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영 Mar 22. 2021

이유를 찾다 보면 조금 더 행복해질지 몰라

좋아하는 것은 왜 좋은지, 싫어하는 것은 왜 싫은지

저는 다른 사람들이 어떤 책을 읽는지 늘 궁금합니다. 책을 좋아하는 지인들에게는 자주 물어보곤 하죠. 요즘 무슨 책을 읽는지, 제게 추천해 줄만한 책이 있는지 등등을요. 놀라운 건 사람들 저마다 참 다양한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얼마 전에 만난 친구는 정원을 꾸미는 법에 관한 책을 읽는 중이라고 하더군요. 친구의 표현에 따르면 자기가 사는 원룸은 오후 4시쯤이 되어서야 겨우 햇빛이 들어오고 그마저도 1시간 뒤에는 자취를 감춘다고 합니다. 햇빛이 많이 필요한 식물을 기르기가 어려운 구조여서 자신에게 맞는 식물을 찾아보던 중 정원의 세계가 궁금해져 그 책을 선택했다고 하네요. 먼 훗날 정원이 딸린 집을 사고 싶다는 꿈으로 책을 펼쳤는데 그 안에는 0.5평 남짓한 베란다에 나만의 정원을 만드는 방법도 담겨있었다며 즐거워했습니다.  

이처럼 그 사람이 책을 고르게 된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꽤 다양한 배경과 이유를 만날 수 있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위로받고 싶어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누군가와 공감을 나누고 싶어서. 마음속에 흩어져있던 각자의 목마름이 좋은 책을 만나는 순간 자석에 철가루 올라붙듯 흡착되는 것이죠. 

그러니 때로는 지금 읽고 있는 책 한 권이 그 사람이 머물고 있는 세상을 대신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조금 의외라고 생각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책에 대한 '감상'이 바로 그것인데요, 각자 그렇게 다양한 책을 읽고 있으면서도 그 느낌에 관해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대부분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책 내용이 맘에 드는 경우엔 '되게 재밌어', '그럭저럭 읽을만해', '난 좋았어', '작가가 대단한 사람이더라' 정도에서 머무는 대답이 많죠. 반대로 책이 별로라면 그 피드백마저도 더 짧고 박해집니다. '재미없어', '나랑 안 맞아', '잘 안 읽혀', '하나도 공감이 안돼'라는 식으로요. 

책에 관해 이것저것 묻기 좋아하는 저로서는 꽤나 아쉬운 지점입니다. 물론 제가 이렇게 자세히 물어보는 걸 귀찮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궁금하면 직접 읽지 왜 계속 물어'라는 말이 곧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을 짓는 친구도 더러 있으니까요.


고백하자면 꼭 책에 관해서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실 저는 분야를 막론하고 '좋아하는 이유'와 '싫어하는 이유'를 찾는 것을 즐기거든요. 왜 사람들이 열광하는지 아니면 어째서 대중들에게 외면받는지를 파고 들어가는 게 이제는 개인적인 취미 중 하나로 자리잡은 느낌입니다. 

그렇다고 심오한 이론에 빗대 분석을 하거나 과한 의미 부여를 하는 타입은 전혀 아니에요. 오히려 이유를 찾지 못한 채 빈손으로 되돌아오는 때가 더 많죠. 아니면 제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들을 실 끊어진 연보듯 멍하니 감상하거나요. 하지만 그것 역시도 나름의 재미가 있습니다. 이유를 찾든 못 찾든 혹은 잘못된 이유를 찾다가 실패를 맛보든 간에, 아마도 그 과정이 주는 손맛(?)을 못 잊는 거겠죠.   


이건 직업과도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고 있는 일의 특성상 정말 수많은 제품과 서비스, 또 브랜드들을 들여다봐야 하는데 단순히 소비하는 사람의 입장으로 볼 수만은 없거든요. 

