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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가쿠다 미쓰요/권난희 옮김/예담>

by 오달빛

<종이달/가쿠다 미쓰요/권난희 옮김/예담>

사춘기가 시작된 중학교 시절에 나는 전자오락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용돈이 항상 궁해서 오락실을 마음껏 드나들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짤짤이라는 놀이를 알게 되었는데 이 놀이는 지금껏 내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였다. 짤짤이는 3진수 놀이라고 할 수 있다. 고스톱에서 '선'이 되어 패를 돌리는 딜러를 짤짤이에서는 '접는이' 이라고 했다. 놀이 방법은 먼저 접는이가 두 손에 여러 개의 동전을 넣고 짤랑거리게 흔들어서 시작을 알린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양손을 엇갈리게 비껴서 한 손에 일정한 갯수의 동전이 들어가게 한 다음 주먹을 쥔 채 내민다. 그러면 다른 아이들은 그 주먹손 안에 들어가 있는 동전의 갯수를 3진수의 형식으로 끝자리를 예측하여 종이에 그려진 1, 2, 3번에 자신의 돈을 건다. 예를 들면 동전 5개가 손 안에 들어가 있으면 2번 자리에 배팅한 사람이 돈을 따게 된다. 딜러는 끝자리를 맞춘 이에게 그가 배팅한 만큼의 돈을 내주고, 맞추지 못한 이들의 돈을 자신이 가진다. 이때 아이들은 여러 가지 기술들을 발전시켜 나간다. 짤랑거리다가 한손에 비껴들어간 동전 소리를 예민하게 감지하여 정확히 맞추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이들에 대항해 동전 소리를 과장스럽게 내면서 그들의 감각을 교란시켜서 오판을 유도하는 기술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도박이 마찬가지겠지만 이 놀이의 가장 큰 핵심이자 묘미는 치열한 심리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심리전을 짤짤이에서는 '꼼수'라 불리었다. 꼼수는 상대가 어떤 수를 접고 어디에 배팅을 할 것인지에 대한 심리를 예측해야 한다. 상대방이나 자신의 심리가 읽히기 시작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치열한 심리싸움이 싫어서 꼼수로 하지 않고 운에 전적으로 맡기는 방식을 택하기도 한다. 배팅을 해서 돈을 딴 사람은 다음 판 딜러가 되어 돈을 접는다. 고스톱의 '선'과 마찬가지로 이 노름도 딜러가 되면 돈을 딸 확률이 높아진다. 접는이, 즉 딜러가 되려면 우선 자금력이 풍부해야 한다. 돈을 배팅하는 이들의 모든 금액을 지불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금력이 부족한 이는 딜러가 되는 기회를 잡아도 돈을 많이 가진 이에게 양보를 한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스스로의 노력으로 돈을 벌어 본 것은 심부름값을 제외하면 아마도 이때가 처음인 듯하다. 보통은 십원짜리로 했기 때문에 돈을 땄다고 해도 이삼백 원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같은 돈이라도 이 짤짤이를 통한 수익의 쾌감은 남달랐다. 진정한 낚시꾼들이 물고기를 잡으면 그 손맛에 만족하며 물고기를 놓아주듯이, 이 놀이도 계속 하다보면 돈을 따는 느낌보다는 자신의 예측이 맞았을 때의 쾌감에 더 매력을 느낀다. 나의 통산 실적은 조금 따고 조금 잃는 것을 반복하는 정도의 본전치기 수준이었다. 이 놀이가 유행을 탈 때 학교에서는 쉬는 시간이 되면 교실 책상에 삼삼오오 모여서 짤짤이를 했다. 공부하는 교실이 쉬는 시간에는 금세 카지노로 탈바꿈되는 놀라운 광경을 연출했다. 동전들이 손 안에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탄식 소리와 뒤섞여 교실 한가득 은은히 울려퍼졌다. 방과 후에는 어른들의 눈을 피해 뒷동산에 올라가서 짤짤이를 했다. 늦가을 저녁 어스름 속에서 추위에 떨며, 저녁 먹을 시간에 맞춰 집에 가지 않으면 야단 맞을 것이 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판을 끝내지 못한 채 이 돈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결국 저녁 시간 때가 한참 지나서 집에 들어간 나는 산에서 짤짤이를 한 것이 발각되었다. 엄마는 우리 집안에는 노름하는 사람이 대대로 없었는데 너만 유독 왜 그런 나쁜 짓을 하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한차례 유행이 지난 후 나는 더이상 짤짤이를 하지 않았다. 이후 내가 다시 노름을 하게 된 건 대학 시절 방학 때 시골에서 등록금을 벌기 위해 막노동을 할 때였다. 하루 일당 5만원을 들고 퇴근한 나는 동네 형과 친구들이 모여서 화투를 치던 방에 들러게 되었다. 도박을 하게 되는 처음의 계기는 언제나처럼 돈이 절실히 필요할 때였다. 새벽부터 일어나 어두워 질때까지 해야하는 막노동은 내게 너무나 힘겨웠다. 반면 화투를 치는 동네 형들과 친구들은 힘들이지 않고 몇 분만에 내 하루 일당에 버금가는 금액을 손쉽게 따고 잃기를 반복했다. 순간 나는 내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5만원이 힘든 노동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줄 씨알이 되어줄 수도 있겠다는 환상에 빠져들었다. 마침 그때 한 명이 이탈해서 나는 그 화투판의 빈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다. 화투 2장씩 받는 '섯다'라는 노름이었는데 기대와 달리 나에겐 대부분 좋은 패가 들어오지 않았고 간혹 괜찮은 패를 쥐어도 상대방의 더 높은 패에 밟히기 일쑤였다. 결국 눈 깜짝 할 사이에 내 하루 일당은 사라지고 말았다. 망연자실한 나는 그 자리에서 미련없이 일어섰다. 그집을 나서면서 나는 앞으로 내 일생에 두 번 다시는 노름 같은 건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쩌다 직장동료들과 마지못해 고스톱을 치는 일이 있었지만 나는 돈을 걸고 하는 게임에는 전혀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이후 나는 친구 상갓집에 가서 오랜만에 만난 고향 친구들과 밤을 샐 요량으로 고스톱을 치게 되었다. 어느새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나는 돈이 풍족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시기도 아니었다. 인원이 부족하다는 친구의 권유도 있었지만 단순히 시간 때우기용으로 오랜만에 즐기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나는 그 고스톱에 합류했다. 그러나 화투판은 고스톱에서 그 추억의 '섯다'라는 노름으로 바뀌었다. 마침 수중에는 현금이 7만원가량 있었기에 이 돈을 다 잃을 때까지 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결코 친구들의 돈을 따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그날따라 내 의도와 달리 나에게 좋은 패가 계속해서 잘 들어왔고 판을 거듭할 수록 나는 승승장구하고야 말았다. 어느새 내 자리엔 만원짜리가 수두룩히 모였고 약 40만원에 가까운 거금이 모이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나는 친구들의 돈을 따는 게 점점 더 난감하고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인상도 달라져 있었다. 이건 즐기려는 게임이 아니라 노름 그 자체였다. 내가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빨리 수중에 있는 돈을 몽땅 잃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이후 나는 좋지 않은 패에도 무리한 배팅을 계속해서 남발했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을 털고 일어설 수 있었다. 그날의 꺼림칙한 기분을 만끽한 이후에 나는 완전히 노름이라는 도박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불가피하게 화투를 치는 일이 생기더라도 돈을 딸 생각이 전혀 없으니 이 놀이가 재미있기는 커녕 나에겐 오히려 고된 노동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설령 작은 돈이라도 따게 되면 마음만 불편해졌다.

