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나에게 파리는 '책의 도시'다.
여행은 늘 설레는 일입니다. 떠나기 전에는 기대와 궁금함이, 도착해서는 들뜸과 낯설음이 그리고 여행이 끝난 뒤에는 기약과 아득함이 저마다 다른 이유로 우리를 설레게 하니까요.
저는 대자연도 좋아하지만 도시를 여행하는 것도 무척 좋아합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사람과 이야기가 넘쳐나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자연을 품은 여행지가 웅장했던 풍경들로 기억된다면 도시는 우연한 만남과 에피소드들로 기억되는 것 같습니다.
파리. 참 낭만적인 도시죠. 저도 직접 가보기 전까지는 가장 판타지가 컸던 여행지 중 하나였습니다.
파리에서 해보고 싶은 위시 리스트도 많았고요. 에펠탑은 꼭 야경으로 먼저 만나고 싶었고, 아침에는 노천카페에서 따뜻한 커피와 크루아상을 맛보고 싶었습니다. 오후엔 퐁피두센터에서 시간을 보내다 저녁에는 파리 생제르맹의 축구 경기를 직접 관람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었죠. 도시 어디를 가든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제가인 'Si Tu Vois Ma Mere'가 흘러나올 것 같은 환상에도 젖곤 했습니다.
하지만 직접 파리를 다녀온 후 제게 그곳은 조금 다른 의미로 남아있습니다. 바로 '책의 도시'죠.
프랑스 사람들이 책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파리에서 마주한 경험들은 제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이들에게 책이란 숨 쉬거나 걷거나 먹는 행위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자,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는 걸 매 순간 느낄 수 있었거든요.
또한 적어도 제가 만난 대다수의 사람이 책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파리에 도착하기 전 가진 환상과 실제 비슷한 곳도 있었고 전혀 다른 곳도 있었지만, 그 모든 곳에 책이 있다는 사실이 저를 새로운 판타지로 이끈 것이죠.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파리를 책의 도시로 기억하게 해준 프랑스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사실 파리를 방문한 건 여행이 아닌 출장길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담당하고 있던 서비스가 파리 국제 도서전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었죠. 프랑스에서도 손꼽히는 큰 행사에 주빈국 자격으로 참가하는 거라 거의 1년여 전부터 차근차근 기획을 준비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책과 관련된 행사를 기획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였거든요. 신나고 들떴죠. 정말 잘하고 싶었고요.
그렇게 D-day를 앞두고 있던 어느 날 뉴스를 통해 파리에서 최악의 테러 사태가 터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2015년 11월, 파리 도심 테러였죠. 때문에 파리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기관총으로 무장한 특공대와 마주쳐야 했고, 도시 전체가 슬픔에 빠져 있다는 것 역시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비극적인 사건도 충격이었지만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행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할까 봐 걱정이 앞섰습니다. 테러 사태 이후 파리에서 열리는 가장 큰 규모의 국제 행사였거든요. 담당자로서 안전 문제만큼이나 행사의 흥행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으니, 오픈 당일 아침까지도 마음을 놓지 못해 안절부절했죠.
그때 저희 부스에서 프랑스어 통역을 담당하던 유학생 친구가 제게로 다가와 말했습니다.
“걱정 마세요. 아직 프랑스 사람들이 얼마나 책을 사랑하는지 모르셔서 그래요. 아마 이 사람들은 책을 보지 못하는 게 테러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할걸요?”
불안한 마음을 안심시키려는 멘트치고는 꽤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직 테러범 일부가 여전히 파리시내에 있다는 뉴스가 연신 보도되고 있는 와중에 그게 정말 가능할까 싶었죠.
그런데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더라고요. 행사가 시작되는 오전 9시부터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약 4일간의 일정 동안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녀갔습니다. 도서전 기간 내내 매일 행사장을 방문하는 사람도 쉽게 찾을 수 있었고 일부 학교는 아예 휴교를 한 채 학생들을 모두 도서전에 참석하도록 했죠.
기획한 행사가 안전하게, 성공적으로 진행되니 더할 것 없이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기도 했습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책이 뭐라고 대체 이 정도까지?' 싶었죠.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했습니다. 행사 마지막 날 파리 지역신문과의 인터뷰를 마친 후 기자에게 용기를 내 질문했죠. 이런 분위기에서 행사가 취소되기는커녕 흥행하는 것이 가능하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기자가 답하더군요.
