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양육자에게서 독립되지 못 한 자녀는 그 부모로부터 어디까지 조종받고 그 삶이 조작될 수 있을까요?
파혼(만남후 3개월후)-재회(1.5개월 후)-결혼(첫 만남후 8개월 만에)상황: 파혼하겠다는 여성의 의사에 반(反)한 재결합을 위한 부모와 나르의 밀회로 조작. 결혼 5년 후 그 사실은 고백 받음.여성은 도덕적 반성에의한 재회로 착각하여 결혼을 결심, 남성은 가책을 전가하기위한 가학적ㆍ악질적ㆍ의도적 원한복수(악성기질)
_트라우마를 겪는 여성이 이중적성향, 반사회적 강성의 나르를 만나면(가스라이팅 기법_위선과 위협_인식의 어려움, 타인이 보이지않은 곳에서 행해지는 곳 가정은 또 다른 밀폐공간이 된다.)
여성의 보수성ㆍ수동ㆍ의존성 원인_강압적 양육. 유아기때 반복적 신체 언어적 폭행. 편애와 무관심.(주감정 두려움. 불안)
남성의 악성나르 원인_비상식적 종교관에서 오는 가정개념ㆍ시아버지의 역사ㆍ집안적 트라우마의 대물림, 태생적 불안ㆍ왜곡된 사고ㆍ세뇌형 강압적 육아라고 파악함.(주감정 불안. 수치심. 공포)
양가 구성원의 특징
ㆍ저의 결혼은 자격지심이 심한 아빠와 수치심이 심한 엄마에 의해 조작되었습니다.
ㆍ나르 남편은 대한민국 역사적 시대의 태생적 구도속에서 자라온 운명, 자신의 아부지에 의해 조종되었습니다.
위 내용은 제가 살면서 느끼고 체험하여 분석한 내용을 기초로 나르가족이 자녀에게 미칠 수 있는 삶의 부정적인 영향과 그 원인들에 대해 개인적으로 정리한 것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나르성향을 가진 사람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고서는 그 강력한 부정성을 전혀 알 수없습니다. 저의 경우는 매우 특수하고 복합적인 것들이 연결돼 있어 남의 사정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 일부의 특수적 상황에 빠지신 분들에게 큰 힘이 되시길 바라며. 또 그 비슷한 상황에 처한 분들에게는 부분적으로 힌트를 얻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의 저는 결혼 초기 상태처럼, 그렇게 위태롭다고 느끼고 있지 않습니다. 오래된 저 개인의 사고와 필요한 이론적 확인을 통해 확신을 가진 것에 대해서만 언급하였고 할 것입니다.
트라우마: 사건기억과 당시겪은 강력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동반, 비제어적, 기억과 정서가 수시로 활성화됨
1세 불안_섬광기억ㆍ사진기플래쉬
4세 공포ㆍ분노_망치로 깨뜨린 젖병의 파편_비디오 액션형 기억
5~6세 불안ㆍ수치심_ 아빠의 화장실사용 목격기억ㆍ이불에 오줌을 실수 한 체벌로 키를 씌우고 시골 동네 한 바퀴 돌게한 기억.
7세의 공포ㆍ두려움ㆍ분노ㆍ혐오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울음에 의한 아빠의 무작위 수차례 폭력학대기억
특정시기 유아기의 내면의 사고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유아기는 아이가 해석의 능력이 없기에 불안. 고통. 두려움이 수 천배로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거나 잠복되어 성인기에 폭주할 수 있습니다
나르남편의 언행 관찰을 통한 트라우마 추측ㆍ언행기록
트라우마 인가 vs 의도 인가
ㆍ직접적 의견ㆍ심리를 감추는 언어술에 능통_패턴읽기
편부_그때 그때 변함ㆍ논리ㆍ주장형으로 혼돈을 줌
ㆍ어려서 '혁대로 맞은 폭력'적 체벌_그는 단순 체벌로 인식
동생의 실수에 대한 것도 대신 체벌받음.
ㆍ강압적인 종교 입회 심리적 강제ㆍ강요. 압박. 무의식적 위협
_'너때문에 빨리 돌아가시면...'
