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달빛책방

2017 이상문학상 작품집/문학사상

by 오달빛

2017 이상문학상 작품집/문학사상

<풍경소리/구효서>

싱그러운 바람이 불고 이따금 풍경소리가 바람에 장단을 맞추는 고즈넉한 산사에 가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갈 수 있는 그와 비슷한 절을 떠올려 보았다. 청도 운문사, 울진 불영사 정도. 아무리 건축학적 미가 뛰어나고 훌륭한 국보가 즐비한들 사람들로 북적이는 절에는 가기가 싫다. 사람이 싫다기보다는 구경을 위해 온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무리가 싫다. 유명하다는 곳에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군중심리도 싫다. 내가 선호하는 절은 우선 조용하고 봐야 한다. 운문사나 불영사는 지금처럼 겨울 비수기에 가면 훨씬 더 쓸쓸하고 고요한 산사의 정적에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저녁 어스름이 내릴 때면 더욱 좋겠다. 일상의 누적된 삶의 상처들이 곪아서 더 이상 감당하기가 버거울 때, 수줍고 내성적인 아가씨 미와가 머문 곳처럼 소붓한 절 식구들과 어우러질 수 있는 작고 소박한 절에 며칠간 머물고 싶다. 그곳에선 미와처럼 핸드폰 전원을 꺼두고 밤에는 형광등 대신 촛불을 켜두고 문풍지에 비치는 풍경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방에 엎드려 잘 구워진 전병 같은 노트에 스삭스삭 연필 소리를 내가며 아무거나 마구 끄적이고 싶어질 것이다. 좌자 아줌마가 해주는 건강하고 소박한 밥상을 맛있게 배불리 먹어도 좋겠다. 내가 싫어하는 나물 반찬도 잘 먹어질 것 같다. 상처를 치유하는 건 큰 깨달음에서 오는 건 아닌 듯하다. 단지 조용히 머물 수 있는 시간이면 충분하다. 절에 가서 굳이 득도와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것들은 애초에 없을런지도 모른다.


<모란꽃/구효서>

사람은 저마다의 감정과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사건이나 대상에 대한 기억도 각기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우리가 추억을 떠올릴 때 정확한 팩트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각자의 삶이 녹아낸 기억들은 자신을 위해 왜곡과 각색과 편집의 과정을 거쳐 그 나름대로의 기억으로서 의미 있게 저장되기도 하는 것이다. 옛 친구를 만나 그 시절의 서로 다른 기억들을 떠올리며 갑론을박하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스마일/김중혁>

*타인의 고통에 대한 완전한 감정이입은 불가능하다고? 남이라면 모를까, 사랑하는 사람이 눈 앞에서 죽는 장면을 목격할 때 그 고통을 분담할 수 없다고 하는 잭의 말에는 선뜻 동의가 되지 않았다. 그런 장면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잭은 상대방의 고통스런 감정을 상상하는 건 착각이라고 계속해서 강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와 아무 상관없고 사랑하는 사이도 아닌 마약운반책의 아슬아슬한 불안 속으로 어느새 감정이입이 되고 말았다. 그의 내면이 나쁜 놈인지 선한 놈인지도 모른 채. 하물며 마약 밀매는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무사하기를 빌기까지 했다. 나에게 도덕적 잣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작가의 의도에 내가 말려든 것일까. 감정이입이 잘 되는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걸까?


<부루마블에 평양이 있다면/윤고은>

국가 차원에서 하지 못하는 일도 분양은 해낼 만큼 우리나라의 아파트 분양 광풍은 이제 부루마블 게임에서나 나올법한 개성, 평양 아파트 분양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었다. 부동산 아줌마 말대로 통일이 안 되면 피 받고 팔면 된다는 아파트 분양 신화에 대한 이 확고한 믿음은 북한에서도 그대로 통용될 것만 같다. 아파트가 주거가 아닌 투기의 대상이 되어버린 우리의 현실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내지만 씁쓸한 뒷맛을 지울 수 없다.


<나를 혐오하게 될 박창수에게/이기호>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구분은 무의미하다. 어디까지가 인간의 윤리이고 어디까지가 정신병이란 말인가. 숙희는 정신병자가 아니라 인간말종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녀 자신이 고상하게 속죄하려는 모습조차도 가증스러운 짓거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내면에는 누구나 욕구불만이 잠재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욕구불만을 이유로 선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죽이진 않는다. 스토리텔러답게 이기호의 소설은 언제나 속도감 있게 잘 읽혀진다.


<산속의 눈사람/조해진>

화자는 증언자들의 기억에 의존한 증언은 객관성과 진실성을 담보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시대를 달리 한 증언자인 최길남과 여진을 관련지으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 연관성은 애매모호하다. 기호가 모텔에 여진 혼자 남겨두고 서울로 달아난 이유도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쫌생이, 찌질이라면 모를까. 세련되고 정제된 문장은 좋았지만 사실들의 인과관계가 부족한 듯하다. 물론 나의 이해력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


<코드번호1021/한지수>

-고문기술자가 고문당하는 자의 누이와 결혼하는 설정은 이기호의 단편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에서 삼촌의 노동자 모임을 감시하는 정보과 형사가 고모를 이용하여 정보를 캐내다가 결혼하는 설정과 비슷하다. 이런 비극적 아이러니를 소재로 하는 소설은 좀 식상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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