'저건 품질도 별로고 디자인도 별로인데 왜 필수 아이템으로 자리 잡은 걸까?', '한때 인스타그램에 너도 나도 인생 사진을 남기던 곳이던데 왜 하루아침에 시들해졌을까?', '성수동, 망원동, 익선동.. 그다음은 어떤 사람들이 또 어느 거리에 열광하게 될까?' 이런 생각이 시도 때도 없이 머리를 장악할 때면 동료 마케터가 한 격언(?)이 문득 떠오릅니다. 


"마케팅이란 팔리는 것과 팔리지 않는 것의 끊임없는 대화다!" 

(역사학자 E.H.Carr가 말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를 패러디 한 것이었죠.)      




얼마나 좋아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왜 좋아하는지 


잠깐 영화 얘기를 해볼게요. 2004년에 개봉한 「사이드웨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와인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요, 무겁지 않은 유쾌한 내용이면서도 곳곳에 생각을 곱씹게 하는 포인트가 많아서 꽤 좋았던 기억입니다. 무엇보다 캘리포니아를 따라 펼쳐진 넓은 와인 농장을 감상하기에 더없이 훌륭하기도 하고요.

의외로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입니다. 넷플릭스에서도 보실 수 있어요.



영어교사이자 작가 지망생인 주인공 '마일스'는 이혼 후 그저 그런 나날들을 보내는 중입니다. 일상 속 모든 것에 소극적이고 무미건조한 태도로 일관하는 사람이지만 오로지 와인 앞에서만큼은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이죠. 와인 이야기라면 밤을 꼴딱 새우는 것은 기본이고 그 누구보다 진심을 다해 와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거든요. 그런 마일스는 결혼을 앞둔 단짝 친구 '잭'과 함께 총각파티를 겸한 와인 투어를 떠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만큼이나 와인을 사랑하는 '마야'라는 여자를 만나게 되죠.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 여전히 서툰 마일스지만 다른 듯 비슷한 마야에게 천천히 끌리게 되고 두 사람은 진솔한 이야기까지 털어놓는 사이가 됩니다. 그중 마야가 마일스에게 '왜 유독 피노 누아 와인을 좋아하느냐'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자 마일스가 이렇게 대답하죠.  


"피노 누아는 재배가 힘든 품종이에요. 껍질이 얇아서 기온에 특히 민감하거든요. 카베르네처럼 튼튼한 품종이야 어디든 방치해도 금방 뿌리를 내리고 성큼성큼 자라지만 피노는 달라요. 잘 보살펴줘야 해요. 그래서 피노를 재배하려면 지독한 인내와 애정이 필요하죠. 대신 시간과 공을 들여 길러낸 피노는 그 맛이 상상을 초월해요. 마치 원래 그 땅이 가진 태초의 맛을 허락한다고나 할까요."


대답을 마친 마일스가 이번엔 마야에게 되묻습니다. '당신은 왜 와인을 좋아하냐'고요. 


"전 그저 와인이 겪었을 삶을 생각해 봐요. 포도가 자라던 해에 어떤 일이 있었을지 상상해보는 거죠. 햇볕은 어땠을지, 비는 충분히 내렸을지, 포도를 기르고 수확하는 사람들은 어땠을지 말이에요. 그런 와인은 변화 무쌍할 수밖에 없죠. 와인을 언제 오픈하느냐에 따라서도 맛이 제각각이니까요. 그건 '와인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해요. 전 그게 맘에 들어요."



네. 미드 '빌리언스'의 척 로즈를 연기한 그 폴 지아매티입니다. 



서로에게 호감이 있는 두 사람이, 서로가 좋아하는 와인이라는 매개체를 놓고 그 이유에 대해 몰두하는 모습은 단연 이 영화의 백미입니다. 와인을 얼마나 좋아하는지가 아니라 왜, 어떻게 좋아하고 있는지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게 특히 인상적이죠. 

보통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은 러닝 타임이 중반쯤 넘어가면 극적인 반전이나 판타지에 가까운 설정으로 사건을 뒤집는 경우가 많은데요, 「사이드웨이」에서는 그런 장면이 없습니다. 오직 주인공 마일스가 애정 하는 와인에 대한 이야기로 극을 끌어가죠. 그리고 그가 와인을 좋아하는 이유를 함께 따라가다 보면 영화를 보는 사람도 마치 그 맛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는 것만 같고요. 