ㆍ정보성 미디어ㆍ책 노출을 제어 ㆍ 금기 받음
_'쓰레기 같은 책 버려, 수준도 낮은 것들이 책만 많아가지고.'
ㆍ역사관. 민족관. 종교관. 정치관이 비 보편적
_그래서 스스로 우월하다는 세뇌_'우리 아부지ㆍ동생ㆍ나도 아이큐 130넘어. 우월인자라고.'
ㆍ자기 형제 3 자매 중 유일하게 가정을 가짐
_첫 애 8개월때,시누이에게 남동생의 학대성 언어를 질타해줄 것을 새벽 1시 도움요청시 '나도 대화가 안되거든. 서로 안맞으면 그냥, 이혼 하는게 맞지 않아?'타박.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비인간적, 비틀어진 종교관때문으로 파악.
그종교는 90년대까지 결혼을 반대한 곳이자 남ㆍ녀 예배장소가 분리되며 돼지음식을 매우 금기시한다 함.
_야 이러는데도 너랑계속 만나야되냐. 니 생각대로 할테니까. 파혼하고 싶으면 니가먼저 말해. 니가 하자는대로 할게 그건 배려할테니, 먼저 말한 사람이 손해야.
(청첩장을 이미 돌린 후에 혼수ㆍ예단 등 자신의 기준과 맞지않다며 말을 바꾸면서 위협_가구대신 목돈. 결혼식은 형식이니 제외. 한복 취소 등을 요구하며 혼인취소하려면"네가 먼저 파혼선언할 것"을 요구,그것이 자신의 배려라면서 언어 농단,이에 나는 당시 도덕을 벗어나있고 의도성이 있는것으로 혼인빙자간음죄임을 주장함)
언어 형태'그래 해~.'처음은 쉽고 빠르게 yes 이후엔 '내가 언제?'서서히 다양한논리를 대며 말을 바꿈,
특히 나의 말들을 비하ㆍ비난하며 동시에 타인의 말들을 인용
이득이 될 때만 돌변. 기회주의적ㆍ회피성ㆍ악질형
과도한 언어적 폭행ㆍ위협 도구와 가상의 생활비
이리와 도끼로 찍어블게
_발ㆍ냉기 증상시 임신 초기4~5개월
골프채로 네 대가리라 생각하고 퍽퍽치고 싶다
-최근까지도 2~3년 전 거실에서 퍼팅연습시
낌새는 있으나, 모든 것이 알아차림 없이 진행된 이유
자가진단_어린아이 트라우마 탓+가족의 구조적 프레임에 얽힘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다음 글귀는 어린아이의 창조성ㆍ긍정성ㆍ자연 치유력에 감탄한 니체의 글로,장점이자 단점은 아이의 근본적 특징은 순수하다는 것이다.
인간발달의 세 단계를 말했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단계를 말한다. 니체는 누구나 어린아이의 시절이 있었고 그 어린아이의 거룩한 긍정, 가르침없이도 본능처럼 가지고 있던 그 힘에 대해 주목한다. 니체는 온갖 갈망으로 힘들어하는 우리에게 잃어버린 자아를 찾기보다는 본래 가지고 있던 힘, 태초의 자기가 되라고 말한다. "어린아이는 순수이고 망각이며,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돌아가는 수레바퀴, 최초의 운동, 성스러운 긍정이다. 그렇다. 나의 형제들이여, 창조하는 놀이를 위해서는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
(이는 어린아이의 나이적 수준이 아닌 그 고유한 특성을 말한 것이다.)
※ 나의 트라우마는 초기유ㆍ아동단계인 1세부터 7세까지 기록해두었다. 트라우마는 성인이 되고서도 그 사건이 일어났던 때로 초각성되는 특성에 머물러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방향
전 처음부터 이혼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상태의 가치와 세계관을 갖고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함께 살아가는 동안 그가 변할 거라는 기대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저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기획하는 일과 연결돼 있기에 그렇습니다.
