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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Mar 11. 2018

기획자에게 '독서'란?

* 제목에서 '기획자'라고 이야기 했지만 사실 브랜드 관리자든 마케팅 담당자든 무엇인가를 기획(Planning)하고 실행하는 사람들 모두 기획자라 칭하고 글을 시작합니다.



직장인이 되어보면 안다. 책을 읽기가 얼마나 힘든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서 수년 간 일을 하면서 달라진 점 중 하나는 독서량이었다. 그래도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대학 시절에는 꼬박꼬박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었고 한창 때는 일주일에 2-3권을 읽기도 했다. 물론 문과생 특성 상 수업을 위해 강제로 읽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다행히 장르에 대한 거부감이 크지 않아서 딱딱한 철학책부터 말랑말랑한 에세이까지 두루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회사에 들어오고 한 동안은 매월 한 권을 읽는 것도 힘들었다. 무엇보다 독서 습관이 엉망이 된 탓이 컸다. 짬을 내어 읽으려다 보니 흐름이 툭툭 끊겨 완독하기가 어려웠다. 하루 종일 메일을 비롯한 각종 텍스트를 읽고 쓰는 게 일이다보니 활자에 대한 피로도도 높아졌다. 

책을 고르는 방식도 문제였다. 이왕이면 직무에 도움이 되는 것을 골라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고 결국 읽고 싶은 책보다는 읽어야 하는 책들이 쌓여갔다. 독서 습관이 종말로 치닿는 느낌이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일단 나름의 룰이 필요했다. 욕심내지 않고 2주에 한 권씩 읽어보기로 했다. 2주 내에 다 읽지 못하면 미련 없이 다른 책으로 갈아탔다. 읽을 책은 회사 책상에 두었다. 차라리 집보다는 회사에서 조금씩 읽는 게 더 나았기 때문이다. 서점에도 자주갔다. 주기적으로 새로 나온 신간들을 살펴보고 제목이라도 머릿 속에 넣기 시작했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2주라는 텀이 생각보다 알맞았다. 데드라인(?)이 다가오면 의도적으로 책을 읽을 시간을 마련하는 습관이 생겼고 시간이 촉박할 땐 읽고 싶은 부분부터 골라 읽었다. 끝내 못 읽은 부분이나 몰입이 되지 않는 부분들은 과감히 버렸고 덕분에 독서에 대한 부담감이 줄었다. 



'책은 사서 읽는 것이 아니라 사놓은 것들 중에서 읽는 것이다' 라는 소설가 김영하의 말은 명언임에 틀림 없다.




기획을 하는 사람에게 책은 어떤 의미일까?



사실 기획자는 숙명적으로 무엇인가를 읽어야 한다. 

책에 해답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간혹 생각을 정리하거나 발전시키는 데 있어 책이 좋은 역할을 해줄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기가막힌 한 방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엿보는 도구로서 활용해야 한다는 의미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무엇을 기획함에 있어 그 바탕이 되는 것들을 마련하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 광고인 박웅현 씨는 이것을 '비빌 언덕'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기획자에게 책은 하나의 브랜드로 여겨지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조금은 지나치게 느껴지지만) 책의 디자인과 제목이 주는 첫 인상, 책을 구성하고 있는 방식과 목차, 글을 써내려 가는 호흡과 문체 그리고 그 글을 쓴 작가에 대한 백그라운드까지. 책은 엄연히 하나의 브랜드가 맞다. 

그러다보니 책에 대한 평가도 좀 다양해진다. 보통 '재밌다, 재미없다, 어렵다, 지루하다, 읽을만하다' 등으로 표현되던 피드백은 훨씬 구체적인 것으로 바뀐다. 글이 '힘이있다, 담담하게 써내려 갔다, 울림이 있다, 깔끔하고 잘 정돈되었다'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속이 없다, 개운치 않다, 글이 착 붙지 않는다, 뒤에 갈수록 무너진다'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책이 하나의 인격을 가진 브랜드로 여겨지는 순간부터는 그 동안 보지 못했던 다양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또한 기획자에게는 저마다 '바이블' 같은 책들을 만나는 때가 온다. 

'OO이 뽑은 10대 도서' 같은 책이 아니라 정말 내가 힘들고 지칠 때 비빌 수 있는 언덕이 생기는 것이다. 인문학이 될 수도 있고 시집이 될 수도 있다. 그 바이블은 맥주 같은 책일 때도 있고 진통제 같은 책일 때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자주는 못봐도 일단 만나면 말이 통하는 친구같은 느낌의 책이 좋다.

재미있는 건 이 바이블들은 볼 때마다 늘 새롭다는 것이다. 몇 번째 읽는데도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로운 문장들이 있다. 지난번과는 전혀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나중에는 내가 좋아하는 구절을 따로 메모해두거나 아끼는 누군가에게 그 책을 사서 선물하기도 한다. 기획자가 바이블을 대하는 예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고보니 난 마케터인데도 '마케팅 불변의 법칙'이 그렇게 지루할 수 없었다. 내 바이블은 아닌가 보다.




기획자가 책을 대하는 태도 



이제 본론을 얘기해보자. 아니 정확히는 내가 기획과 마케팅을 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책을 활용하고 있는지 솔직하게 얘기해보려 하는 것이다.



