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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Jul 12. 2021

글을 쓰는 것과 책을 쓰는 것의 차이

책을 쓴다는 것은 이런 기분이었구나

책을 쓰고 있다. (아 정확히 말하자면.. 다 쓰긴 했다.)

지난가을 출간 제안을 받고서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꼬박 4-5개월 남짓 걸린 셈이다. 책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편이지만 막상 내가 책을 쓰게 되리라고 생각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기쁘고 설렜지만 그만큼 불안감도 컸다는 얘기다.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으로서 거리두기를 할 때 행복하다는 말을 무수히 많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즐겁고도 초조한 마음으로 지난겨울을 났다. 


어찌 되었건 초고가 완성되었다. 우여곡절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지 싶다. 글이 잘 안 써질 때는 난생처음 겪는 막막함과도 마주치곤 해야 했다. 차라리 회사일이라고 생각했으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며 작은 주문들을 외웠을지 모르겠지만 온전한 내 글을 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내가 타이핑하지 않으면 늘 글은 딱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시간도 호흡도 다 멈춘 채 나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아무도 눈치 주지 않지만 정작 나는 모두의 눈치를 보며 사는 느낌. 그 느낌들을 안고 글을 쓸 때면 몇 배는 버거웠다. 

더 큰 곤혹도 있었다. 꽤 긴 글을 썼지만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 통째로 날린 부분도 여러 차례였으니까. 분명 어제 새벽에 써 내려갈 때는 썩 괜찮은 느낌이라 만족한 글인데 다음날 일어나 다시 볼 때면 '차라리 그 시간에 잠이나 푹 잘걸'싶은 생각도 들었다.  


결과적으로 글을 쓰는 것과 책을 쓰는 것 사이에는 큰 산 하나쯤 되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단순히 분량의 차이 때문은 아니다. 출판이라는 작업과 유통이라는 경로를 거쳐야 하는 프로세스의 차이 때문도 아니다. 그보다는 훨씬 더 구체적이고도 가볍지 않은 문제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걸 풀어가는 과정이 곧 글이 책으로 탈바꿈되는 순간이었다. 



모든 것은 맥락위에서 움직여야 한다. 


그렇다. 브런치에 글을 쓸 때는 그냥 쓰고 싶은 글을 쓰면 됐다. 마치 주말의 늦은 아침, 냉장고 문을 열고서 밀폐용기에 담긴 음식들을 바라보는 심정과 다를 바 없었다. 내가 먹고 싶은 걸 꺼낸 다음 이리저리 섞어내는 요리처럼 어떨 땐 담백한 글이, 또 어떨 땐 매콤한 글이 써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평소 배설에 가까운 막글(?)을 쓰는 타입은 아니지만 확실히 목적이 없는 글은 비교적 가벼운 게 분명하다. 


대신 책을 쓴다는 건 제목과 표지에서부터 독자와 작은 약속을 하는 것과 같았다. 내가 지금부터 들려줄 이야기의 얼개를 촘촘히 설계하고 그 맥락 위에서 또 작은 이야기들을 가지치기하는 작업이었으니까. 형식에 지나치게 얽매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성의한 잡탕밥 같은 글을 내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나 역시도 책을 참 좋아하는 편인데, 개인적으로 다 읽고 나서 가장 개운하지 못한 글이 그런 부류이기 때문이다. 초반에 자기가 내뱉은 얘기를 채 주워 담지도 못하고 끝나는 책. 제목만큼 나머지 본문이 그 무게를 받쳐주지 못하는 책. 어느 순간부터 그냥 작가 자기의 개인사, 감정 풀이, 넋두리만을 반복하느라 주제의식을 흐리는 책. 적어도 이런 책들은 되지 말아야지라는 신념으로 글을 썼다.      

그러니 책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하나의 맥락을 설정하고, 그 맥락위에서 각각의 글을 어떻게 밀고 당길지 고민하는 지난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책을 쓴다는 건 (적어도 나에겐) 그런 의미였다. 