양가의 부모의 공통점
자녀의 관점을 배제. 무시한 체 자신들의 시점으로 방향을 의견 조율 없이 끊임없이 부당한 간섭
_너는 부족하다는 메시지(성장을 인정하지 않음)
나르에 관한 이론적 도서는 많으나 한 사람의 일생전체를 기획한 책은 매우 드물기 때문에 제 사례를 통해 깊은 이해를 돕고자 기획합니다. 이런 상황이 아니신 분은 막장 드라마 보는 느낌으로 보시면 어떨까요? 읽으시는 것만으로도 지혜에 보탬이 되실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어떠한 사항을 비방. 모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나 오해하시는 분이 있을까 염려되어 언급합니다. 내 가치를 세우고 실행하면서 한 사람으로 독립되어 존엄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무례한 침해가 계속되는 것은 심각한 폭행 그 자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아버지를 비방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 어떠한 행위들이 왜 감정을 건드려서 서로 혐오하게 되는지 왜 서로 엉켜 비인간적 비민주적으로 되어가는지 짚고 교정하며 성장하길 원합니다. 중간중간에 올라오는 부정적인. 때론 거친 감정들은 모두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인식하여 서로에게 존엄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난 결혼하기 전에 시아버지 되실 분을 딱 한 번 뵈었다. 남편 될 사람의 차를 타고 가는 중 집 근처에 지나가시는 시아버지를 우연히 만나 뵈어 인사드리고, 상견례 때 두 번째 뵙고 결혼했다. 그리고 결혼 생활 사 개월째부터는 매주 주말에 불시에 뵙게 되고 아버님이 삼 개월에 한 번씩 신혼집에서 교회행사 가신다는 거쳐로 신혼집에 오셔서 주무시는 용도로 3-4년을 찾아오셨다. 내가 시아버지에 대한 악몽을 꾸고 남편과의 관계가 더욱더 나빠지면서 7년 차부터 서서히 안 오시게 되었다.
결혼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
우리가 파혼한 후 재회하여 결혼해서 못마땅해 그러신지 훈육방식으로 관리ㆍ통제하기위한 것으로 인식
_결혼 초 3년 간 벨을 누르지 않고 오시면서, 신발을 벗자마자 늘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초기 신혼집)
이사된 장소가 바뀌면 태도가 바뀐다
"잘 있었냐? 결혼해 줘서 고맙다이?"
"네. 아버님 오셨어요.(웃음 짓는다.)
매주 한주도 빠지지 않고 오시면서 늘 하시는 말씀이 이상했지만, 파혼 후 결혼해서 걱정되어 그러신가 보다 했다. 위의 인사말은 3년을 지속했다." 그런데 저 말이 왜 모순적으로 느껴졌을까_매주 반복 주기적 끈질김. 귀아플 정도. 레파토리
먼저, 절대 아버님은 직접 벨을 누르지 않으셨다.
둘째, 오실 때는 늘 도련님을 데리고 오셨다.
셋째, 매주 교회 행사가 끝나는 시간 1~2시에 오셨기 때문에 식사를 하셨는데. 하시는 언어의 첫 느낌은 매우 불쾌하며 의아스럽다.
'아부지'의 노련한 심리 통제력에서 오는 효과와 느낌
_타인의 언어를 인용해 자신의 생각을 간접적으로 어필한다
_자신의 비판적 의견을 간접적으로 전달하면서
_더욱 강한 기대와 통제로 강요하는 효과.
_반복적인 언어를 일방적으로 지속적으로 함으로써 상대의 의사는 무시한 채 조종하고자 하는 욕망을 느낌
"며늘아 결혼해 줘서 고맙다이, 우리 대주는 거 온달왕자같이, 며늘아는 평강공주같이 둘이 그케 잘 살아라이. 그. 저기, 거기 거 고모할머니 있자. 거 할머니가 우리 며늘아 사진을 보고는 어째 고집스럽게 생겼다 해야. 어째 사진이 그런가... 그러셔야. 그...걱정스럽다한디, 며늘아 안 그러제? 며늘아 양반 맞제이? 우리 집안에 대하면 어디 댈 수도 없제. 그 ooo 씨는 알아주는 양반인디. 양반인게 점잖게 그케 살믄 되제. 그래, 점잖게. 그케 살아라이?아이고 결혼해 줘서 고맙다. 하하."
