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영 Feb 13. 2021

필사(筆寫)를 넘어

'따라쓰기' 다음은 '직접쓰기'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간혹 필사를 즐겨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저 읽는데서 그치지 않고 직접 손으로 따라 써보는 것이죠. 그렇게 책에 있는 글들을 옮겨 쓰다 보면 확실히 다른 감정이 느껴지곤 합니다. 필압을 통해 손을 타고 머리까지 전해오는 글의 밀도는, 눈으로 보던 글보다 한 차원 더 무게감을 가지거든요. 저는 그 느낌을 참 좋아합니다.  

사실 시작은 상당히 보잘것없었던 것 같아요. 필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마음에 드는 한두 줄 문장을 옮겨 써 나만의 문장집을 만드는 것이 고작이었으니까요. 그마저도 회사원이 되고서는 바쁘다는 핑계로 조금씩 횟수가 줄어들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책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만 사진으로 찍어 클라우드에 담아두기도 버거운 상태가 되었습니다. (회사원이란 신분은 이렇게 늘 좋은 변명거리가 되어주는 법이죠)

요즘은 필사에 관한 책도 많이 발간되고 서점 한구석에 아예 자유롭게 필사를 해볼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도 있더군요. 그런 걸 볼 때면 '그래 나도 필사를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말이야' 하고는 뿌듯함과 민망함이 동시에 피어오르곤 합니다. 


사실 필사의 횟수가 줄어든 데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조금 더 재미있는 취미를 찾았다고 해야 맞을까요? 정확히는 필사에서 시작되었지만 약간 변형된 필사를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저는 마음에 드는 작가나 책이 있으면, 이를 흉내 내서 글을 써봅니다. 직접 그 작가가 되어보는 거죠. 성대모사나 모창을 하는 것처럼 글로서 그 사람을, 그의 작품을 따라 해보는 취미가 생긴 겁니다. 

그리고 저는 이 취미를 '필모(筆模)'라고 부릅니다. 

'필사(筆寫)'가 베끼어 쓰는(寫) 개념이라면, 필모(筆模)는 '본받고, 본떠서(模)' 쓰는 것이 아닐까 해서 붙여 본 이름이죠. 그리고 제게는 꽤 오랫동안 깨알 재미를 주는 취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 취미가 생긴 시점을 정확히 기억합니다. 한 5년 전쯤이었나요, 넷플릭스에서 <브레이킹 배드>라는 미드를 발견하고 정말 '폐인'처럼 그 드라마에 매달린 적이 있었거든요. 너무 재미있어서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밤을 꼴딱 새우고 회사에 출근하는 날도 있었죠. 

이 드라마는 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한 고등학교 화학 교사가 죽기 전 가족에게 돈을 마련해 줄 목적으로 자신의 꼴통 제자와 함께 마약을 제조하는 이야기입니다. 화학 교사의 전공을 살려 넘사벽 퀄리티의 마약을 만드는 바람에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그렇게 평생을 교과서처럼 살아온 사람이 점점 나쁜 일을 저지르게 (breaking bad) 되는 내용이죠.  


제 인생 미드를 하나 꼽으라면 저는 이거요. <Breaking Bad>



당시 회사에서 가장 친한 동기 녀석도 같이 정주행을 시작했는데, 점심시간마다 이 친구를 만나 <브레이킹 배드>에 관한 수다를 떠는 게 쏠쏠한 재미였습니다. 이 친구는 어린 시절 영화감독을 꿈꿨지만 지금은 서버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 슬픈 운명의 소유자인데요, 대학에서 컴퓨터공학과 심리학을 동시에 전공했을 정도로 인문학에도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 이야기를 함께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죠. 

 

그렇게 드라마의 스토리와 장면을 두고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을 때쯤이었을까요. 


"형이 감독이라면 그 장면을 어떻게 연출했을까요? 아니면 아예 각본부터 다르게 썼으려나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한마디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게요. 흔히 만화나 영화에서 영혼이 바뀌는 상황처럼, 제가 딱 그 순간에 <브레이킹 배드>의 감독이 될 수 있었다면 저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그렇게 만들어진 장면은 관객들의 호응과 공감을 살 수 있었을까요.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는 것이 이럴 때 생기나 봅니다. 비록 영화를 직접 연출할 수는 없지만 글이야 마음대로 써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작가가 끝맺은 부분부터 이어 써보는 것일 수도, 아예 작가로 빙의해서 새로운 글을 하나 써볼 수도 있는 것이죠. 그 후로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필사를 넘어 직접 이 책의 작가가 되어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친한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굉장히 의아해하는 반응들입니다. 작가가 되어본다는 게 말처럼 그리 쉽냐고 이야기하죠. 그러면 저는 다시 반문합니다.