좋아하는 이유에 선을 그리고 색을 입히고 

 

조금 돌고 돌아왔지만 초반에 했던 책 이야기를 이어가볼게요. 

저는 책을 읽고 나면 짧게라도 좋았던 이유, 좋았던 지점들을 정리해서 간략한 메모를 남겨놓습니다. 반대로 예상과는 달리 큰 임팩트가 없었던 작품이나 실망스러운 글에도 나름의 이유를 정리해두곤 하죠. 이런 피곤한 작업을 굳이 왜 하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에겐 제 나름의 '기획 연습'이기도 합니다. 글을 쓰고, 책을 펴낸 사람이 기획해놓은 부분을 따라가며 이해해 보는 그 과정이 늘 흥미롭거든요. 


이렇게 책의 호불호를 정리한 메모들이 쌓여갈수록 그 내용도 진화를 거듭합니다. 

과거에는 비슷비슷한 평가와 감상으로 이어지던 메모들이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조금 더 다양하고 깊이 있는 표현들로 채워지더군요. 

그저 '좋다', '인상 깊었다' 식의 평가들은 어느덧 '호흡이 좋고 쉽게 읽힌다. 가볍지만은 않은 주제를 알맞게 요리한 느낌이다' 혹은 '저자의 목소리가 강한 편이고 때로는 몰아붙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주장에 책임을 질 줄 알고 허술하게 내버려 둔 문장이 없다' 등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좋아하는 이유가 다채로워졌고 풍성해진 것이죠. 

반대로 '별로다', '재미없다'는 감상들은 조금 더 명확하고 날카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쉬운 표현도 꼬아놓은 바람에 빙빙 돌아오게 만든다. 읽고 나도 개운함이 없다.', '독자를 붙들어놓는 힘이 약하다. 몰입이 될 때쯤 화제를 전환하고 흥미가 오를 때쯤 이야기를 끝내버린다.' 같은 메모가 붙은 책들도 있습니다. 나에게 별로인 것일지라도 별로인 이유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리해보는 겁니다. 


가끔은 내용뿐 아니라 책을 둘러싼 다양한 이유를 캐주얼하게 표현해놓기도 하는데요. 어떤 경우에는 표지와 띠지의 색감이 너무 예뻐서, 제목에 쓰인 폰트가 마음에 들어서, 손에 쏙 감기는 느낌과 무게감이 좋아서, 귀여운 삽화에 먼저 눈이 가서 그 책이 좋다는 메모를 남기기도 합니다.  

나에게 좋은 영향을 준 것들을 그냥 덮어두기에는 아쉬운 맘이 크거든요. 그리고 좋았던 이유를 한 번이라도 풀어내보면 그 느낌은 또 새로운 법이죠. 흐릿하게 실루엣으로만 남아있던 감정들에 선이 겹치고 색이 입혀지는 과정은 묘한 중독을 불러일으킵니다. 

작사가 김이나님께서도 그러시더라고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내 속에만 갇히게 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라고요. 



이유도 찾아본 사람이 찾을 수 있는 것 


이유에 대한 말이 나온 김에 저에게 가장 친근하면서도 오래된 '이유 찾기'를 하나 소개할게요. 

바로 직업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왜 브랜딩이 좋고, 경험을 기획하는 것이 좋을까?'에 대한 대답이죠.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들을 찾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찾아가고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것인 것 같아요. 


'기획의 과정이 입체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흔히 브랜드를 사람에 비유하고는 하는데요, 아마 사람처럼 인격도 있고 수명도 있고 이야기도 있고 역사도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중에서도 브랜드와 사람이 가장 닮은 점은 '입체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로 들어 매우 인기가 많은 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죠. 대부분이 그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겠지만 그 지점은 또 저마다의 이유로 다를 겁니다. 누군가는 외면에서 매력을 느끼고 또 다른 사람은 내면에서 매력을 느끼기도 할 테니까요. 반대로 아주 작고 사소한 부분에서 실망을 하면 어이없이 그 사람이 싫어지기도 합니다. 그 이유 역시 지극히 개인적인 것일 수 있고요. 