패턴
상대를 칭찬 한 후, 타인의 언어를 빌어, 의중을 떠 본 후, 걱정스러운 뉘앙스로 신분을 격상하면서 그렇지 않은 경우 매우 걱정스럽다는 것으로 자신의 조언을 듣지 않을 경우 너의 집안 전체가 격이 떨어진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사실은 매우 불쾌함. 잘 포장된 비난이다.
"허허 진수성찬이다. 니 누나도 왔으면 좋았겠네." 하시며 한참을 이런저런 인사 말씀을 하시다. 식사하실 때는 한결같이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아버님이 드시지 않은 대표적인 서민음식
"고등어는 예전에 대표적인 서민음식이제." 나는 남편의 당부로 절대 돼지는 하지 말 것, 채소 위주로 차릴 것, 쇠고기도 하지 말 것 등의 잔소리를 많이 듣고 차린 상황이라. 아버님의 반응은 참 모순적이었다. 그래서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가 차린 음식은, 쇠고기 미역국, 김치, 호박전, 고등어구이, 그리고 쇠고기 장조림, 여타 밑반찬으로 지금은 특별히 기억나질 않으나 5가지 정도 되는 반찬이다. 아버님 말씀이 이해하기 힘들어서 자세히 지켜본 결과 아버님은 고등어를 잘 드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쇠고기는 조금씩 드셨지만 늘 많이 남았다.
제국주의 찬양은 갇힌 곳에서만주기적 반복적 주입의 의도
다음 레파토리는 남편하고 늘 일본 천황이야기, 중국역사 이야기가 끝나면 아버님이 다니시는 교회이야기였다. 그리고 집에 계시는 2-3시간 동안 하염없이 남편 하고 이야기를 떠시고는 시골집으로 가셨다. 그러면 늦으면 2시경에 오셔서 시골까지 모셔다 드리면 5~6시가 되고 주말은 애매하게 통으로 날아갔다. 그렇게 매주 오시니, 토요일 일요일엔 아무 곳도 갈 수가 없었다. 어떤 주말은 오시지 않은 날엔 가까운 공원에나 갈라치면 느닷없이 3시경에 "우리 강아지냐? 어디냐. 지금 너희 아파트 앞인디? 현관문을 어떻게 여냐?"라는 호출해 오실 때가 많으셨는데, 남편은 30-40분을 외지로 주행하다가도 모처럼의 외출은 없던 일로 하고, 느닷없이 없던 일로 하고 주인이 부르면 따라가는 똥개처럼 바로 집으로 유턴하는 날이 계속됐다. 그러고선 시골에 데려다 드릴 때도 임신 중인 나를 5년 동안 꼭 같이 가야 한다며 앓은 소리를 하면서 설득해 대고 신경전을 벌이다가 어쩔 수 없이 나도 같이 차에 탈세면, 달리는 차 안에 갇혀서 말도 안 되는 왜곡된 역사관을 들어야만 했다.
아버님은 당시 71세(지금은 86세)셨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박정희 정권 등등 을 모두 겪으신 역사의 한 축을 사신 분이다. 나르남편과는 신혼 초 맞벌이를 5년을 한 상황이었기에 주말에 난데없이 들이닥치는 아버님 때문에 어디도 못 가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집회사 집회사를 오일을 하다가 토요일은 남편 혼자 어딜 놀러 다니고 일요일이면 시아버지가 오시고 이 답답한 삶을 5년을 넘게 살게 되었다. 그리고 급기야 7년 차 둘째애가 네 살이 되면서 서서히 움직일 수 있게 되면서 지옥 같은 삶을 탈출해 자유인이 되고 싶었다. 너무나 간절했다.