"비겁한 폭력에 대응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우리의 일상을 파괴할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늘 하던 것을 평소와 똑같이 하면 되는 거죠. 보세요. 파리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있어요. 평소처럼 책을 찾고, 읽고, 사랑하고 있잖아요."
사실 출장 기간에는 개인적인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하루 일을 마치자마자 그다음 날의 스케줄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평소보다 오히려 더 타이트한 일정을 살게 되죠. 그런데 하루는 저녁을 앞두고 생각지 못한 자유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세 시간 남짓한 이 시간 동안 뭘 할까 고민하던 중 꼭 가보고 싶었던 센(Seine) 강이 떠올랐습니다. 파리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지만 사실 제가 그곳을 가보고 싶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죠.
'부키니스트 (Bouquinistes)'.
센 강 왼편의 퐁마리 지역을 따라 루브르 박물관 근처까지 길게 늘어서 있는 고서적 판매상들을 가리켜 '부키니스트'라고 부릅니다. 특유의 초록색 철제 노점들이 일렬로 늘어선 모습은 파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겉보기엔 그저 중고 책과 엽서를 판매하는 여느 상점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이지만 놀랍게도 부키니스트의 역사는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1539년 프랑수와 1세가 인쇄조합을 폐지하고 개인이 책을 제작,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수많은 책 판매상들이 생겨났는데, 그게 이 부키니시트의 시초입니다. 그 뒤 절대왕정 아래에서 여러 차례 탄압을 받기도 하고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나치를 피해 정보를 나르는 통로의 역할도 해가며, 살아있는 역사로서 존재해 온 것이죠. 지금은 센 강을 따라 약 3km가 넘는 곳에 900여 개의 부키니스트가 자리하고 있고 이들 모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참고 자료 출처 : 문체부 해외문화홍보원 공식 자료)
해가 넘어가는 늦은 오후가 되자 대부분의 부키니스트들이 영업을 시작하더군요. 노을과 강과 책이라니. 파리의 공기를 한 움큼 집어 담아올 수 있다면 바로 지금 순간을 택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비록 매대에 진열된 책이 거의 다 프랑스어 서적이라 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 공간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습니다. 그리고 많은 부키니스트들이 마치 바텐더처럼 친절하고 능숙하게 대화를 건네는 덕분에 지루할 틈이 없었죠.
그중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한 부키니스트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대화를 하던 중 문득 궁금한 점이 생기더군요. 왜 하필 강을 따라 이런 공간이 생겨났을까 하는 것이었죠. 사람이 많아서? 도시의 한 가운데에 있어서? 잘은 몰라도 강 옆은 습기도 많고 바람도 많이 불어 책 장사를 하기엔 쉽지 않은 장소일 텐데 왜 센 강 주변에 이리도 긴 부키니스트가 자리했는지 의아했습니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던진 질문에 주인 할머니는 잊을 수 없는 대답을 건넸죠.
"세상 어느 곳을 가든지 강에는 늘 사람들이 모여드는 법이죠. 바로 생명력 때문이에요. 물이 주는 생명력을 따라 사람들이 모이는 거죠. 책도 마찬가지예요. 책에도 생명력이 있거든요.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을 살아 숨 쉬게 해주었고, 앞으로도 그럴 테죠. 센 강에 부키니스트가 있는 건 어쩌면 필연적인 건지도 몰라요. 인간이 책을 찾는 이유는 물을 찾는 이유와 같거든요."
마지막 일정은 파리 소르본 대학에 있는 학생들과의 간담회였습니다. 당시 저희 회사가 콘텐츠와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유럽 진출을 모색하고 있던 터라, 현지 학생들을 만나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과 생각을 들어보기로 했거든요. 이를 위해 미리 질문 리스트를 준비하고 참여를 희망한 학생들의 신상 정보(?)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때로는 지역 통계학적인 자료들보다 이런 그룹 인터뷰에서 훨씬 많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으니까요.