브랜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그 브랜드를 사랑하거나 혹은 멀리하게 되는 요소가 곳곳에, 아니 어쩌면 모든 곳에 존재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어느 한 부분을 소홀히 관리하거나 잘못 설계하면 그 브랜드 전체가 무너져내릴 수도 있습니다.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주얼리 브랜드 '티파니' 역시 사람들이 그 다이아몬드 자체에만 열광하는 것은 아닙니다. 티파니 블루라고 불리는 고유의 컬러는 물론이고 반세기가 넘도록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영화 속 오드리 햅번의 모습에 환호를 보내기도 하니까요. 

차고 넘치는 카페 중에서도 굳이 '스타벅스'만 간다는 사람들이 있죠. 그들이 모두 스타벅스 커피 맛에 매료되었기 때문일까요? 누군가는 4-5천 원 남짓한 가격으로 세련되고 도시적인 이미지를 갖고 싶어 스타벅스에 갑니다. 또 누군가는 세계 어디를 가든 가장 편하고 친근하게 이용할 수 있는 스타벅스가 특유의 안정감을 준다고 생각하죠. 로고가 예뻐서, 굿즈가 맘에 들어서, 하다못해 진동벨 대신 이름을 직접 불러주는 게 좋아서 스타벅스를 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커피와 크루아상을 들고 티파니 매장 앞에 선 오드리 햅번. 티파니라는 브랜드에 가장 큰 인격을 부여한 장면입니다.



이처럼 고객들은 브랜드를 매 순간, 모든 지점에서, 24시간 경험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절대 가벼운 포장으로 눈속임할 수 없는 것이죠. 대신 진정성을 담아 만들고, 이야기하고, 지키고 또 때로는 과감히 변화하며 생명력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곧 '브랜딩'입니다. 

좋은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것이 마치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과정과도 닮아서, 저는 브랜딩이 참 좋습니다.  

 

흔히 '좋아하고 싫어하는데 이유가 있냐?'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 이유를 답하는 게 더 촌스럽고 부자연스러울 때도 있죠. 하지만 내가 관심 있는 분야, 더 잘하고 싶은 분야에서는 그 이유를 찾는 과정이 곧 행복에 가까워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문득 영화 「사이드웨이」속 마일스도 그런 인물이 아닐까 싶어요. 영화의 후반부에 다다르면 마일스가 그렇게 애정하고 아끼는 피노 누아 와인이 결국 그와 참 많이 닮아있다는 게 느껴지거든요. 친구 '잭'이 어디에 던져놔도 별 탈 없이 잘 자라는 카베르네 같은 사람이라면 마일스는 인내와 애정과 시간과 이해가 필요한 피노 누아 같은 사람이었던 거죠.

마일스가 왜 그 와인이 좋은지에 대해 그토록 고민해 보지 않았더라면 자기 인생의 깊은 맛 역시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을 거란 생각을 해봅니다. 마야가 말한 '와인이 살아있다'는 표현처럼, 좋고 싫은 이유를 찾는 과정이 결국 '살아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일 테니까요. 


좋아하는 것이 왜 좋은지, 싫어하는 것은 왜 싫은지, 이런 '이유 찾기'의 과정을 마치 저만의 취미인 양 소개했지만 어쩌면 모든 분야에 해당한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조금 더 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그 일을 조금 더 의미 있게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말이죠.

세상에는 말과 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부지기수지만 그래도 나름의 이유를 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무엇인가를 기획하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지점이거든요. 우리들 각자가 기획하고 있는 무엇인가는 내가 아닌 남이 쓰는 것이잖아요. 그 쓰임에는 이유가 있어야 하고 그것이 사랑받기 위해서는 더 큰 이유가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이유도 찾아본 사람이 잘 찾을 수 있는 거죠. 

매거진의 이전글 필사(筆寫)를 넘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