아버님이 오시기 전까지 5일간은 나르의 반복적 가스라이팅
나르는 꼭 로봇같이 10시 20분이 되면 잠을 자러 갔고. 결혼 4개월째부터 예고 없이 아버님이 매주 오시면서 지금 보면, 나에게 가스라이팅을 하염없이 하고 꼭 늙은 시엄시 같이 설거지해라 빨래해라만 미친 듯이 해댔다. 그리고 다른 말은 없었다. 당시 나는 형제들과 인터넷 업체를 운영하고 있었기에 열심히 일했고 8시경에 업무가 끝나면 친정에서 밥을 먹고 회사하고 1시간 거리가 신혼집에 가기까진 10시 반이나 11시에 도착하는 구조였다. 그래서 남편이 늘 하는 말은
결혼을 사기당했다는 나르의 주장
_일반적으로 임신한 부인이 늦게 집에 오면 걱정하지 않나
"사기당했다니까. 너 내 돈 보고 결혼했지, 사실 너도 조건 보고 한 거잖아.너같이 능력도 없는 애가 어딨냐? 돈도 못 벌면서 왜 나 혼자 사는 거 같지?"라는 불평들과 비난들이 끊이지 않았다. 왜 그랬겠는가? 신혼이 삼 개월뿐이었기에 난 답답해 죽는 꼴이었다. 그리고 허니문 베이비를 갖아 난 임신 초기 3개월이 지났다. 그런데 주말엔 시아버지 이상한 일본찬양 괴담을 들어야 했고, 주말엔 서민음식평 노래에, 결혼해 줘서 고맙다는 그루밍 버전의 말씀의 이상한 말들... 그런데 한 번도 벨을 누르지 않으시고 본인이 진수성찬이라면서도 예전에 대표적인 서민음식이라고 했던 반찬은 입에 대지도 않으셨던 등등 알 수 없는 모순들 때문에 태교에 좋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삼겹살은 절대 못 먹게 했다.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그 말을 듣기까지는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엔 아버진 위 수술을 하셨고, 고기는 암에 걸릴 위험이 있으시니 고기를 피하신다. '아부지' 는 원래 고기를 엄청 좋아하시는데 돼지는 싫어하신다, 쇠고기만 드시지만 지금은 쇠고기도 위암수술 후로는 소화가 어렵기 때문에 안 드신다고 남편은 말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음식은 나물이나 김치류 그리고 달걀, 멸치 등? 뭐 그런 종류였지만. 신혼 초부터 남편의 무례한 언행으로 우린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임신 중 3-4시간씩 새로 음식을 하더라도 가짓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입덧 시기 중 지속된 시댁 식구들의 익숙하지 않은 몰골과 냄새
나는 모든지 연속된 긴장이었다. 아버님이 주말에 오시는 게 너무 불편했고, 음식은 처음이라 너무 긴장됐고, 아버님이 오시기까지 1-2시까지 밥을 안 먹고 기다려야 했고. 아버님이 오실 때는 지독한 냄새가 났다. 온몸에서 오래된 찌든 냄새, 땀냄새, 쉰 냄새, 일명 홀아비 냄새 등 그리고 같이 오는 도련님은 양말이 축축하여 거실로 들어오는데 발자국이 남겨질 정도로 그렇게 이곳저곳을 배회하다 보면 그 냄새는 적어도 3일은 지속되고 한번 차에 타시면 1주일은 갔다. 난 초기에 임신 중이었기에 늘 비위가 상하고 여차 안 좋은 불편한 생각이라도 하면 곧 구역질을 할 뻔할 때 마음을 진정시키고 열심히 참느라 긴장도가 상당했다.
남편의 심리조종술? 가스라이팅 도구는 오로지 돈. 생활비 50만 원
왜 나는 남편을 따라다녀야 했을까? 나의 심리는 결혼 초이기에 늘 함께 하고 싶었지만, 일을 마치고 집에 가면 그는 늘 자고 있었다. 그렇게 오일이 지나면 토요일은 남편은 친구랑 놀러 다니고 5시경에 집에 왔다. 일요일엔 시아버지가 2시부터 오셔서 5시까지 우리 시간을 빼앗는 삶이 3년이 연달아 계속되어 답답한데 태교에 신경 쓰느라 그 분노를 어디에 표출할 데가 없어서 늘 친정에서 하소연을 매일같이 했다. 남편은 돼지고기 혐오증이 있어 냄새나니 니 혼자 처먹어라. 네 친구랑 먹음 되잖아 니 식구들이랑 먹던지라는 말을 연발하여 마음이 팍팍하여 속으로 들끓는 분노와 불안을 정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버님의 귀 닫기 능구렁이 기술
_너는 짖어라 나는 내 할 일을 한다는 행태는 '나르'와 같다.