물론 도박에 대한 흥미 여부가 돈에 대한 집착의 척도가 될 수는 없다. 나도 아주 이따금씩 직장에 나가기 싫을 때는 로또를 사기도 한다. 내가 돈에 충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돈에 과도하게 집착하며 살고 있지는 않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과연 앞으로도 계속 그럴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이 책에서 '종이달'은 돈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역자의 말에는 일본 사람들이 사진을 찍을 때 달그림을 배경으로 해서 찍는다고 해서 가장 행복한 한때를 의미한다고 한다. 종이달에 나오는 인물들은 저마다 돈에 집착하며 살아간다. 돈을 너무 절약하는 유코나 마구잡이로 펑펑 쓰고 다니는 리키, 마키코, 아키는 대조적으로 보이지만 돈을 맹신하고 끌려다닌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볼 수 있다. 지난 번에 읽었던 스콧니어링님께서 돈을 멀리하신 이유가 이 책에서도 증명이 된다. 자기 주관이 확실하고 정신력이 강한 분도 한사코 돈을 멀리한 것은 돈의 유혹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인간은 돈맛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진정한 행복과 멀어질 뿐만 아니라 타락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타락해도 좋으니 타락할 정도의 돈이라도 만져 봤으면 좋겠다...뭐야..방금 돈에 관심 없다고 하지 않았나?