"아니 노래방에서는 다들 가수처럼 노래 부르잖아. 눈 감고 감정 싣고 심지어 애드립까지 하면서, 글 쓰는 건 못할 게 또 뭐야."


네.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0.5평도 안되는 코인 노래방만 가도 갑자기 이별하던 그 순간으로 회귀하는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BTS의 노래를 갖가지 버전으로 리믹스해 만들고, 심지어 백종원 대표의 레시피를 변형해 더 창의적인 음식을 만드는 블로거들도 있죠. 과거에는 배달의 민족이었는지 몰라도 21세기의 우리는 '디벨롭의 민족'임이 분명합니다.


저는 책의 호흡이나 문체를 흉내 내는 것으로 '필모'를 시작했습니다. 모든 글에는 글쓴이 특유의 리듬과 질감이 있거든요. 그 요소들을 음미하며 글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조금씩 닮아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친한 친구와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면 사용하는 단어나 말하는 투가 비슷해지는 것처럼요. 

그중에서도 호흡은 참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간혹 정말 어려운 주제를 가지고도 쉽고 매끄럽게 잘 풀어내는 작가들이 있죠. 흡사 손질하기 어려운 식재료를 너무도 알맞은 온도와 굽기로 요리해내는 느낌입니다. 

그런 작가들은 늘 좋은 호흡을 가지고 있습니다. 밀고 당기는 완급조절, 적절한 단어의 적절한 배치, 무의미한 반복을 줄이고 핵심을 돋보이도록 하는 문장 길이. 그 외에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알맞은 호흡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 글이라는 게 여러 곳에서 느껴지곤 합니다. 


최근에는 문장을 잘게 쪼개서 호흡을 짧게 가져가는 글들이 많아지고 있죠. 저도 한때는 그런 식의 글쓰기를 해본 적이 있습니다. 말하기 민망하지만, 소위 '쿨하게' 보이려고 말이죠. 툭툭 내뱉듯이 끊어 쓴 문장은 마치 대담하면서도 선명한 메시지를 전달할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조각낸 문장들은 글의 피로감을 몇 배로 증폭시킨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충분히 이어질 수 있는 문장까지도 끊어놓는 바람에 집중력도 흐트러지기 십상이죠. 불필요한 주어나 목적어도 늘어나게 마련입니다. 쿨하게 보이고 싶어 택한 방법이 오히려 훨씬 촌스러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늘 적절한 호흡을 찾는데 몰두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생각의 기쁨>과 <평소의 발견>을 쓰신 유병욱 작가님의 호흡을 참 좋아합니다. 마치 인심 좋은 대학 선배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느낌의 글이거든요. 그런데 그 안에 적절한 무게의 메시지들까지 담겨있으니 좋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기분 좋게 맥주 한잔하고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곱씹게 되는 대화들 있잖아요. 그런 이야기들이 빠르지도, 늘어지지도 않은 호흡으로 쓰여있어 참 기분 좋은 리듬감으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그 호흡을 따라 '필모'를 자주 해봤습니다. 윽박지르지 않고도, 몰아붙이지 않고도 상대방의 생각과 가치관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그 호흡을 따라 해본 거죠. 그렇게 '내가 유병욱 작가가 되었다'는 생각으로 글을 써보면 어설프더라도 그의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필사가 작가의 글을 더 오롯하게 이해하도록 해준다면, 필모는 글쓴이 자체에 비추어 생각을 더 확장해볼 수 있도록 해주죠. 



이 책들, 참 호흡이 좋습니다. <출서 : yes24.com>



혹시 '필모'라는 개념이 막연하게만 느껴진다면 일기를 통해 시작해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호흡과 문체로 나의 하루를 풀어보는 거죠. 박완서 작가님이 내 회사 생활을 설명한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아마 섬세하고 풍부한 감정 속에서도 날카로운 묘사가 살아있을 겁니다. 반면 말콤 글래드웰이 목격한 우리 부부의 다툼은 또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요. 말다툼이란 그저 촉발된 현상일 뿐이며, 그 이면에 담긴 원인은 아주 사소하고 무의미한 것이었다는 걸 밝혀낼지도 모를 일이죠. (회사에 맘에 들지 않는 상사가 있다면 스티븐 킹의 소설처럼 그 사람을 표현해보세요. 어우. 벌써 섬뜩하네요.)  


