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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쌤통의 심리학/리처드 H, 스미스/이영아 옮김/현암사

by 오달빛

<쌤통의 심리학/리처드 H, 스미스/이영아 옮김/현암사>

샤덴프로이데는 다른 사람의 불행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일컫는다. 이 책은 샤덴프로이데를 쌤통이라고 번역하였다. 굳이 우리말에서 찾자면 쌤통이 가장 근접한 것은 사실이지만 샤덴프로이데의 원래 의미와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느낌이다. 샤덴프로이데는 왠지 거부감과 죄책감이 동반되지만 쌤통은 조금 덜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전자가 무거운 느낌이라면 후자는 좀더 가벼운 느낌이 든다. 타인의 불행의 강도도 다를 것이다. 샤덴프로이데에 비해 쌤통은 사소하고 작은 불운 정도일 것 같다. 예를 들면 얄마운 사람이 빙판 길에서 발라당 넘어졌을 때 고소하다고 느끼는 심리는 쌤통이라 명할 수 있다고 내 멋대로 정의해 본다. 나치들이 저지른 홀로코스트에서 독일인들이 학살 당하는 유대인들의 불행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을 쌤통으로 번역하는 건 아무래도 뭔가 의미가 맞지 않아 보인다. 차라리 정확한 번역어를 찾을 수 없다면 쌤통이라는 말보다는 그냥 원어 그대로 샤덴프로이데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역사적으로 악행을 저지른 인간들의 불행에 대해서 느끼는 샤덴프로이데는 정당해 보인다. 그 악인들의 불행은 결국 자업자득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불행 자체가 정의의 실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까운 동료나 친구들에게서 느끼는 열등감과 질투심에서 비롯된 샤덴프로이데는 숨기고 싶은 불편한 감정이 아닐 수 없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떠올리면 샤덴프로이데보다는 역시 쌤통으로 말하는 것이 부담감 면에서 한결 수월할 수도 있겠다. 왠지 내 경험이 샤덴프로이데로 비춰지면 내가 정말 사악한 인간으로 비춰질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내가 그렇게 무자비한 짐승이 아님을 믿고 싶다. 그동안 내가 숱하게 많이 자행해 왔던 쌤통 심리의 근저에는 정의 실현 욕구로부터 파생된 정당한 감정이었다고 나름대로 항변을 해왔었지만 이 책은 대부분 질투심에서 유발된 자기 합리화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한다. 그리하다면 그동안 나는 먼저 질투할 대상을 정한 후 그의 약점을 억지로 찾아내 그의 불운을 기대하는 내 감정을 정의실현으로 둔갑시킨 후 합리화의 과정을 거쳤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저자는 자존감이 아주 낮고 열등감이 심한 인간일수록 이 감정에 취약하다고 한다. 분하지만 내가 그 장본인임을 순순히 인정하겠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쌤통 심리는 인간의 번식과 유전자 생존에 필요한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는 것이다. 내 의지에서 비롯된 잘못이 아니란 말이다. 다행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나는 이제 번식할 일도 없고 내 유전형질을 더 이상 후대에 남기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으니 이런 치사하고 야비한 심리는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 나이에 쌤통 심리를 유발하는 원흉인 질투심은 나에게 전혀 생산적이지 못할 뿐만아니라 감정적 에너지 소모일 뿐이다. 다행히 근래에는 별다른 질투를 느껴본 적이 없다. 자기 개선 의지가 전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열등감은 오랜 세월동안 화석처럼 굳어져 변함없이 나를 짓누르고 있긴 하지만 이 또한 나의 일부가 되어서 사는데는 별다른 지장이 없는 것 같다.

때론 어떤 대상에 대한 미움의 감정이 폭발하여 증오하고 저주하기도 하지만 이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이 과할 때는 나 또한 힘들어진다. 그때는 미운 이가 없는 세상을 의도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미움의 강도는 약해지고 오히려 동정심과 더불어 존재의 소중함마저 느끼게 되는 반전의 감정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미움이라는 감정은 실체가 없는 가짜 감정일 가능성이 많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듯이 나의 무심한 말과 행동으로 나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이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나를 증오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만으로 섬뜩한 일이다. 두 다리 뻗고 잘 수 없을 것 같다. 밤길도 조심해야 한다.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최소한 남들로부터 증오의 대상은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증오 받기 싫으면 다른이를 증오하는 일도 아쉽지만 그만 두어야 한다. 과연 그만 둘 수 있을지...

증오의 감정은 대부분 귀인오류일 가능성이 많다고 하니 그 사람의 내재적인 기질탓으로 돌리는 것보다는 상황적인 요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이 감정도 제압이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나를 증오하는 이들이여 듣고 있는가?

증오를 받는 건 끔찍하지만 질투를 받는 건 은근히 기분 좋은 일일 것 같다. 질투의 대상이 되는 건 그만큼 내가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나에게 질투할 거리가 있다면 누구든 맘껏 질투하시라. 넉넉한 마음으로 모든 걸 수용해 주리라. 하지만 현실의 나는 질투보다는 동정과 연민의 대상에 더 가깝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으니 돌들 내려 놓으시길...

질투가 일정 부분 자기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질투에는 폭력성이 잠재된 적대적이고 극단적인 성질이 있음을 이 책에서는 잊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남의 불행을 지켜보며 즐기다가는 남의 불행을 바라게 되고, 그 다음엔 그 불행을 직접 유발하려는 의지가 생긴다는 것이다. 질투도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쌤통 심리를 보며 인간은 역시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며 사악한 동물이라는 사실에 대해 다시금 환멸을 느끼게 되지만 이 책은 마지막에서 이 감정이 인간의 전부는 아니라고 말한다. 쌤통 심리는 인간의 여러 감정 중 일부일 뿐이며 이 감정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고 가끔 그 모습을 드러낼 뿐이란다. 이 말이 나에게 과연 위로가 되기는 할까. 독일인들처럼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사악한 개가 충분히 격려만 받는다면 미친개가 되어 날뛰게 되는 것은 한순간이지 않던가.


이 책은 누구나 마음의 밑바닥에 감추려 했던 불편한 감정들을 마구마구 들춰낸다. 어려운 내용도 없고, 새로운 내용도 별로 없다. 누구나 잘 알고 있으며 현재도 직접 경험하고 느끼고 있는 사실들로 가득하다. 굳이 많은 실험을 통해 증명할 것까지도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은 나에게 유의미하게 다가온다. 내가 이 부정적인 감정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면 그동안 외면하고 감추려 했던 쌤통 심리를 내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고 직시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그런 후에는 드디어 나에게도 타인의 실수나 오류를 보편적인 상황과 맥락에 결부시켜 너그럽게 바라보는 공감의 마음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마음속에 있는 개의 밧줄이 풀려나지 않게 하려면 우선 남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이 강박적인 사회적 비교 습관부터 고쳐야 할 일이다. 그러니 당분간이라도 엄친아, 엄친딸들을 비롯한 나보다 잘난 인간들은 내가 마음의 훈련을 할 동안만이라도 내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길 바란다. 이제 곧 나도 차칸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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