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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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가까이 회사를 다니면서 여러 번의 조직 이동이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좋은 문화를 만들어가며 늘 스스로를 진화시키고자 하는 이상적인 조직도 있었고 항상 하던 그대로의 방식을 고수하며 새로운 것에 이질감을 느끼는 조직도 있었죠. 어느 한 조직을 추앙하고 다른 한 조직을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개인과 조직의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어디가 더 유리한지는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마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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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냐 보수적이냐 이전에 한 가지 따져봐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스스로를 평가하는 기준에 대한 부분입니다.
만약 누군가 저에게 '가장 힘들었던 조직은 어떤 조직이었나?'라고 묻는다면 저는 '투명하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은, 그러나 또 눈에는 잘 띄지 않는 어둠의(?) 평가지표가 존재하는 조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공개적인 지표 외 그들만의 기준이 존재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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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누군가에게 단언하는 식의 조언을 하는 걸 굉장히 꺼리는 성격이지만 (그럴만한 능력도 없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단호하게 선을 긋는 순간이 있습니다. 후배나 동료가 새로운 조직에 들어가는 상황인데 그 조직의 인사권 혹은 평가권을 가진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다면 웬만하면 다시 한번 생각하라고 얘기하거든요.
바로 '우리 조직이 좀 특이해서요'라든가 '주관적인 평가가 좀 개입할 수밖에 없는 조직이라...' 같은 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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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했던 것보다는 임팩트가 약했을지 모르지만 제 설명을 듣고 나면 생각이 좀 바뀌실 수도 있을 겁니다. 제가 방금 말씀드린 저 말을 좀 더 자세히 해석해 드리자면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우리 조직에는 객관적으로 역량을 평가하는 지표가 드물다. 다 같이 고생하고, 같이 으쌰으쌰 하면서 가족처럼 지내는 조직이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답답하고 속상한 것도 있겠지만, 노력하면 또 그만큼 윗사람이 알아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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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신가요? 아마 지금쯤은 '요즘 세상에도 저런 조직이 존재한다고?'라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오시겠지만 의외로 정말 많습니다. 당장 저만해도 겪어봤고 그 후로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후배나 동료들이 이 문제로 고민 상담을 해오고 있기 때문이죠.
조금 심한 비약일 수 있겠지만 조직 내에 지하경제처럼 존재하는 그 특유의 잘못된 문화가 뿌리 깊게 박혀있는 곳들이 우리의 생각보다 많은 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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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저는 이상한 미덕(美德)을 강조하는 조직 문화에는 큰 알러지 반응이 생깁니다.
특히 함께 일을 함에 있어서 분명히 잘못된 것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에스컬레이션 하면 마치 '팀킬'이라고 보는 문화가 대표적입니다. '동료들을 북돋아 더 좋은 방향으로 끌고 갈 생각을 해야지 부정적인 이슈만 제기하는 건 좋은 태도가 아니다' 같은 말들은 사실 회사나 조직 차원을 넘어 요즘엔 친구 사이에서도 잘 먹힐 얘기는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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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생산성, 효율성, 잠재 가능성과 같은 기준을 배제하고 현재의 어려움에 묵묵히 적응하고 있는 걸 미덕처럼 여기는 것도 정말 시대에 뒤떨어진 행위라고 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프로의 세계에서 '고생했다'는 것이 평가의 지표가 될 수 있을 리는 만무할 겁니다. 하루하루 생활 속에서 서로에게 건네는 응원의 도구일 수는 있어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기준에다가 '그래도 저들은 작년에 말 못 할 고생 많이 한 조직이니까' 같은 식의 코멘트로 이상한 잣대를 들이대는 건 쉬이 납득할 수 없을 테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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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는 평가권을 가진 사람과 평가의 대상이 되는 사람 간에는 끊임없이 소통하며 평가에 대한 기준을 합의하고, 짧은 기간마다 피드백을 공유하며 생각의 싱크를 맞추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계속 정교하게 다듬고 발전시켜서 서로가 서로에게 '우리는 더 명확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줄 때 비로소 조직도 성장할 수 있는 거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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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로 고민하던 동료 한 명이 저와 커피챗을 하다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팀장님이 그러더라고. 우리 팀은 두부 자르듯 칼로 딱 자를 수 없는 업무들이니까 자꾸 KPI만 들이밀 수는 없대. 대신 눈에 안 보이는 부분까지 자기가 다 신경 쓰고 있으니 나중에 다들 서운하지 않게 보상해 줄 거래."
그 말에 저는 딱 한마디만 덧붙였습니다.
"거기 계속 있다 간 성장은커녕 퇴보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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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정량적 평가가 유독 어려운 업무들이 있다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정량적 지표를 만들고자 노력해야 그 일이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두부 자르듯 칼로 딱 자를 수 없는 일이라면 분명 사람의 주관적 선입견이 개입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럼 본인이 맘에 들 땐 크게, 맘에 안 들 땐 작게 칼질할 게 분명한데 그 과정을 지켜보며 '내 두부는 컸으면 좋겠다'고 염원하는 건 스스로를 무책임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꼭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희한한 미덕이 많이 수용되는 조직이라면 조직 차원에서든 개인 차원에서든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