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네. 자기나 배려해! 그럼 며느리 집에 오실 때 벨 누르시면 되는데 왜 안 누르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자기가 좀 말해주면 되잖아 왜 말 안 하는데?"
"야! 어른이 아들 집 오는데 누가 벨을 누르냐? 너희 부모님은 벨 누르시냐?"
"당연하지 결혼했으니 벨 누르지 누가 비밀번호 누르고 오냐고. 그리고 벨 누르시라고 말씀드리면 되지. 나는 말씀 못 드리겠으니 자기가 그럼 말해!"
"야 됐고. 그만해. 시골사시는 분이라 다 그러신다 생각하는 머리가 있어야지. 왜 너만 생각하냐. 감히 너 따위가 행여나 아부지한테 그런 소리하지 마 내가 가만 안 있을 테니까."
"어이없네 미쳤는가? 그럼 계속 맘대로 오신다고?"
저 싸움은 7년은 계속 됐다. 내가 대학원을 가기로 결심한 시점부터 서서히 달라졌다. 뭘까? 왜 상대의 의사들을 무시할까? 나르시시스트의 대화에는 회색돌 기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들은 모든 관점이 자신을 중점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대화자체가 되질 않는다. 따라서 대화를 하겠다는 마음을 갖은 사람은 심장이 아파올 것이다. 그 예방법으로 너는 말해 나는 내 말을 한다는 자세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결혼할 때 하는 말 있지 않나. 사랑하니까 한다. 너랑 있고 싶어서 한다는 흔한 말. 그 말을 왜 하지 않는지? 그런데 그 말없이 결혼은 한다는 저 마음자리는 뭘까?라는 생각이 뱅뱅뱅 돌 뿐 알 수 없었지만. 인간이 원래 복잡한 거잖아 여자를 처음 만나본 사람인가 보다. 자기 마음을 잘 모르나보다라고 정리했다.
그의 중요한 테스트란
그렇게 삼겹살로 싸우고, 애매한 말로 퉁치고, 날짜를 정확히 안 잡은 애매한 결정장애구나.라고 생각하고 혼인 날짜는 내가 추진하여 잡게 됐고. 결정적인 이상한 날
"나 정말 중요한 할 말이 있거든 꼭, 잘 말해야 돼. 오늘 만나자."
"어? 뭔데? 그냥 전화로 해."
"아니 뭐 그 테스트 같은 건데 만나서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오늘 만나서 잘 말해야 돼. 중요한 거거든."
'응."
집 앞 호프집에서 9시경에 만났다.
"뭔데?"
"결혼하기 전에 물어볼 게 있어. 중요한 거야. 아니 그런데 그냥 테스트 같은 거야."
"응 뭐야? 뭔 테스트?"
"음... 결혼하면 우리 아부지랑 살아야 돼. 안 그럼 결혼 못해. 그게 테스트야. 자 잘 말해."
"뭐라고? 그게 무슨 테스트야. 그게 질문인가?"
"응. 그냥 테스트야."
"뭔 소리. 그게 뭔 소린데? 그게 그렇게 중요하면 왜 그걸 인제 말해?"
그리고 그는 박근혜의 눈물 같은 느낌과 똑같은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당시에도 느낄 수 있었다. 박근혜가 퇴진한 이후 그 눈물이 어떤 의미인지 많이 회자된 일과 정확히 겹쳐있다. 국정농단이라는 위선이라는 표현들. 그의 눈물도 표정은 없는데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나왔던 그 순간. 처음 보는 현상? 표현하기 어려운. 그의 눈물은 2007년 7월 경 내 평생 처음 보는 장면이라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난 그 이상한 테스트, 말 같지도 않은 것에 반응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그냥 자기가 장남이라는 한탄 같은 뭐 그런 거? 그냥 조금 안쓰럽다고 할까?
"왜 그래? 울지 마."
"그래. 이제 가자."
엉? 뭔가 두루뭉술하게 지나가는 것 같이 그냥 그렇네? 하고 그날이 지나갔다. 뭘 테스트한다는 건지... 하고 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 테스트는 뭐고? 결국 이 테스트의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굉장히 찜찜하고 어이없는 소리로 날 놀리는 듯한 생각들이 혼수를 하는 와중에 붉어지고 삼겹살 건 등으로 찝찝함을 정리할 수 없어 누적된 마음들이 내게 두려움과 공포를 줬다. 마치 어두운 동굴이 코앞에 있는데, 그게 내 결혼생활의 입구라고 알려주는 것처럼 내 의식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혼 2-3주 전 난 파혼을 선언했다. 사실은 뒤숭숭한 내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서 남편 된 그 사람의 친구들을 소개받는 자리에서 "그런데 오빠는 돈을 너무 안 써요. 걱정돼요."라는 둥 불만과 고민을 토로한 이유로 모임이 끝난 후 집에 갈 10시 즈음 그가 내 블라우스 예복의 옷깃을 잡고, 소위 멱살을 잡은 것, 옷깃이 찢기는 소리가 날 정도의 힘으로 날 위협하면서.
