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스as Jun 12. 2023

나르 남편을 연민할 수 있을 까요?

욕망과 공감 사이 도덕성의 중요성

인간 아이가 태어나 초기 보호자의 세심한 배려로 필요한 욕구를 제때에 잘 충족하고 그 과정에서 양육자와 적절한 상호관계가 이루어지면, 그 아이는 정서적으로 안정된 상태로 살아가면서 평생을 통해 삶의 단단한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그런데 이 정서, 감정이란 것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며 기능을 하고 있다. 만일 주양육자로 부터 감정에 대한 피드백을 적정한 때에 받지 못한 아이가 있다면, 인생 전반에 걸쳐 균형 있는 사회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힘들 것이다. 나는 네 살 때 세 살 터울의 막 태어난 동생의 우유를 자꾸 탐한다는 이유 그리고 젖을 떼야할 시기가 한참 지났는데도 늦게까지 먹는다는 이유로, 폭압적 훈육법을 선택한 아빠로부터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갖게 됐다.  후 제어할 수 없는 짜증과 울음이 표출되고 내면에는 불안과 공포가 끊임없이 일렁였으며 수면이 이루어지는 밤은 알 수 없는 괴기한 영상들이 펼쳐지는 지옥을 경험하게 됐다. 그 역행적인 불균형으로 반복적으로 잘못된 훈육을 택한 직접적 가해자가 된 아빠와 방치하며 간접적 가해자가 된 엄마는 그들의 행동으로 멈출 수 없이 폭주하는 짜증스러운 분노 섞인 울음을 어대는 어린 딸 사이에 이미 사랑의 간극이 생겼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 아이의 내면에 스멀거리는 분노와 혐오의 괴물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잊어버렸을까? 덮어뒀을까? 분명 자신들도 어린 때가 있었는데, 그 감정들을 다 놓쳐버린 것인가.


내면아이에 관한 치유서를 보면 하나같이 과거를 청산하기 위한 단계로 가해자와의 대면을 제안한다. 그리고 동시에 만일 가해부모가 인정하지 않을 것에 대한 충격받을 것을 예상하면, 고통을 조금 덜 수 있다고 조언한다.  그런 책을 접한 지 2~3년이 지나서 드디어 나도 용기를 내어 엄마한테 지난 아픔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그 원인은 나를 때린 아빠라고 고백하였다. 그래도 내심 위로와 용서를 받고 싶었던 나는 기대치 않게 격분하는 엄마의 모습에 화득짝 놀랬다. 가슴에 쿵 던지는 돌멩이를 직접 맞는 기분과 동시에 엄청난 배신감? 아! 그 똑같은 감정을 엄마도 느꼈으리라. 여하튼 엄마는 인정하지 못했고 오히려 나를 비난했다.


"언제 때렸다고 한데. 너희들은 이상하다. 그러믄 너는 앞으로 아빠 근처로 절대 이사 오면 안되겄다. 멀리 살아야제. 글고 별로 때리지도 않았는디도 그러네. 잊어브러야."

라는 매몰찬 말.

그래서 돌봄받지 못한 감정이란 악마 같다. 감정에 순간 휩싸이면 감정이 인격이 된다. 나와 다른 실체 그분이 등장하는 것이다. 늘 현재 진행 중인 감정을 표출한 것에 그렇게 거부를 받는 삶이 서른여섯 해. 그리고 지금은 십이 년이 더 지났지만, 엄마의 세월은 그렇게 고집스럽게 나에겐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은 상태로 흘렀다. 그리고 더 강력한 괴물, 남편 '나르'를 만나 전생에 무슨 죄를 졌길래 이런 고통을 주나, 지옥불에 떨어진 것 같았다.