왠지 파리의 대학생이라고 하면 몇 가지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나요? 나폴레옹 시대부터 이어져오는 논술형 대학 시험 '바칼로레아'도 떠오르고, 혁명의 도시에 사는 만큼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저항의식도 클 것 같고, 한편으로는 프랑스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조금은 차갑지만 자의식이 강한 캐릭터도 연상됩니다.
그런데 실제 만난 대학생들은 참 영락없는 대학생들이더군요. 미국의 힙합 음악을 좋아하고, 주말에는 축구 경기에 빠져살거나 친구들과 공연장에 가고, 메신저에서 무료 이모티콘을 받기 위해 갖가지 이벤트를 사냥하는 현실판 청춘들이었던 거죠. 덕분에 머릿속에 가득했던 선입견을 지운 채 편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흐를 무렵, 영화를 전공하는 한 학생이 불쑥 질문을 던졌습니다. 바로 한국의 소설에 관해 것이었죠. 자신을 이승우 작가님의 팬으로 소개한 그녀는 <생의 이면>, <식물들의 사생활>, <욕조가 놓인 방> 같은 작품들을 인상 깊게 읽었다고 했습니다.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해외에서 조명 받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한국에서도 조금은 마니악 하게 분류되는 이승우 작가님을 안다는 게 여간 신기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정말 묘한 작품들이에요. 무거운 주제지만 아주 섬세한 묘사로 그 주제에 다가가죠. 슬프고 비참한데 또 아름다운 부분도 있어요. 기회가 있다면 그의 소설들을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을 정도에요. 한국에서 이승우 선생님에 대한 평가는 어떤가요? 제가 이해한 것과 같나요?"
통역사는 작품명을 검색해가며 통역하느라 진땀을 뺐고, 간담회에 참석한 우리도 날카로운 질문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죠. 다행히도(?) 이승우 선생님의 몇 작품을 인상 깊게 읽은 데다 때마침 요 근래 동인문학상 수상 소식을 기사로 접한 것이 생각나서 이를 토대로 최대한 대답을 이어갔습니다. (사실 가물가물했던 내용을 되새김질하느라 엄청 고생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다음이었습니다. 책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전환되자 간담회에 참석한 학생들의 눈빛이 모두 달라지더라고요. 조금 전까지 깔깔대며 장난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진지한 토론의 장이 펼쳐진 느낌이었습니다.
한 학생은 최근 파리의 어느 독립극장에서 홍상수 감독님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인상 깊게 봤는데 그 분위기와 비슷한 한국 문학을 찾고 있다고 했고, 또 다른 학생은 프랑스 4대 문학상이 왜 오늘날의 가치관과 점점 멀어져 가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하며 질타하기도 했죠. 지금 읽고 있는 책을 가방에서 꺼내 소개하는 학생부터 자신이 쓴 단편소설을 볼 수 있는 웹사이트를 알려주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더욱 신기한 건 그런 대화가 그저 일방적으로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었어요. 오히려 완벽하게 서로를 존중하며 각자의 생각을 풀어놓는 데 감탄할 수밖에 없었죠. 한편으로는 언제 어디서나 책에 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 분위기가 무척 부럽기까지 했습니다.
그 모습이 인상 깊었던 건 비단 저 뿐만은 아니었나 봅니다. 함께 간담회에 참석한 센터장님께서 학생들을 향해 조심스럽게 질문을 하시더군요.
"이번 출장을 와서 프랑스 사람들이 얼마나 책을 좋아하는지 확실하게 느끼고 가는 것 같아요. 대체 어떻게 하면 온 도시와 나라가 이렇게 책을 사랑할 수 있는 거죠?"
그러자 한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오히려 간단한 질문이네요. 저흰 책 읽는 걸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저 아주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죠. 언제 어디서나 읽고,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또 책을 읽어요.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없고요. 대신 주위를 둘러보면 늘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 갑자기 재미있는 기억이 하나 떠올랐어요. 제가 어렸을 때, 대학생이 되면 꼭 하고 싶은 게 하나 있었거든요. 저희 동네인 몽파르나스 역 앞에 근사한 와인 바가 하나 있는데 퇴근 무렵이 되면 어른들이 술을 한잔 시켜놓고 잠시 책을 읽는 게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때 친구와 약속했어요. '우리 이담에 어른이 되면 꼭 저 술집에 가서 책을 읽는 거야!'라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