1. 지금 하는 일과 전혀다른 분야의 책을 읽어보자. 

 

직장인으로서 그리고 기획자로서 책을 대하며 생긴 또 하나의 습관은 Contrasting book, 말 그대로 대조적인 책을 고르는 일이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와 전혀 다른 분야의 책을 읽으며 머리도 식히고 새로운 관점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현재의 트렌드를 빠르게 따라가야 할 때면 일부러 고전을 읽었고 정치뉴스로 떠들썩 하던 시기에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가득한 잡지나 여행책을 즐겨 읽었다. 


처음엔 굳이 책 읽는 것까지 일과 연관짓고 싶지 않아서 선택한 방법이었지만 효과는 쏠쏠했다. 상반되는 분야에서도 의외의 아이디어들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 이 분야는 문제 해결방법을 이렇게 가져가는구나'라고 무릎을 치게되는 순간도 있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오히려 대조적인 두 분야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될 때도 있다. 그러니 일에 파묻혀 있을 때나 억지에 가까울 만큼 생각을 짜내야하는 순간에는 오히려 저 반대편에 있는 책들을 바라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2. 호흡과 분위기를 모방해 보자. 


미안한 얘기지만 기획자에게 모방은 일상적인 일이다. 남의 것을 무조건 베낀다는 의미가 아니다. 경쟁사에서 하나 훅 치고 들어오면 우리도 뭔가를 내놓아야 하는데, 전혀 다른 쌈박한 것을 내놓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컨셉과 플래닝을 벤치마킹해야 할 때가 많다. (그 반대의 순간이 되어도 우린 쿨하다.)

회사에 와서 다시 독서 습관을 끌어올린 후, 가장 도움을 많이 받았던 부분은 바로 기획서를 쓸 때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무엇인가 다른 것'을 기획하고 싶다면 기획서부터 달라야 한다고 본다. 이미 실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전 기획서 포맷과 컨셉을 그대로 활용한다고 해도 시간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인가부터 책을 다 읽고 나면 노트북 메모장을 열어서 읽은 책 제목과 몇 가지 키워드를 정리해둔다. 내가 받은 느낌, 책의 분위기, 작가의 성향, 재미의 유무 등 생각나는 대로 단어 여러 개를 나열해둔다. 그리고 새로운 생각이 필요할 때 메모장을 열어서 훑어보고 그 키워드들을 따라가며 필요한 책을 다시 꺼내 본다. 그 다음 그 때 읽었던 호흡과 분위기를 떠올리고 이를 어떻게 내 기획서에 차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본다. 가끔은 기획서 첫 장을 시작하기 전에 조금 분위기를 녹이는 목적으로 책의 한 구절들을 인용하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내 방식이지만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 자주 사용하는 방식이다. 


* 최근에 읽은 '생각의 기쁨 - 유병욱 저'이란 책은 다음의 키워드로 정리해놓았다.  

초심을 잃었을 때 / 내가 하는 것에 조금 더 애착이 필요할 때 / 문체가 가볍고 편하다 / 광고쟁이지만 특유의 허세가 없다. (물론 작가와 나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3. 컨셉과 구성을 유추해보자. 


대학생 때부터 인연을 이어온 업계 선배이자 지금은 여러권의 책도 쓰고 계신 지인 분이 이런 말을 해주셨다.


'나는 목차 구성하는 게 제일 어렵더라.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어디서 힘을 주고 빼야 하는지, 결국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어디서 터뜨릴 것인지, 이 꼭지를 넣을지 말지.. 사실 목차 구성하고 나면 그 다음은 좀 마음이 편해.' 


백번 들어도 공감이 가는 말이다. 사실 책이라고 생각해서 그렇지 모든 기획의 단계가 저 고민을 거친다. 그런 의미에서 괜찮은 책 한 권을 보는 것은 좋은 기획서 하나를 받아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는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마다 목차를 유심히 보고 그 중 제일 관심이 가는 부분을 펼쳐 내용을 읽어본다. 그 느낌이 좋으면 주저 않고 구입하는 편이다. 물론 그렇다고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튼 당신이 기획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면 작가가 어떤 컨셉과 구성으로 이 책을 만들었을지 상상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목차를 읽으며 내용을 미리 상상해봐도 좋고 다 읽은 다음 내 나름대로 목차를 재구성해보는 것도 좋다. 책을 기획의 관점에서 보다보면 꽤나 쏠쏠한 소스들을 얻어낼 수 있다. 



좋은 책은 제목과 구성, 문체와 호흡, 메시지와 표현 방법까지 무엇하나 버릴 것이 없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세상에 수 많은 책이 있는 만큼 읽는 방법 역시 제 각각인 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다. 게다가 우리가 수 없이 속아 봤지만 누군가 추천해준 방식이 나와 잘 들어 맞는 경우가 어디 흔하던가.

하지만 적어도 기획에 관련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독서를 꽤 유용한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만은 명심하자. 개인적으로는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믿지도 않고 '인문학으로 OO하라' 식의 책들에 심각한 알러지가 있지만, 책이 주는 중요함을 결코 간과하지 않고 산다. 나름 기획을 하는 사람으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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