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달빛책방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연애사건/이수광/다산초당>

by 오달빛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연애사건/이수광/다산초당>

머리도 식힐 겸 가벼운 마음으로 설렁설렁 읽고 싶은 책으로 골랐다. 제목만 딱 봐도 잡지책에 실린 가십 거리들로 구성되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읽어보니 역시나 그랬다. 그래서 심심풀이 오징어 땅콩을 먹듯이 술술 읽어나갔다. 쉽게 읽히는 책에서 밀도 있는 내용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재미는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딱히 그렇게 재미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봤음직한 좀 싱거운 이야기들이다. 맵고 짠 음식을 좋아하는 내가 이런 싱거운 책을 좋아할리가 없다. 이 책을 읽으니 앞으로 좀더 자극적이고 강한 내용의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주 오래 전에 읽어서 지금은 제목만 간신히 기억에 남아 있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떠올랐다. 그 책에 담긴 내용은 거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저자의 유교에 대한 통렬한 비판에 구구절절 동감했던 기억은 난다. 이 책에 소개되는 16가지 연애사건들을 읽으면서 나는 다시 한번 조선 시대를 말아먹은, 득보다는 해악이 훨씬 더 컸던 현실과 괴리된 유교와 그 학문을 숭상하며 당파 싸움에 몰입했던 선비라는 작자들의 거짓과 위선에 대한 역겨움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유학이라는 이름으로 사리에 맞지도 않는 부당한 법도와 권위를 내세워 여성과 약자들을 억압하며 그들만의 기득권을 향유했던 왕을 비롯한 사대부 머스마들이 한 짓을 생각하면 같은 남자로서 창피할 뿐만 아니라 토까지 쏠릴 지경이다. 자신들은 딸보다 어린 첩과 후궁들을 버젓이 거느리며 탐욕스런 성적 욕구를 마음껏 발산하지만 입으로는 침을 튀겨가며 사대부의 윤리와 법도를 들먹이며 성적으로 문란한 이들을 단죄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아들이 죽은 아비의 어린 첩과 간통했다하여 강상의 법도를 운운해가며 입에 거품을 무는 자들의 모순과 후안무치함의 기저에는 역시나 그 허황된 유교가 버티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처가 죽으면 남자들은 당연히 재혼을 하지만 남편이 죽은 여자는 살아도 산 사람이 아니었다. 절대 남자를 쳐다봐서는 안 되고 남자를 생각해서도 안 된단다. 집에서 부리는 남자종들과 마주치지도 말고 말도 해서는 안 된다. 이 절대 고독의 강요로 말미암아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여인들에게 사대부 남자들은 고작 열녀비라는 것을 세워 주고 절개를 칭송하며 홍보한다. 정말이지 사대부 남자들의 이런 행위와 발상 자체가 유치하고 추악하기 짝이 없다. 얘네들은 기생에게도 열녀문을 하사하기도 하는데 자신들이 무슨 대단히 파격적인 관용이라도 베푼 것마냥 허세를 부린다. 이 인간들은 기생에게까지도 절개를 요구하는 정말이지 구제불능의 지독한 수절도착증 환자들임이 분명하다.

왕이라는 작자들은 자신이 싫증나서 외면한 후궁이 다른 남자에게 주파를 던지는 것조차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내 여자로는 이제 지겹고 남 주자니 아깝다는 이 고약한 심보는 유아스러움을 넘어서 남자라는 인간에 대한 측은한 마음까지 들게 한다. 조선 시대 사대부 남자들만큼 찌질하고 비열하고 야비하고 쪼잔한 놈들이 또 있을까. 겉으로는 온갖 체면과 사대부의 윤리와 법도를 들먹이며 나오지도 않는 헛기침을 "에헴, 에헴"해가며 근엄한 척은 다하고, 뒤에 가서는 온갖 음란한 짓거리들을 서슴지 않았던 그들의 허위와 위선의 민낯은 양반 가문 출신이면서 일부종사를 거부한 유감동과 어을우동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결국 그녀들은 자유 연애를 한 댓가로 조선의 유교에 의해 참혹하게 처형된다.

마지막에 나오는 몇 편의 애절한 사랑이야기조차도 나에겐 그다지 감동스럽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여자를 아끼고 사랑했지만 부당한 차별 대우를 받고 있는 여성들과 유교문화에 대한 문제 의식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맨날 공부만 하는 놈들이 도대체가 개념이 없다. 암기 위주의 공부 방식이 문제일 수도 있겠다. 내가 보기엔 그들은 그냥 공교롭게도 자신의 이상형을 만나서 열렬히 사랑했을 뿐이다. 또한 그들은 하나같이 첩을 들일 수 없는 가난한 살림살이와 과거시험에 번번히 낙방만 하는 처지의 선비들이었기에 가능했던 사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양반댁 과부의 정조를 둘러싼 논쟁으로 영남의 거대한 양대 학파가 갈라져서 싸우는 걸 보면 도대체 이 학자들이라는 인간들이 하는 공부의 정체와 목적이 뭔지 궁금해진다.


이 책에 나오는 애절한 러브스토리와 강상의 법도를 어긴 연애 사건들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적 감정을 억압하고 여성을 차별하고 길들이려고 했던 남성기득권 중심의 유교사회였기에 유별난 사건들로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마땅히 이 사건들을 기록에 남겨 후손들이 교훈으로 삼기를 바랬겠지만 나에겐 교훈은커녕 욕밖에 안 나온다.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나는 주구장창 유교와 양반들 욕만 한 것 같다. 며칠 째 감기를 달고 있는 중이라 예민해진 건지 책을 다 읽은 후 욕말고 다른 건 생각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의 눈부신 친구/엘레나 페란테/김지우 옮김/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