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는 새로운 가치의 창출에서 해낸다고 니체는 말했다. 내겐 참으로 니체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강력한 힘에는 힘으로, 넷플릭스 드라마, 송중기가 이혼 후 복귀한 당시의 신작 <빈센조>, 어떤 드라마보다 화려하고 신선했다. 선과 악이라는 구도에 여전히 빠져있던 나는 빈센조의 활약은 통쾌했다. 악에는 악으로, 악은 악으로 처단한다. 함무라비법전인가. 니체에게선 노예의 반격이 언제 시작될지 모르겠어서 도저히 논문을 쓸 수 없었는데, 빈센조의 묘수에 화들짝 놀랐다. 소크라테스는 추방을 받아들이지 않고 아테네의 법에 따라 독배를 마셨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순적이고 아이러니하다. 차라리 빈센조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깔끔할 순 없는가. 일관되게 쭉 밀고 나아가는데 우리가 말하는 악인들처럼 꾀를 잘도 쓰면서 약자들의 편에 서주는 자의 행적을 그린 고전? 영웅이라기보다 우리나라 그 소설책이 있지 않은가. 허생전, 그래 박지원의 <허생전>이다. 허생원은 당시의 세태를 누구보다도 빠르게 통찰하였고 그 경제의 흐름을 이용해 한몫 챙겨 자기가 꿈꾸던 왕국을 건설하면서 그 무리들의 칭송까지 받는 자. 역시 통쾌하다.
넷플릭스에서 만난 선한빌런? 송중기 주연의 <빈센조>는 일반적으로 그려지는 영웅과 달랐다.
빈센조는 악을 처단할 때 냉정하다. 늘 영웅을 그리는 영화를 보면 마지막 대결에 순간 주저하며 갈등하다가 수를 당한다. 그럴 때마다 속이 터지고 다시 역하며 분노하는 감정이 오갔다가 끝은 또 승리로 끝난다. 그러면 이미 예견된 것처럼 김 빠지는 무엇. 하지만 빈센조는 달랐다. 그래서 다시 보고 또 보고 싶은 영화같은 드라마. 빈센조도 같은 인간의 잔인성을 거부하지 않고 표출했다. 그때는 뒷걸음질 치지 않는다. 두면을 모두 적절히 가진 자를 그런데 초인이라 하지 않았나? 니체는 나폴레옹의 출현을 새로운 미래인간이라 했는데, 그 기질면에서 빈센조와 닮아 있다. 나폴레옹은 35세에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40세에 전유럽을 장악했다. 그는 20년간의 전쟁으로 유럽전역을 완전히 바꾸었다. (재위 기간은 1852~1870년이다.) 코르시카 향리 출신에서 프랑스 귀족 출신으로 임명되는 역사적인 운을 타고 난다. 또한 그는 법률가 집안의 아빠와 엄격한 군인집안의 엄마사이에 태어나, 어릴 적부터 강한 야심, 성취욕, 자부심을 가졌다고 한다. 강한 책임감과 엄청난 독서광으로 포화 속에서 5만 권의 책을 싣고 다녔다고 한다. 당시 루이 14세부터 시작한 국고 낭비는 루이 16세에 3배에 달하면서 국가 위기상황에 달했으나 성직자와 귀족은 세금을 내지 않은 상황이었다. 평민, 귀족, 성직자가 모여 표결하는 삼부회를 소집하나 루이 16세는 신분별 투표를 평민들은 다수결투표를 주장하면서 그 팽팽한 저항으로 테니스코트의 서약이 일어나자, 루이 16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국민의회를 강제해산하려 한다. 이에 평민들은 7월 14일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한다. 새로운 헌법개정으로 인해 구체화되지 않았던 제3신분에 대한 자각이 터진다.
빈센조 까사노는 이탈리아 마피아 조직의 배신을 당하고 한국으로 오면서 금가플라자 건물 밀실에 숨겨진 금을 찾는 과정을 그린 블랙코미디 장르의 드라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바벨그룹의 재개발건으로 계약을 할까 봐, 빈센조가 그들과 친목을 도모하면서 얽힌 비리에 목숨을 건 혈투를 벌이면서 건물소유주들과의 약속을 지키고 사랑까지 이루는 시원시원 통쾌한 드라마였다. 문제를 해결해 가는 빈센조의 철저하고 치밀함과 예리한 전략 그리고 일반의 영웅시르즈에서 볼 수 없는 인간본연의 야성적 잔인함이 독보적이었다. 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강한 정의로움과 책임감. 나폴레옹과 빈센조에는 강한 책임감이 있다. 우리의 부에게도 그 열정의 책임감이 있는가. 그런데 왜 색이 달라 보일까. 우리 곁에 있는 이들에겐 왜 눈치와 외면, 비열과 비굴의 냄새가 날까.