아버님의 30년대 그리고 40년대 그리고 50년대 또 70년대 박정희 시대까지 그 독한 세월로 많이 왜곡된 삶을 살았으리라 나름 이해되지만 다음의 상황은 너무도 알기 어려웠다. 아버님도 한번 뱉은 말은 남편하고 어쩜 그리 똑같은 지 1년이고 2년이고 3년이고 계속 반복해서 말하는 지독함이 있었고. 물론 벨을 누르지 않은 것도 현관에서 직접적으로 말씀드릴 차면 '아버님 오실 때 벨~'하는 차에 늘 능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아이고 우리 손녀 oo 잘 있었냐?" 하시며 상황을 회피하셨다. 우린 오시기 전부터 매일 싸우는 상황이라 더 이상 대응하지 않고 답답하게 내 의사는 밀리면서 억눌리며 지나가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권력통제력언술: 타인의 언어를 빌어 간접사용에매우능숙
결혼 4개월째부터 계속되는 말씀
늘 신발을 벗자마자, 바로 보이는 작은 방으로 자연스럽게 쑥 들어가시면서 3주간 반복되는 바로 그 문장
"아가야, 우리 대주님이랑 여기 와바라. 할 말이 있다. 이제 둘이 결혼도 했고 행복하게 잘 살아라이. 남편은 거 바보온달, 며늘아는 평강 공주처럼 그렇게 잘 살아라. 그리고 우리 며늘아는 양반맞제? 진짜 양반이제? ooo 씨는 엄청 큰 양반 댁인디 우리 집안은 대지도 못하제, 근디 거 저번에 거 고모할머니 있자? 거기 할머니가 우리 며늘아 사진을 보고는 어째 고집스럽게 생겼다 해야 어째 사진이 그런가 그러셔야. 걱정스럽다한디, 며늘아 안 그러제? 양반인게 점잖게 그케 살믄 되제. 그래, 점잖게. 그케 살아라이?아이고 결혼해 줘서 고맙다. 하하."
매주 한번씩 오셔서 저 얘기를 3주 연속하시고는 도대체 이해가 안 가 남편에게 물었다.
"아니 자기 아빠는 왜 그러셔. 왜 자꾸 양반 얘기하는 거야. 지금 양반하고 무슨 상관인데 이런 시대에?"
"그럼 무슨 말하냐. 그것밖에 네가 볼 것이 없다는 거지."
나르가 생각하는 부부란 1:1 부담,계산이 주는 잔인성
그가 늘 주장한 것은 너는 집을 살 때 돈 한 푼 대지 않았기 때문에 생활비 일정금액만 부담할 것이고 그 금액은 애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25만 원이 적당 하다였다. "궁궐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줄 알아야지." 그의 언어들은 너무 생소해서 대꾸할 가치도 없었다. 그냥 어안이 벙벙한 신혼이 정신없이 흘렀다. 그래서 그 부분을 가지고 오랫동안 싸워, 들쑥날쑥 계좌에 넣다뺐다하는 생활비 50만 원만 7년을 받았다. 남편 회사에서 받는 복지카드가 있는지는 1년이 지나서야 알게 됐지만 그 내역을 본 적이 없다. 심지어 3개월에 한 번 들어온다는 양육비조차 받아본 적이 없다. 남편의 회사 직원부부들 모임에서 우연히 주워 들어 알게 된 사항이다. 또한 결혼 생활 첫 3년만 계좌를 열람했을 뿐 그것조차 숨기고 싶어 하는 남편 때문에 공인인증서를 6개월 또는 3개월에 한 번씩 바꾸는 바람에 싸우느라 정신없이 시간이 지났다.
나르가 주로 사용하는 세뇌용 레파토리
시어머니형 언어체빙의
여하튼 나는 보이지 않은 시어머니한테 구박받으며, 부인으로서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언어체로 혼란스러움에 실랑이하며 6년의 세월이 지냈다. 결혼하자마자 어차피 주말 없는 인생 3년은 같이하다 도저히 스트레스받아 너하고는 못살겠다며 4년째부터 6년째까지는 외지로 발령받아 남편은 3달에 한번 집에 왔다. 난 그 시절이 꿀같았다. 아이랑 어떠한 간섭 없이 새벽 늦게 까지 책육아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남편이 다시 발령내서 7년째엔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때부터 다시 독백형 시엄시 버전이 지속되어 또 온갖 트라우마와 스트레스가 불거지고 지속되었다.
