을 조금씩 터득하기도 했죠. 한문단을 통째로 날리고 싶거나 쓴 글의 절반 이상을 드러내고 싶을 때는 그 부분을 취소선으로 우선 남겨놓기로 한 겁니다. 예전 같았으면 한방에 삭제했거나 아니면 버전을 나눠 저장했을 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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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는 비단 글을 쓸 때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도 이 취소선의 개념을 가끔씩은 떠올릴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누군가에게 말을 하든, 내 나름대로 어떤 결정에 이르든, 새로운 생각을 떠올리거나 정리하든 간에 뭔가 수정을 거치는 모든 행위에는 이 취소선이 없을 수 없거든요. 그러니 누군가는 이 취소선을 아예 무시하고 완전히 새롭게 수정하는가 하면 또 누구는 나름의 취소선을 남기면서 그 과정을 복기하며 사는 거겠죠.
어쩌면 우리는 그 취소선들을 '반성', '후회', '회고', '결심' 등으로 해석하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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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제가 쓰는 이 글에도 취소선 버튼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에겐 취소선이 적용된 버전의 글이 한 벌 더 존재하죠. 이런 글을 공개하느냐 마느냐는 각자의 판단이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나만의 취소선 버전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 일까 싶어요. 언젠가 이 글을 어떤 생각으로 썼는지 내 자신의 과거가 궁금할 때는 이 취소선이야 말로 과거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자산이 되어줄 테니까요, 상처나 흉터라는 생각보다는 나라는 사람을 이끌어오는데 필요했던 이정표들이라 여긴다면 우리가 실수했던 것들 역시 조금은 더 사랑스러워질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