친정의 부_책임전가
시댁의 부_책임회피
내게 느껴지는 그들의 특징은 책임을 중심으로 떠넘기기와 피하기가 보인다. 떠넘기는 사람 곁에는 어떤 반작용이 일어날까? 우리 아빠는 7남매 중 막내라고 했다. 아들이지만 배우게도 배우지도 않았다 한다. 일할 사람으로 키우기 위했다한다. 그 맞으면서 부여되는 자리가 너무 싫어서 도시로 탈출했다한다. 스스로 너무도 자랑스러워 탈출한 것으로 모든 인생의 과업을 한 사람처럼 으기양양해 하는 아빠는 원치 않은 결혼을 했다고 했다. 그 이유로 모든 일은 엄마에게 전가했나 보다. 우리 엄마는 그 버거움에 해야만 하는 부담으로 능력적 한계지만 버텨야 하는 심정으로 고집이 생길 것이다.
또한 피하는 자의 가족 내부에서는 어떤 반작용이 일어날까? 시아버지는 형제가 한 명도 없는 독자이다. 아들을 부를 땐, 과한 호칭을 썼다. '우리 대주님' 하지만 그의 의사를 진중하게 듣지는 안으셨다. 그렇게 되면 자식은 그 무거운 짐을 외면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드러낼 수 없어 스스로를 억압했을 것이다. 억눌림의 회피는 다시 억눌림의 책임을 떠맡게 하고 싶은 악순환을 낳는다.
그에 대한 반작용의 핵심어는 다음과 같다.
고집固執 자기의 의견을 바꾸거나 고치지 않고 굳게 버팀. 또는 그렇게 버티는 성미.
억지 抑止억눌러 못 하게 함.
그리고 주양육자의 권력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기류가 흐른다. 자세한 뜻을 알고 싶어 사전어를 찾았다.
전가_轉嫁잘못이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씌움.
시집을 두 번째로 감.
납세자로부터 다른 곳으로 이전됨.
유의어_재가ㆍ재혼
회피_回避꾀를 부려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지지 아니함.
숨기고 만나지 아니함.
꺼리어 선뜻 나서지 않음.
유의어_기피ㆍ도피ㆍ모면
싫어하다ㆍ꺼리다/떠나다/꾀를 써서 벗어남.
그 뜻을 찾고 보니 놀라웠다. 남편은 결혼 직후 내게 3년을 한 말이 있다. "네 아빠가 너를 나한테 버렸다니까. 참 시원하시겠어. 똥차를 속 시원하게 치우셔서 아주 좋으시겠다. 앞으로 편하게 사시겠어. 아주 부럽다." 그 어이없는 말이 이해가 가질 않았으나, 몇 년 전 엄마의 고백으로 파혼을 합의한 우리가 다시 재회하는 데 아빠의 계략이 있었고 그런 과정에서 자신이 욕심부리는 예비사위와 예비장인의 짧은 대면에서 남편의 예리한 피해의식으로 자신과 똑 닮은 아빠의 비열함과 비굴함을 보았나 보다. 배고픈 하이에나처럼 우리 아빠는 그의 도피를 막아서는 것이 영웅으로 합리화했는가. 나는 분명 모든 정황을 상세히 설명하고 우리는 서로 싫다고 강한 의사표현을 했음에도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만남을 자행한 것이 딸을 위한 처사였나. 그것은 비굴한 변명으로 보인다. 난 매우 힘듦으로, 그 얄팍한 계략으로 우린 서로 물어뜯었기에...
강한 자부심이 낳은 오만함, 스스로 누구보다 지혜롭다는 사람이 갖는 편견. 하지만 둘은 이해해보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책임전가와 책임회피의 성향으로 왜곡된 사랑을 받은 부의 자녀들은 무엇을 삶의 의미라 하는 가. 우린 듣는 귀가 없다. 가장 기초적인 신뢰의 정서가 너무도 부족하다. 유일한 희망은 아이와의 신뢰를 쌓는 길. 그의 전략은 무엇인가. 새롭게 나아가려면 받아드려야한다. 새로운 가치를 그래서 나는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