가족 내에서 이루어지는 정신적 신체적 폭력을 어떻게 해석하고 대응해야 할까? 결혼 후 두 번째 이사한 앞 집에 나보다 열 살 전후로 더 나이가 있어 보이는 부부가 살았다. 다섯 번 정도 우연히 만났을까? 한 번은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앞 집 아저씨를 만나게 되어, 대화를 거부하는 남편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당시 지금 이사 온 곳으로 기 싫으니, 혹시 남편이 그런 얘기를 하면 호응하지 말아 주시라고 부탁을 했다.(4~5년전 신축 아파트만 계약해 놓으면 프리미엄이 불이나케 붙는 부동산 호황기였다. 그리고 어느날 남편이 마침 앞 집 아저씨도 새아파트를 해놨다고 자랑하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그분 입장으로 갑작스러운 요청에 내 요구에 설득이 어려울 것 같아, 내밀한  얘기를 드렸다. "사실은 남편이 며칠 전에 아이 앞에서 폭력을 행사했어요. 아 물론 처음이긴 한데. 여하튼 그런 사람이 아니긴 한데 미쳤나 아이 앞에서 했거든요. 그런데 저는 정말 이사 가기가 싫어요. 남편은 돈을 너무 안 쓰니까 거기로 이사 가면 교육적인 동선도 맞지 않아서 너무너무 두렵거든요. 부탁드릴게요. 남편이 남의 말만 들으니 너무 힘들어요. 대신 어떤 조언이라도 혹시 해주세요. 그런데 이사에 대한 호응은 말아주세요."라며 짧은 시간에 주절주절 나온 내용들은 멈출세 없이 굉장히 빠르게 나왔다. 아저씨는 당황하며 놀란 기색이었고 동시에 아! 알았다며 미안한 눈치였다. 그리고 또 우연히 며 칠이 지나 만나게 됐을 때는 반갑게 인사하고 지나가시더니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말씀하시길, "아이고, 걱정돼서 그러는데, 제가 사실 경찰이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뭘 해드릴 수가 없네요. 여하튼 한번 그러면 또 그럴 수 있으니까. 혹시 무슨 일 있으시면 신고해야 해요. 아셨죠?" "예?네... 네. 감사합니다."


왜 그런 걱정들이 너무도 고마운지. 난 그런 관심과 걱정들이 모두 다 사랑으로 느껴진다. 왜냐면 우리 부모님은 일생에서 한 번도 내 고민들에 수용해 준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인생들을 들어줄 멘토로 교수님을 찾아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즈음 교수님을 내 정신적인 부모님으로 설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욕망의 사전적 뜻은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 또는 그런 마음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감정에는 지적판단능력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감정의 격동>의 저자 마사누스바움은 "감정이 지적 측면을 전혀 갖지 않은 맹목적 힘"이라는 주장에 반대하고 있다. 이는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요소로 단순한 공감만으로는 문제의 합의에 도달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 연민이었을까?공감이었을까.




남편은 내 나이 서른두 살에 맞선 정보회사를 통해 두 번째 달에 소개받은 다섯 번째 사람이다. 이 전에 학사 편입을 준비하다가 만난 언니가 결혼정보회사에서 만난 사람과 결혼한 계기로 언니의 적극적인 권유에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나도 결혼을 성취했다. 사회적 시선으로 나이가 꽉 찼기 때문이기도하고 주변에서 들어오는 소개가 없었기에, 더불어 친언니의 적극적인 지지로 용기를 내어 가입하여 현남편을 빠르게 만나게된 인연이다. 그는 이력상 매우 젠틀한 요소를 가지고 있었고, 특이하게 아빠의 취미와도 공통점도 있었기에 마음적으로 패스라는 소리를 내며, 남자 쪽의 데이트신청에 허락하고 만난 것이다. 그가 기록한 특기사항은 바둑 1급인지 1단인가? 그랬다. 그리고 부동산 관련 자격증이 있었다. 그리고 연봉기재. 가장 중요한 직장 내역도 맘에 들었다. 나는 내로라할만한 직업이 아니었기에 처음 만나고 연이어 만날 때 마음속으로 다짐한 내면의 소리가 있다.

