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포문을 열며 언급했던 신부님이 댓글을 남겨주신 인스타그램의 게시물은 한 노동자의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올여름, 어디론가 피서를 떠나고야 말법 한 8월의 한가운데에 휴대전화가 울렸다. 약간 격앙된 목소리의 중년 남성이었다. 상담을 받고 싶다고 했다. 징계에 관련된 상담이라고. 약속을 잡고 사무실의 회의실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규모가 있는 식당에서 주방 보조 일을 한다고 했다. 설거지와 식자재를 다듬는 일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그러다 동료와 관계에서 문제가 생겨 회사에서 정직 2월을 받았노라고,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너무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부당한 징계를 받은 근로자는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등 구제신청을 해야 한다. 나는 그의 사건을 위임받아 대리인으로 구제신청을 도왔고, 그의 억울함이 다행히 잘 전달이 되어 정직 2월의 처분을 취소하고 그간의 미지급된 임금을 지급하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노동위원회 사건을 여러 번 해봤지만 대부분 화해로 마무리됐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심판위원들이 화해를 권고 조차 하지 않은, 덕분에 구제신청이 인정됐다는 명확한 결과를 통보받은 첫 사건으로 나의 역사에 길이 남게 됐다. 자축의 의미로 인스타그램에 게시글을 올렸는데 그 글에 신부님이 "감사합니다"라는 댓글을 남겨주셨던 것이다.
그 댓글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며 곱씹었다. 그분을 대신한 감사인지, 좋은 결과를 내려준 노동위원회에 대한 감사인지. 물론 신부님은 나의 노고를 치하하신 것일 테지만, 당사자도 아닌 신부님으로부터 감사를 받기엔 민망한 구석이 있다.
나는 돈을 받고 누군가의 노동을 대변하는 노동을 한다. 나는 누군가의 노동이 있어야 먹고사는 사람이다. 누군가 직장에서 일을 하고 월급을 못 받으면, 일을 하다 다치면, 해고나 징계를 당하면, 괴롭힘을 당하면, 나의 쓸모가 생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누군가의 노동에 문제가 생겨야 노동하는 사람이다. 물론 이런 일을 예방하기 위한 일들이나, 권리를 일깨워주는 강의 같은 것도 하지만, 아무래도 나의 주된 노동은 누군가의 노동이 곤란한 상황에서 그를 변론하는 일이다.
가끔 이런 일을 돈 받고 하는 것이 맞나, 저 사람들이 정당한 권리를 되찾는데 왜 비용을 들여야 하나, 하는 고민도 든다. 하지만 나는 녹봉을 받는 사람도, 어디선가 후원을 받는 사람도, 쌓아 놓은 돈을 까먹으며 사는 사람도, 건물주도 아니기 때문에, 그런 일에 시간을 쓰고 돈을 받지 못하면 먹고살 수가 없다. 나는 공인노무사다.
언젠가 존경하는 선배에게 나의 이런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 선배는 "돈 받는 것 미안하게 생각하지 마. 돈 안 받으면 일을 어떻게 해. 대신, 받은 만큼 최선을 다하면 돼."
나는 마트의 할인코너를 주로 찾아다니는, 십 원짜리 백 원짜리 한 장이 아까운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의 노동의 제 몫을 찾기 위해 내놓는 돈이 얼마나 귀한 지 안다. 귀한 돈을 내어준 만큼, 내 귀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최선을 다하려 한다. 물론 가급적 과도한 비용을 받지 않으려하면서도, 얼마를 받든 나의 노동으로 제 몫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법적인 분쟁에서의 핵심은 설득이다. 심판위원이든 판사든, 근로감독관이든 회사 인사팀이든, 내가 무언가 주장을 하고 받아들여지기 위해선 그 사람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법 없이도 살아왔기에, 마음속의 울분이나 부당하다는 감각을 법의 언어로 표현하는데 서툴다. 내가 노무사로서 해줄 수 있는 건 증거를 조작하거나 사문서를 위조하거나, 법을 무시하고 무작정 편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관계를 설득력 있게 가꿔주는 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사건을 꽤 많이 쳐내는 노무사다. (노무사 도움 없이도 하실 수 있는 사건이에요 / 이건 노무사가 붙어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요)
나의 노동은 고귀한 희생, 신념 같은 말과는 멀다. 오히려 기술에 가깝다. 어떻게 하면 설득할 수 있을까, 어떤 증거가 더 있어야 할까... 좋은 일 하시네요, 멋지세요, 같은 말을 가끔 들을 때마다 멋쩍어 고장이 나버리는 이유다. 나의 노동이 노동자를 위해 존재한다고 하기도 하지만, 사실 노동자들이 있어 나의 노동이 겨우 존재한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 같다.
나의 노동은 누군가의 노동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타인의 노동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 이야기는 차차 노동의 가치를 얘기하며 나누기로 하고). 나는 그들의 노동에 기대어, 그들의 노동에 빚져 노동하는 노동자다. 나의 노동은 나를 태워줄 차가 지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히치하이커를 닮았다.
나의 노동은 일상적으로, 필연적으로 많은 노동들과 교차한다. 그 노동들을 보며 드는 생각, 감정들이 잠시 잠깐 머물고 사라지는 게 아쉬워 글로 남겨보려 한다. 당신과 나의 노동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