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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Jun 28. 2021

비워둔 게 아니라 남겨둔 건데요?

늘 결과물이 좋았던 프로젝트는 소위 빡센 환경에서 나왔다.

'딱 하루만 시간이 더 있었으면 진짜 잘할 수 있었는데...'


이 말 한 번 안 해본 직장인이 있을까요. 특히 뭔가를 기획하는 사람들은 늘 달고 사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이야 좋은 기억들에 기대서 이렇게 글로 풀어내고 있지만 저라고 왜 불평불만이 없었을까요. 일을 하다 보면 투덜거릴 일이 정말 많거든요. 


디자이너를 한 명만 더 붙여주면 좋겠다, 예산을 조금만 더 쥐여주면 좋겠다, 보고체계를 간결하게 해주면 좋겠다, 이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다, 리서치할 시간을 충분히 보장해 줬으면 좋겠다, 레퍼런스가 될만한 것들을 사전에 공유해 주면 좋겠다, 이런 부분은 전문 대행사에 의뢰해서 진행하면 좋겠다 등등... 

하다못해 나중에는 '차라리 나한테 전권을 주면 좋겠다'는 허무맹랑한 생각까지 하게 되죠. 


그런데 돌이켜보면 좀 이상합니다. 늘 결과물이 좋았던 프로젝트는 소위 빡센 환경에서 나왔거든요. 시간에 쫓기듯 일하거나 풀어내야 할 과제가 여러 개일 때 혹은 다양한 사람들이 엮여있어 누구 하나 내 편이 없는 것 같을 때 오히려 더 좋은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어려운 미션인 만큼 긴장감을 가지고 정신을 바짝 차렸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경험이 쌓이다 보니 조금 다른 관점이 생기더군요. 


저는 제한된 환경에 놓였을 때 생각의 힘이 더 깊어진다고 믿습니다.

사실 이건 여러 연구 결과로도 증명된 사실인데요, 매일 유치원에서 색색의 크레파스를 가지고 놀던 아이들에게 딱 3가지 색으로만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평소보다 오히려 더 창의적인 그림을 그린다고 하죠. 

또 사람들에게 '당신이 알고 있는 음식 종류는 몇 가지나 됩니까?'라고 물을 때보다 '당신이 내일 죽는다면 오늘 먹고 싶은 메뉴가 무엇인가요?'라고 물을 때 음식 정보에 대한 뇌의 처리 능력이 훨씬 배가된다고도 합니다. 천천히 걷는 사람보다 차를 타고 빨리 이동하는 사람이 지형지물을 더 잘 기억하는 것도, 글자 수에 제한을 뒀을 때 커뮤니케이션을 더 간결하고 효율적으로 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일도 마찬가지죠. 원하는 것을 다 갖췄을 때보다 (사실 이럴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만..) 제한적인 장치들이 곳곳에 있을 때 우리는 훨씬 더 깊고 진하게 생각합니다. 여러 장애물을 피해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해야 하는데 그 과정을 설계하고 다듬다 보면 전체적인 완성도가 쑥 올라가는 것이죠. 

오리온, CJ, YG 푸즈 등에서 수많은 식음료 브랜드를 히트시킨 노희영 대표의 첫 번째 히트작은 마켓오 리얼 부라우니라는 과자였습니다. 그런데 노희영 대표가 오리온에 들어갈 때부터 브라우니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어요. 최고의 베스트셀러 과자를 만들고 싶다는 호기로운 포부로 입사했으나 당시 초코파이나 포카칩 같은 메이저 과자를 만드는 생산라인이 너무 바빠서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비스킷 공정 하나뿐이었다고 해요. 만들 수 있는 것은 비스킷뿐인데 다른 비스킷들과 차별화는 해야겠고, 그렇게 끊임없이 제한된 상황에 집중한 끝에 브라우니라는 답에 도달한 것입니다. 



진득하고 쫀쫀하게


사람은 각자 좋아하는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모두 다릅니다. 누군가는 영상, 누군가는 이미지, 누군가는 코드, 누군가는 소리, 누군가는 제스처로 소통하는 것을 좋아하죠. 저는 단연 '텍스트'가 가장 좋습니다. 왜냐고요? 바로 지극히 제한적인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시각적인 정보가 최대한 배제된 상태로 하얀 종이 위에 놓인 글씨들을 볼 때면 흡사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갖춘 이어폰을 꼈을 때 느낌과도 같습니다. 다른 방해요소들이 차단되고 저 혼자의 힘으로 오롯이 생각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는 것이 좋거든요. 

저는 영화나 음악을 비롯한 모든 창작물을 사랑하지만 책이 열어주는 생각의 틈은 확실히 그 밀도가 다른 것 같습니다. 영화 속 이미지나 음악에서 흐르는 멜로디는 다른 생각을 잊고 그 콘텐츠 안에 몰입하게 만들지만, 책은 텍스트를 기반으로 스스로 모든 생각을 끌어가게 해주거든요. 마치 누군가 운전하는 차에 탄 것과 내가 직접 운전하는 것의 차이 같기도 합니다. 