'당신에 비하면 가진 게 없어서 대신 결혼하게되면 불쌍한 네 동생한테 지지되는 조언이라도 해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 힘들지도 모르지만, 난 그렇게 박한 사람이 아니거든. 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받아주는 남들이 착하다고 하는 사람이잖아.'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가 자기 남동생은 사실 사회생활이 어려운 사람이고 남들이 말하면 알만한 사이비종교에 한때 빠져서 인생을 허비한 덕에 그렇게 됐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듣는 중 나는 괜찮아. 그건 네가 아니잖아 네 동생이 그렇다는 거잖아. 넌 정상이잖아.라고 이미 포용하고 있었다. 그 순간의 마음자리로 우리는 중간의 많은 다툼으로 파혼까지 이른 후 다시 만나 첫 만남에서 팔 개월 기간만에 재회하여 결혼한 케이스다. 그러나 단순한 공감은 사건을 지탱할 수 있는 뿌리가 약하다.




마사누스바움은 연민 인지적 요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연민의 인지적 요소 세 가지, 고통의 크기에 대한 판단 그리고 그런 일을 당해서는 안된다는 판단, 마지막으로 행복주의 판단, 이 세가지 요소는 세부적으로

크기_심각하게 나쁜 사건이 어떤 사람에게 일어났다는 사이즈.

부당성_이 사람이 이 고통을 자초한 것이 아니다. 의도성의 유무.

행복적 관점_이 사람 또는 생명체는 내가 세우고 있는 목표와 기획의 중요한 요소, 목적으로 그에게 좋은 일을 촉진해야 한다. 즉,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판단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도움을 주어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바라봄에 중요한 동기로 경탄을 포함하고 있다. (민달팽이나 모기에 대한 경탄이 없기에 연민하지 않는다는 예를 제시함)

<감정의 격동 2 연민>, 마사 누스바움, 새물결, 2015, 587p.




공감과 연민 그리고 동정


누스바움의 사고구조에서 나를 돌아보게 하는데, 당시 남편은 동생이 그런 경험으로 현재 남들이 보기에 좋은 상황이 아니더라도 뭐 동생 스스로가 행복하면 상관없지 않냐라고 스스로 정의를 내렸었다. 그렇다면 남편은 자기만의 삶의 기준을 정의하고 있고, 나는 당시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내심 조건을 걸었나 모른다. 객관적 능력이 부족한 대신 공감이라는 능력은 뛰어나다는 어필을 내세운 것이다.

따라서 나는 공감을 시작으로 연민의 단계로 확장할 마음이 있다며 다가갔지만 남편은 이미 내 삶을 기획적으로 정리했으니 됐다고 한 입장에서는 나의 관심은 그에게 동정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욱욱 거렸나 보다. 동정은 니체에 의하면 동정을 선사하는 사람에 의해 동정받는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선택적 주체성을 빼앗기 때문에 그 사람을 약하게 하는 도덕적 감정이라고 비난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남편은 어떤 감정의 흐름들이 잔잔하지 않고 한 번 휘어서 가는 변화구처럼 굽어져 있기 때문에 난 그의 상태에 닿는 것이 힘들어 계속해서 해석을 바탕으로 이해하려 노력해 왔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경제적으로 구속되어 독립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하며, 남편이 나를 선택한 이유가 바로 또 그것이다. '네가 바보기 때문에 곧 멍청하기 때문에 그리고 누가 잡은 물고기 밥을 주냐.' 라는 말들이 갖은 숨은 의미였다. 결혼 초에는 자신의 의미를 꿍꿍 감추고 대화를 차단했기 때문에 알아가는데 정확히 15년이 걸렸다. 그리고 적응해 가는 데는 또 여전히 앞날은 막막하긴 하다. 감정을 읽어 내는 일부터 막히면 그 다음은 아무것도 조화롭지 않게 된다. 우리 아빠가 내 울음소리를 너무도 듣기 싫어해서 폭력을 휘둘렀던 것처럼. 우리의 만남이 어찌 되어 엮였든 중요한 다음 단계는 그 실행의 단계로 관계를 조화롭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도덕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르의 비도덕적 언어들은 심장을 겨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