"너 혼자가. 내 친구들 앞에서 어떻게 쪽을 주냐. 그리고 10시밖에 안 됐는데 너를 내가 왜 데려다줘야 돼. 너 때문에 내 친구 다 잃게 생겼어."
"뭐? 무슨 소리야. 어두운데 자기가 데려다줘야지."
"야. 너 때문에 내 친구 잃게 생겼다고. 너 혼자가."
하고 가버린 그의 어이없는 태도로 난 파혼을 선언한 것이다.
파혼의 이유는 그동안 누적되어 온 찜찜함의 느낌들이 멱살의 사건으로 종료됐다. 그런데 우린 1개월 반 만에 다시 재회하여 만난 지 8개월 만에 결혼했다.
"아... 아부지.. 비번 xxxxxx예요."
그리고 지옥 같은 감시사회가 펼쳐졌다. 그는 자기 '아부지' 앞에서 한마디도 못하는 꼭두각시 같았다. 그리고 내겐 이렇게 정당화했다.
"너 때문에 우리 아부지까지 잃을 수 없어. 우리 엄마가 그렇게 빨리 돌아가셨는데. 감히 우리 아버지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네가 뭔데 벨을 누르라 그래?"
그렇게 시아버지는 5년을 매주 토요일, 어쩔 땐 금요일부터 아무때나 급작스럽게 비번을 누르고 우리 집에 오셨다. 어느 날 주말은 나들이를 가는 중 전화를 받으면 남편은 늘 유턴하여 집에 다시 갔다. 그렇게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매주 오시면서 절대 벨은 누르지 않겠다는 사람처럼, 비번을 바꾸는 날엔 집 앞 현관 앞에서 꼭 집안에 있는 자기 아들에게 직접 전화를 했다.
"oo야 어째 이상해야, 비번이 안 맞네? 비번이 뭐냐?"
"아... 아부지..요즘 며느리가 다 그러죠 뭐, 비번은xxxxxx예요."
미쳤나. 개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와, 5년을 넘게 싸웠다.
진정한 배려란 무엇인가. 그 근간의 도덕성이란
배려가 무기가 되는 순간들 어떻게 해야 순리대로 흘러갈까? 배려가 그런 것이었는가? 나의 편의를 위해 상대의 상황쯤은 깡그리 무시해도 괜찮을 정도의 위계적인 것?이라는 느낌이었나? 장유유서는 배려의 관점인가? 뭐지? 그가 배려할 줄 알아야지. 너 같은 며느리가 어디 있냐라는 말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나는 그곳에서 회피하고 싶지 않았다. 친구는 야 비번을 바꿔버려.라고 수없이 말했지만 나야말로 그들이 스스로 자중하길 바라며 배려차원에서 나는 남편이 아버지를 신경 쓰는 마음을 존중하는 마음에 배려차원에서 3년간 비번을 바꾸지 안았고 바꾸질 못했다. 그러나 악몽이 지속되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4년째는 비번을 바꾸는데 용기가 필요했다.
배려라는 덕을 발휘하려면 많은 감각이 필요하다. 느낌과 배경적 분위기를 읽는 정서 그리고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눈치, 상대의 마음을 고려하는 마음의 시선 등 그리고 가치관 등이 모두 연결되어 순각적으로 발휘되는 그 특성, 도덕성.
난 도덕성은 모든 아이들이 태어날 때 본성으로 지니고 있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남편을 만나고 힘든 결혼 생활을 하고서 나의 세계관이 와르르 흔들리며 깨지고 금이가고 천재지변이 일어나 지탱할 수 없는 혼돈을 맛보았다.
그 대단한 하수인 같은 남편의 태도로 나는 5년을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매일 시아버지랑 싸우고, 급기야 5년째에 시아버지가 꿈속에서도 비번을 맘대로 누르시고 내가 자고 있는 침실까지 와서는 뭐라 뭐라 하는 꿈을 꿨다. 시아버지에 대한 꿈은 다양했다. 어느 날은 시댁 사람들이 비번을 누르고 전부다 우리 집 거실에 앉아 있거나. 어느 날은 갑자기 말도 없이 시댁 친인척을 다 대동해 우리 집에 온 꿈. 그런 꿈들을 주기적으로 꾸어댔다. 초기 3년 간은 꿈속에서 아무 말도 못 하는 나로 등장하더니 서서히 소리치고 울고 격정 하는 꿈들이었다. 급기야 시아버지가 침실에까지 침입하여 등장하는 꿈을 꾸고서는 미쳐버리기 일보직전으로 난 결심했다. 탈출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