혼자의 힘으로 오롯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 그래서 책이 좋나 봅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책을 읽다 보면 생각을 정말 진득하게 할 수 있습니다. 

'진득하다'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잘 끊어지지 않는 눅진하고 차진 상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책은 '생각을 찰지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셈이죠. 반죽할 때처럼 밀가루와 물의 배분이 잘 이뤄져 공기 하나 들어올 틈 없는 밀도 있고 쫀쫀한 상태. 저는 머릿속이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 좋습니다.  


다들 이런 경험 없으신가요? 회의에서 브레인스토밍을 할 때는 정말 분위기가 좋았는데 나중에 막상 기획서로 풀려니 막막할 때 말입니다. 분명 많은 아이디어가 나왔고 방향도 얼추 잡혔고 나는 그 내용을 정리하기만 하면 되는 것 같은데 이게 어디 말처럼 쉽나요. 

대부분 이럴 때 표현력 부족이나 기획서를 쓰는 스킬을 탓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다른데 이유가 있다고 봐요. 생각이 잘 뭉쳐지지 않는 거죠. 생각도 근육이라 계속 연습과 훈련을 반복해서 그 탄성을 유지해 줘야 하는데, 내 힘으로 진득하게 끝까지 생각을 완성한 경험이 없으면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서 말의 구슬을 '꿰는' 힘. 그 힘이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저는 기획 일이나 창의적인 업무를 하는 후배들을 만나면 꼭 '선명하게 상상하는 훈련'을 하라고 주문합니다. 어린 시절 과학의 달 상상화 그릴 때 필요한 그런 상상력이 아닌, 또렷하고 구체적이고 쫀쫀하게 상상하는 훈련 말이죠. 그리고 이왕이면 시각적 정보를 배제한 채 내 힘으로 상상할 수 있는 '책'을 매개체로 삼아보라고 합니다. 


 

#. 소설을 영화로 만든다고 생각하며 읽기 


당연한 얘기지만 소설만큼 상상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장르는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소설의 끝에 다다르면 이미 머릿속에 본인이 설정한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 작품 속 상황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머물지 않고 조금만 더 재미있는 상상을 해보면 어떨까요. 저는 주로 '가상의 캐스팅'을 많이 활용합니다. 소설의 초반부를 읽고 나면 저 나름대로 알고 있는 배우들의 데이터베이스를 열심히 돌려서 최대한 적합한 인물로 캐스팅하는 거죠. 상상이니 뭐 어떤가요. 출연료 걱정할 필요 없고 스케줄 고민할 필요 없는 거죠. 실제로 책을 읽어가면서 여러 번 캐스팅을 바꾸기도 합니다. 그렇게 몰입해가면 읽는 재미도 훨 커지거든요. 

더불어 영화로 만든다면 소설과 동명의 제목으로 할지 새로운 제목을 붙일지, 원작에 없던 복선을 넣거나 아예 결말을 다르게 하는 것은 어떨지, 등장인물을 추가하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삭제할지 등을 고민하는 것도 좋은 훈련이 됩니다. 


실제로 기획 일을 하다 보면 페르소나를 잡게 되는 일이 많잖아요. 신제품 출시나 사용자 환경 분석을 할 때도 그렇고요. 그럴 때 이 훈련이 효과를 크게 발휘합니다. 특히 요즘은 '30대 여성으로 패션 업종에 종사하며 하루 소비지출은 얼마이고..' 하는 식의 단순한 페르소나 대신 마치 한 사람의 삶 자체를 설계를 하는 방식으로 페르소나를 잡습니다. 그러니 이런 연습이 되어있으면 데이터를 기반으로 페르소나를 형성했을 때 훨씬 구체적이고 매력적인 설정이 가능합니다. 



#. 불친절한 문장과 마주하기


어려운 책을 읽으라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가끔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에 많은 틈을 열어놓는 작가들이 있거든요. 친절하고 상세히 설명해 주는 대신 독자가 직접 들어와 그 부분을 상상하며 채워 읽기를 바라는 것이죠. 

저는 이런 스타일을 '츤데레 작가'라고 부르는데요, 마치 낯설고 투박한 문체가 깔린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기분이지만 오히려 독자가 생각할 지점, 곱씹을 내용 등을 세밀하게 설계해놨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김훈 선생님의 작품들을 들 수 있겠네요. 문장만 떼어놓고 보면 지극히 평범한 한 줄 같지만 힘으로 내려쓴 흔적들이 보이거든요. 앞뒤 문장과의 관계나 내용의 전개를 살펴보면 고심 끝에 선택한 단어들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죠.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같은 역사 대서들도 그렇지만 <밥벌이의 지겨움>, <라면을 끓이며> 등의 일상 산문집에서도 그 힘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 것 같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죠. 마치 무뚝뚝한 사람을 보면 더 궁금증이 증폭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어렵긴 합니다. <칼의 노래>보다도 더 어렵더군요.