리카가 결국 거액의 돈을 횡령하게 된 것은 젊은 대학생 애인 고타 때문인 것 같지만 그 근본 원인을 따지고 보면 남편의 책임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남편 마사후미는 여자가 자기보다 잘 나가는 것을 절대 보지 못하는 인물이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노력했던 리카에게 남편은 은근히 그녀가 그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일부이며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치사한 방법으로 증명하고 확인시켜주려고 했다. 아내가 선물을 사주거나 밥을 사줘도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법이 없다. 그로인한 그녀의 결핍은 결국 고타라는 젊은 애인과 사치를 통해 채워나갔고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돈을 횡령해서 쏟아부어야 했다.


리카가 돈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아주 단순한 일에서 시작되었다. 화장품을 살 돈이 모자라서 고객의 돈으로 계산을 하고 바로 돈을 찾아 갚았는데, 이 일을 시작으로 그녀는 결국 엄청난 횡령 사건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치부할 수 있지만 그녀의 마지막 파국을 보면 이 단순한 행위를 결코 그냥 보아넘길 수는 없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라는 속담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별 생각없이 하게 되는 하찮은 잘못이라도 이 이야기를 반면교사로 삼아 마땅히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일이다.


여자들이 쇼핑 중독에 빠지는 상황과 심리 묘사도 아주 흥미로웠다. 나 역시 예전에 약간의 홈쇼핑 중독에 빠진 적이 있었기에 특히나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다. 그리고 쇼핑을 할 때 절제력을 발휘해야 하는 어떤 한계 지점을 알게 된 듯해서 나는 절대 쇼핑 중독에 걸려들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지만 인간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 내가 어찌 될지...


고타가 변해가는 모습은 꼴보기 싫었다. 처음에는 밥 한끼를 얻어 먹어도 계산대 옆에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던 인간이 나중에는 아예 당연한 듯이 나가버린다. 착한 척, 예의 바른 척하는 이런 인간이 더 밉상이다. 더 가관인 것은 새여친이 생겨서 리카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울면서 고백하지만 리카가 매월 지불하는 비싼 임대집에서는 나가지도 않고 그녀가 갚고 있는 할부차도 여전히 타고 다닌다. 겉으론 항상 얌전한 척하면서 리카의 돈을 맘껏 유용하는 아주 얍삽한 인간이다.

결국 리카의 애인 고타와 주조아키의 딸 사오리가 돈맛을 알게 되어 변질된 것은 리카와 아키 때문이었다. 이 어른들은 자신의 애인와 딸을 사람이 아닌 돈을 사랑하게 만드는 가장 모범적인 교육을 한 셈이다.


이 소설에서 특히 좋았던 것은 리카의 주변부 인물들을 등장시킨 이야기 구조였다. 평범해 보이지만 이 주변 인물들 또한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리카의 삶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리카처럼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어떤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리카와 같은 종류의 파멸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겐 죽음이라는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파멸도 떡 하니 버티고 있지 않는가..그렇다면 리카처럼 막 살아도 되지 않을까..갑자기 뭔 소릴 하는거야!! 역시 그러면 안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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