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브레인 / 데이비드 이글먼/ 전대호 옮김/ 해나무
<더 브레인 / 데이비드 이글먼/ 전대호 옮김/ 해나무>
나는 목욕탕에 잘 가진 않지만 가게 되면 때를 밀지 않는다. 샤워를 하고 온탕에 들어간 후 땀이 날 정도가 되면 바로 냉탕으로 들어간다. 냉탕과 온탕 사이를 오가는 냉온욕을 대여섯 번 반복한 후 샤워로 마무리하면 내 목욕은 끝이 난다. 나에게 냉온욕은 때를 미는 것보다 오히려 더 후련한 느낌을 준다. 때는 밀지 않으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내 몸에 땟국물은 있을지언정 때는 없다. 단지 피부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요즘 같은 한파에는 냉탕에 들어가는 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정말 물이 얼음장처럼 차갑다. 아무리 온탕에서 몸을 데웠다고 하지만 냉탕에 발을 담그는 순간 내 온몸에선 뼛속으로 파고드는 차가운 냉기의 고통으로 비명을 지른다. 발만 담그고도 몇초를 견디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냉온욕을 포기하진 않는다. 온탕으로 퇴각한 나는 잠시 후에 다시 2차 시도를 한다. 이번에는 허벅지까지 잠겨 본다. 냉기의 고통은 여전하다. 역시 오래 버티지 못한다. 다시 온탕에서 몸을 데운 후 3차 시도를 감행한다. 이번에는 허리까지 잠긴 채 몇 번의 심호흡과 망설임을 거쳐 상체 전부를 냉탕속으로 과감히 집어 넣는다. 앙다문 이빨들이 뽀드득거리고 기괴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온다. 냉기의 고통은 한치의 물러섬도 없다. 몇초도 견디지 못한 나는 재빨리 뛰쳐나와 온탕으로 들어간다. 이때 따뜻한 물 안에 들어오면 피부에서 기포가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온몸이 따끔거리면서도 간질간질한 느낌이 나쁘진 않다. 그리고 이후부터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이상하게도 나는 갑자기 냉탕에 들어가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게 된다.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냉기에 대한 두려움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다. 조금 전의 그 호들갑스럽던 나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나는 온탕에 들어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냉탕으로 쑥 들어가 버린다. 냉탕과 온탕의 온도에 변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매우 뜨겁고 매우매우 차갑다. 내 두려움 없는 정신에 몸도 그대로 호응한다. 냉탕에 들어가도 전혀 고통스럽지 않다. 잠수도 하고 수영도 한다. 오히려 시원한 느낌마저 든다. 이런 신기한 냉온욕 체험은 이 책을 통해서 왜 그런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피부를 통해 전해진 감각 정보가 뇌에 전달되어 그것이 안전한 것으로 판단되면 뇌는 그것을 더이상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처음의 낯선 경험이 정보의 부재로 해석이 되지 않아 고통이라는 감각으로 경계를 했지만, 이런 행위가 위협적이지 않다는 내부 모형으로 자리잡게 되면 고통은 이내 사라지고 만다. 대충 이렇게 연결해서 내 맘대로 이해해 보았다. 물론 내 경험과 뇌의 작동 방식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이 냉온욕의 경험은 다른 곳에서도 적용가능하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성급하게 이 일은 나와는 맞지 않다거나, 아니면 나에게 재능이 없다는 것으로 간주하고 포기해 버리는 일이 그동안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수없는 반복과 시도로 뇌에 프로그램화가 되어버리면(이 용어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그 일이 어떤 일이든 가능하리라고 본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기억력도 점점 감퇴되고 뇌세포의 기능도 떨어지리라 생각했던 나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가 생겼다. 우리가 새로운 영역에 도전해서 그 일에 매진하면 할 수록 뇌는 그 분야에서 발달이 가능하다는 것은 익히 들어온 이야기지만 뇌과학적 분석과 설명으로 이해하니 훨씬 더 믿음이 가고 확신이 생긴다. 그동안 내가 하지 못했던 것, 엄두가 나지 않아 포기했던 것들도 무한히 반복하거나 집중하다보면 숙달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 못할 것은 없다. 물론 일만 시간의 법칙과 같은 엄청난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가장 큰 숙제가 남아있긴 하지만… 재능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희망적이고 감사한 일이다.
인간의 잔인한 집단 학살 행위들도 뇌의 신경학적인 욕망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이런 비인간화를 부추기는 정치 선전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타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끼는 공감 능력과 관점 전환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 책은 말한다. 이제 슬픈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겠다.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끼는 공감 능력은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며 우리 사회가 폭력성과 비인간화로 오염되는 것을 차단하는 중요한 첨병 역할을 하는 훌륭한 감정이므로 특별히 대접하고 받들어 모셔야 할 일이다.
뇌세포들이 충분히 많이 모여서 적절하게 상호작용하면 정신이라는 의식이 발생하듯이 신도 이와 같은 의식의 형태로 존재하는 게 아닐까 순전히 개인적으로 생각해 본다. 지구 안에 사는 다양한 생물 군상들은 저마다 뇌세포처럼 상호작용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개개의 단위들이 적절하게 상호작용하면 지구나 우주에서도 초유기체로서의 의식이 생겨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단, 이 의식으로 존재하는 신은 인간들의 단위 삶에 그리 크게 개입할 수는 없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그렇다면 신에게 가장 합당한 사람의 삶은 1000억개의 뇌세포가 그러하듯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해 사는 삶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과학책을 몹시도 싫어하는 나에게 이 책은 그나마 다행스럽게 심하게 어렵진 않았다. 물론 공부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해서 약간의 거부감도 들었지만 뇌에 대한 신비로운 세계를 새롭게 알게 되어서 대부분 흥미진진했다. 어느 내용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밑줄을 다 그어도 모자랄 정도로 놀라운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뇌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가끔씩 마음에 들지 않던 나의 행동과 감정도 뇌과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듯도 하다. 뇌가 작동하는 원리를 이해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내가 어떤 인간이 될지는 내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