#. 목차 뜯어보기


목차 없는 책은 없습니다. 대부분 여러 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고 그 아래 소제목을 단 글들이 차례대로 구성을 이루고 있죠. 저는 책을 읽기 전 목차들을 꽤 열심히 보고 상상합니다. 특히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한 책일수록 더 집중해서 보죠. 이 짧은 목차가 주는 책에 대한 기대감은 생각의 단초가 되거든요. 목차에서 느껴지는 메시지의 톤, 주제 의식, 이야기를 풀고 매듭짓는 구성, 궁금증을 자아내는 몇 가지 포인트들, 유난히 먼저 읽어보고 싶은 부분까지. 글에 대한 소개를 글로 해놨으니 생각할 수 있는 요소가 정말 많은 거죠. 

물론 개중에 목차를 참 형편없이 짠 책들도 여럿 만납니다. 정보 전달이 목적인 기능서가 아닌 다음에야 목차는 일종의 자기소개서와 같은 역할을 하는 법인데 정말 밋밋하고 매력 없이 적어놓은 목차들도 있거든요. 반대로 목차는 독특하고 거창한데 실제 읽다 보면 내용이 느슨하고 삐걱대는 책도 있습니다. 마치 '이 의자 이쁜데?'하고 앉아봤더니 등은 배기고 수평은 안맞고 실망 투성이인 것처럼 말이죠. 


제 지인 중에 책을 여러권 내신 분도 늘 이런 말을 하십니다. 


"난 원고 쓰는 것보다 목차 구성하는 게 몇 배는 더 힘들어. 책 한 권이 꼭 사람 인생 같아서 말야,  내 인생의 이야기를 묶어 목차로 만드는 느낌이거든. 유년시절 이야기는 어느 정도로 할지, 이 에피소드는 글에 녹이는 게 나을지 타이틀로 빼는 게 좋을지, 이 사람을 만난 건 어느 파트에 넣어야 할지 등등... 목차만 제대로 잡혀도 책 쓰기 절반은 끝난 느낌이라니까."


그러니 목차를 쉬이 넘기기에는 독자로서도 아쉬운 부분이 큽니다. 작가와 편집자가 열심히 머리를 맞대고 구성한 그 목차들의 기획의도를 거꾸로 상상하며 거슬러 올라가 보는 거죠. 그 시작점에 닿으려는 노력이 생각의 얼개를 더 구성지게 만드는 힘을 키워줄 테니까요.  


개인적으로 책이 참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역사적으로 창작의 기술은 놀랍도록 발전해 왔죠. 영화는 CG를 비롯한 촬영기법이 날이 갈수록 발전해, 이제는 사망한 배우도 다시 살려 출연시키는 수준입니다. 음악 역시 공연의 시대, 녹음의 시대, 전자 악기의 시대, 미디의 시대를 거쳐 지금은 아이패드에서 손가락 몇개만 움직여 나만의 음악을 만들 수 있고요.

그런데 책은 몇 천 년 동안 그 방식이 거의 똑같습니다. 입력 기술과 출판의 모형만 진화해갈 뿐 창작의 형태는 동일하죠. 

이처럼 글을 쓰는 사람은 늘 글로써 모든 것을 해결합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독자 스스로 생산하도록 만듭니다. 저는 그 매력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 같아요. 작가가 상상으로 만든 세상에 독자는 또 다른 상상으로 접근하는 그 방식 말입니다. 그러니 수 세기 전의 문학 작품이 오늘 또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거겠죠. 


심리학에서는 사람의 상상 능력이 가장 좋을 때가 잠들기 직전과 샤워하는 동안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둘 엔 공통점이 있죠. 바로 눈을 감은 채 시각적인 정보가 차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더 많은 것을 보게 되는 아이러니가 탄생하는 장면이죠. 

이렇듯 우리를 자극하고 밀도 있게 만드는 순간은 늘 넘침의 순간이 아닌 부족함의 순간이라는 걸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솔직히 이건 저도 매번 반성하고 또 경계하는 부분이긴 해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앞서다 보면 연장 탓하는 목수가 되기도 하는 법이고, 실제로 목표 달성을 위한 도구와 환경을 마련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때로는 모든 것을 갖춰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는 자세가 요구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 진짜 제대로 된 타이밍에 나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거든요. 




여담


담당하던 브랜드를 리뉴얼하는 과제를 진행할 때였습니다. 디자인 팀과 함께 홈페이지 시안을 최종 리뷰하던 중이었는데 문득 맨 상단의 비어 있는 부분이 눈에 띄더군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가 궁금해서 담당 디자이너에게 물었습니다. 

 

"여긴 왜 공백으로 두셨어요?"

"공백이 아니라 여백인데요..."

"네?"

"비워둔(空) 게 아니라 남겨둔(餘) 거라고요." 


저는 아직도 이 대답을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 늘 무엇인가 아쉬울 때면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하죠. 이건 비워둔 것인가 아니면 남겨둔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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