가끔은 흉내를 넘어 직접 이야기를 써보기도 합니다. 특히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가 의도적으로 끝맺어 놓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작가 스스로 주워 담지 못한 복선일 수도 있고 반대로 독자로 하여금 수많은 상상을 할 수 있도록 일부러 열어놓은 틈일 때도 있죠. 저는 이런 포인트들을 발견하면 필모를 시작합니다. 얼마나 신나나요. 마치 가수 윤종신이 새 곡을 만들어 놓고 '2절 가사는 네가 직접 써볼래?'라고 권하는 것과 다름없으니까요. 


제가 가장 즐겁게 필모한 작품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였습니다. 딱히 설명이 필요 없는 대문호인 하루키이지만, 아쉽게도 그의 다른 작품들만큼의 큰 인기를 얻지는 못한 책이기도 합니다.  

철도회사에 근무하는 '쓰쿠루'는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온 단짝 친구들로부터 하루아침에 버림을 받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른채 말이죠. 그렇게 성인이 된 다자키가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의 조각들을 찾기 위해 떠나는 여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특유의 색깔이 묻어있으면서도 많은 부분을 독자에게 열어놓은 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맞춰지지 않는 일부 조각들은 그대로 남겨져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과거에 집착한다고 해서 모든 부분들이 다 이해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가장 많이 '필모'한 책입니다. <출처 : yes24.com>



듬성듬성 파여있는 홈을, 직접 써 내려가며 메꾸는 재미는 상상외로 상당합니다. 거창하거나 긴 글이지 않더라도 제 머릿속에서 떠오른 장면들을 자유롭게 풀어보는 거에요. 물론 그때만큼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호흡과 문체를 빌려서 말이죠. 그의 리얼리즘 소설에 나오는 현실적인 묘사들과 무기력해 보이는 남자 주인공의 캐릭터도 그대로 살려 글을 씁니다. (이왕하는 거 현실감 있게 해야죠)


이렇게 필모 한 책들은 말 그래도 책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책을 읽는 것은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고, 필사하는 것은 작가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하나 덧붙이자면 필모 하는 것은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나도 나를 잘 몰라 답답해질 때면 누군가에게 묻게 되잖아요. 그 사람의 눈과 마음으로 나를 보려고요.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필모란 작가의 힘을 빌려 나의 이야기를 풀어볼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시간인 셈이죠. 


필모를 자주 하다 보면 의외의 소득도 있습니다. 꼭 작가가 쓴 글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쓴 글들의 특징을 빨리 파악하게 되거든요. 회사 동료의 기획서일 때도 있고, 홈페이지에 올라온 상품의 상세 설명이나 흔히 주고받는 메일 커뮤니케이션에서도 그 특징들이 비교적 쉽게 눈에 띕니다.  

'남 글 쓰는 거 파악해서 뭐 하게?'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기획 일의 많은 부분이 텍스트로 이루어진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짧든 길든, 형식이 있든 없든, 대중에게 공개되는 것이든 아니든 글을 파악한다는 건 다른 한편으로 일하는 스타일을 파악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거든요. 색다른 취미처럼 시작한 필모가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필사 대신 필모가 더 좋다는 것도, 필사를 버리고 필모를 시작하자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둘은 서로를 잘 보완해 주는 사이인 것 같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훌륭한 글을 읽다 보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기 마련이죠. '아 나도 이 사람처럼 글 한 번 잘 써보고 싶다'하고요. 그렇다고 무작정 내 글을 써보려고 하면 그게 또 마음처럼 잘 안되잖아요. 

그럴 땐 우선 필사를 하며 글과 글쓴이에 대해서 더 깊게 느끼고 이해해 보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그다음 그 작가의 힘을 빌려 글쓰기의 막연함을 조금씩 줄여보는 거죠. 피아노를 처음 배우거나 두발자전거를 처음 탈 때도 뒤에서 잡아주고 가이드 해주는 사람이 있었잖아요. 글도 그런 조력자가 있는 상태에서 시작한다면 어느 순간 자유롭게 원하는 글을 쓰는 순간이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등산을 좋아하는 회사 동료가 팀원을 꼬시는 현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힘들어서 등산은 죽어도 못 간다는 팀원에게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등산은 누구랑 가느냐에 따라서 다르다니까. 내가 옆에서 같이 호흡을 맞춰서 걸으면 평소보다 훨씬 덜 힘들 거야. 속는 셈 치고 한 번 가보자. 너랑 내가 하나의 몸인 것처럼 걸어줄게."


그러게요. 어쩌면 필모도 이와 비슷한 것인지 모르겠네요.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따라서 그 작품 속을 함께 걸어보는 것이 바로 필모의 매력이니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모두가 에디터인 세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