집필은 기억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팩트체크가 중요한 시대인만큼 책에 나오는 모든 에피소드에 대한 검증이 필요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글에 등장하는 당사자는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 곤란해진다. 그래서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한명 한명 찾아가 그때말한 것이 이 워딩이 맞는지, 실제 내가 느낀 이 의미와 동일한지를 대조(?)하는 작업을 했다. 생각보다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재미있는 건 나만큼이나 꽤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자신이 그런 말을 했는지조차 까맣게 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건 크게 중요치 않았다. 내가 우려한 건 상대방은 별 의미 없이 한 얘기인데 내가 너무 과하게 의미 부여한 나머지 꿈보다 해몽으로 흐르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거였다. 

물론 그렇다고 큰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거짓말로 글을 쓴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대화한 사람들과 생각의 결이 비슷하게 흘러가는 게 좋다. 기억이라는 것도 내가 일방적으로 취할 것만 취하고 냉큼 문을 닫아버리면 한없이 이기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맥주 한 잔씩 사이좋게 나눠들고 팩트체크를 해가다 보면 점점 서로의 기억을 회복하는 꽤 놀라운 과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냥 친한 친구와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과는 또 좀 농도가 달랐다. 그건 일종의 합의점에 이르는 대화이기도 해서, 마치 어린 시절 헤어질 때 각자 나눠가진 조각을 다시 이어 붙여보는 것과도 같았다. 글만 썼으면 분명 몰랐을 경험이었다. 이는 책을 썼기 때문에 가능했다.



책을 쓴다는 건 작은 선언과도 같다. 


말이 글로만 바뀌어도 그 무게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글이 다시 책으로 묶이는 과정은 일종의 스스로를 향한 작은 선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정확히 세어보진 않았지만 이미 탈고를 10회 이상은 한터라 못해도 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수십 번 읽어봤다. 그런데 읽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새로 되묻게 되는 지점들이 생겼다. 


'정말 이 단어가 내 생각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인가?'

'나는 나의 책을 읽어줄 사람들을 위해 가장 알맞은 화법을 골랐는가?'

'나도 모르게 누군가가 이미 쓴 표현을 함부로 가져다 놓은 것은 없는가?'

'내가 지킬 수 있을 만큼의 약속을 했는가? 그리고 내가 느낀 만큼의 감정을 전달했는가?'


이런 선문답의 과정이 비로소 책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경험이 가장 좋았다. 글이 가지는 무게감만을 느끼며 살아온 내게 책이 가지는 무게감을 직접 체감해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 감사하게까지 느껴졌다. 거창한 내용이 담긴 책은 아니지만 적어도 어설프고 무책임한 책으로 남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책을 쓰기로 결정하고 나서 아는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미 몇 권의 책을 발간한 사람이자 서로 책과 글에 대해 종종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기도 한 분이다. 그런 선배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글을 늘린다고 책이 되지도 않고, 책을 자른다고 글이 되지도 않아."


글을 쓰는 내내, 아니 책을 쓰는 내내 나는 이 말을 떠올렸다. 

글과 책이 그저 물리적 형태의 다름이 아니라는 것을, 일정한 시간과 질량을 확보하면 화학적으로 변해가는 것 또한 아니라는 사실을 주기적으로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글을 책으로 엮기 위해 모으고, 자르고, 붙이고, 털어내는 일련의 모든 과정은 오롯이 나에게 달려있다는 것 역시 뼈저리게 깨우쳤다. 


그래도 그 과정은 즐거웠다. 다 쓰고 난 후라 즐겁게 느껴지는 것 아니냐고 물으면 단번에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나름의 재미를 찾은 순간이 꽤나 많았던 건 사실이다. 나도 잘 모르고 있던 나를 발견하는 기회도 됐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약 9년 정도가 되었는데 챕터 하나를 정리하고 가는 느낌이라 불필요한 생각도 많이 덜어낼 수 있었다.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으로 둘 때도 있어야 하지만 가끔은 과감하게 그 손을 낚아채야 할 때도 있나 보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만큼 책을 쓰는 순간들도 행복했으니까. 그리고 아주 조금이라도 내가 성장했다는 느낌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첫 책이 주는 감정은 오묘하지만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이 책이 첫 책이자 마지막 책으로 남지는 않았으면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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