나르가 주도권 안에 넣기 위해 주기적인 간섭과 방해를 통한 괴롭힘의유형은 레파토리 형식의 세뇌 주입의도
그리고 그는 뉴스나 책을 매우 싫어한 탓에 둘째 아이는 책 육아를 할 때는 나르가 이 방 저 방 따라다니면서 소리치며 문을 두드리며, 쓰레기 같은 책 그만 보여줘라, 시간 낭비하지 마라. 아이 가지고 인생 시험하냐. 잘못된 육아 해서 아이 망치려드냐 돈이나 벌어라. 너같이 능력 없는 여자 첨 봤다. 그럴 거면 베트남 여자랑 결혼하는 건데라는 레파토리가 다시 시작됐다.
이상은 나르시댁집안사람들의 행태들이었다.
나르가 그렇게 존경하는 '아부지'가 한 일
나르는 자신이 유일한 답을 가지고 자신이 누구보다 우월하다는 프레임을 아주 지속적으로 만들어 댄다.
아버님은 매주 와서는 밥상머리에서 일제 얘기를 통해 일제 식민사관은 반드시 시골 가는 달리는 차 안에서 40분을 주입하기 위한 듯 설교한다. 남편은 "그렇죠 네. 네."라고 계속 추임새를 두면서 혐오스러운 얘기를 지속하게 한다. 주요 내용은 우리 민족은 모래알이다. 일본 천황은 영웅이다라는 일설이다. 그 구역질 나는 두 사람의 정신들을 갇힌 차 안에서 임신 중인 나는 들어야 하며, 동시에 풍겨오는 쉰내와 찌든 내, 땀내의 뒤섞인 냄새 때문에 여차하면 구토와 입덧으로 속이 뒤숭숭해지는 상황을 왜 견뎌야 했나 다시 이해하기 힘들지만. 당시의 나의 내면은 트라우마를 겪은 내면아이상태였다.
나르의 쓰리쿠션 가스라이팅
남편은 늘 나를 위협한답시고
"너 같은 며느리가 어딨냐. 네가 뭔데 우리 아부지 보고 벨을 누르라 마라야. 왜 너만 생각하냐. 내가 시골에 데려다 드리는데 부부니까 같이 가야지. 너 같은 며느리가 어딨 어?"
계속되는 반박에 그는 또 다른 추가적인 이차 위협을 가한다.
"앞으로 생활비 안 줄 테니 알아서 해. 너는 집에 돈도 안 보태고 네가 하는 게 뭐야. 너 때문에 우리 살라고 아버지가 나가셨는데. 분가하셨다고. 배려하는지도 모르냐? 너같이 편한 며느리가 어딨다고. 배가 부른가 본데 시골에 같이 안 가면 50만 원 안 줘. 공인인증서 바꿀 거니까."라는 말들 뿐
나와 다른 마음 나르는 모를 걸
난 걍 어이없어서 시골에 간 거다. 내가 그 50만 원이 무서워서 간 게 아니고 난 신혼이기 때문에 같이 있고 싶은 마음 하나로.
그냥 그의 말이 불쏘시개이기 때문에 얼토당토 하지 않기 때문에 실랑이하다가 답도 없는 말싸움, 의미 없는 말싸움이니, 내 마음 하나 알아달라는 그 심정하나로 시골에 같이 간 것이다.
하지만 나르는 그렇게 판단하지 않는다. "너는 역시 천 원짜리라니까. 천원도 아까워. 수준도 낮은 것이, "라는 말을 자주 하면서 사실은 자기 세뇌를 하고 있는 것이다. 타당한 말이 아니기 때문에 억지를 쑤셔 넣는 것. 억지가 스스로도 인정이 잘 되지 않는지 수없이 되뇐 말들일 것, 그 이상하게 반대적 성향은 내가 해석하는 틀, 그리고 그가 이 구조를 지키기 위해 억지를 부리는 틀은 그렇게 맞물려 있었다. 그 구조의 근간에 '아버지'의 말놀이가 그의 내면을 조종하고 있었다. 그렇게 근 50년을 넘게 아들을 조종하고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