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은 실화를 영화로 만들 때 잊지말아야 할 기준을 제시한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87>은 실화를 어떻게
매력적인 상업영화의 이야기로 재구성했을까?
영화 <1987>을 보고 문득 들었던 의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영화가 일상과 역사, 과거와 오늘, 현실과 기억의 교차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가 실화를 '이야기'로 만든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실화를 '이야기'를 만드려는 이가 가져야할 섬세한 접근과 방식이 이 영화에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는 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이한열 열사의 죽음, 6월 항쟁까지 이어지는 역사의 궤적을 관통한다. 영화가 다루는 것은 실제 사건이지만, 실제 사건이라 할 지어도 ‘있는 그대로’(실제로 그것을 표상해내기란 불가능하다)가 아닌 재구성과 그것을 위한 관점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실화를 재구성되었다 할 지라도 영화는 관객의 기억을 투영할 ‘간격’*을 많이 또 성공적으로 제공한다. 영화가 ‘실화’를 기반한 성공적인 상업영화가 된 가장 큰 이유는 ‘간격’을 제공한 방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주* 들뢰즈 <시네마>에 따르면 이미지와 이미지들의 논리적 내러티브와 서사가 단절된 틈인 ‘간격’이 있다. 모든 것에는 그에 대한 작용과 반작용이 있다. ‘작용’과 ‘반작용’은 대상이 바로 붙어있는 곳에서가 아니라 ‘간격'에서 일어난다. 또한 간격은 각각의 상상하는 이미지가 채워지는 영역이다.
실화를 다룬 영화는 ‘실제’라고 구현한 과거를 영화가 만든 구체적인 이미지로만 강요할 위험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만들어낸 이미지를 강요하지 않는다. 영화는 영리하게 구체적으로 보일 것은 보이고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은 관객이 재구성한 ‘기억’으로 채우게 한다. 그렇게 하여 1987년을 경험했던 이에게도 그 시기를 경험하지 않았던 이에게도 영화는 성공적으로 그때 그 기억들이 가진 의미를 상기시킨다. 그 의미는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사회 속 ‘자신’의 자리와 역할을 우리에게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에서 실현된다.
영화 속 개인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어렵게 그러나 묵묵히 해낸다. 16-18년도 촛불 정국에서 의경이었던 나 역시 이 영화를 내가 경험한 기억의 재구성으로 다시 바라볼 수 밖엔 없다. 영화가 어떻게 실제 사건에 대한 이미지를 각자의 이미지로 채우도록 하는지 그 과정을 규명하는 것은 관객 자신에게도, 영화의 스토리텔링 관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영화 <1987>는 실제를 다뤘으나 그것은 과거의 현실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까지를 투영한다. 그리고 그 방식은 <1987> 내 상황과 유사한 경험을 하는 다른 국가의 관객에게까지 확장된다. 홍콩에서 이 영화는 2019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들이 본 것은 이 영화라기보다는 이 영화가 상징하는 ‘민주주의와 투쟁’의 기억이다. 그들 자신에게는 참고할 투쟁과 승리의 유산이 충분하지 않았다. 홍콩에서의 이 영화는 3 연작의 완성처럼 보인다. 한국 영화 <변호인>-<택시운전사>-<1987>의 홍콩 내 개봉명은 역권대장(逆權大狀)- 역권사기(逆權司機)-역권공민(逆權公民)이다. 각각 한 인물 - 한 인물과 여러 사람들 - 모든 시민들의 투쟁을 상징한다. 홍콩 사람들은 한국인에게는 각기 기획되고 다른 시기에 상영됐던 다른 영화를 ‘역권’이라는 트릴로지 서사로 묶었다. 우리의 오늘은 그들이 구현하고 싶은 미래이기도 하다. 홍콩인들은 1980년 광주로 오늘을, 1987년 서울의 광장에서 어쩌면 도래할 자신들의 승리를 본다.
영화를 통해 관객은 과거는 오늘로, 오늘은 과거로 역사는 일상으로, 일상은 다시 역사로 교차하는 체험을 한다. 어떻게 관객은 1987년 한국의 실화로부터 시대와 국가를 넘어 자신을 투영할 수 있었는가? 본 비평은 영화 <1987>가 매력적인 이야기로 실제를 재구성하는 방식, 그 메시지를 풀어나가는 영화적 방식과 영화와 개봉 당시 현실이 어떻게 화학적 시너지를 냈는지 밝히고자 한다.
영화 <1987>은 1987년 6월 항쟁과 그 이전 일어난 사건들의 연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어떤 ‘이미지’든 주제의식이든 전달하기 이전에 사건들이 일어난 배경들을 설명하든 보여주든 관객에게 납득을 시켜야 한다. 더욱이 이 영화는 기록영화가 아닌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상업영화이기 때문에 ‘내러티브’는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야기라는 안내자는 없으면 상업영화의 관객은 그 시절의 사실을 담은 그림만으로는 ‘의미’를 도출하기까지 몰입이 어렵다.
즉, 이야기는 필요하다. 그런데 실화를 영화로 만들 때 어려운 지점이 있다. 관객은 실제로 그때의 시간과 공간에 그대로 들어갈 수 없다는 점이다. 때문에 '실제'는 어떤 형태로든 ‘재구성’이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같은 이유로 우리가 경험하는 현재도 각각에게 의미가 다르다.) 게다가 그 시간을 기억하는 관객들 각각의 기억하는 1987년과 세부 사건의 기억은 상이하다. 때문에 재구성의 목표는 ‘실제’의 모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단순한 실제 ‘이미지’의 교차와 전시만으로는 그 시대의 모습을 투영할 수 없다.
1987년 6월 항쟁에 앞서 1980년 5.18 광주의 이야기가 상업 영화로 제작된 바도 있고 실제로 성공하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실제 사건으로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5.18일을 전후로 광주의 시민들과 계엄군 사이 대립을 비극으로 드러내기에 용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에 비해 <1987>의 배경이 되는 6월 항쟁은 배경이 되는 전후 사건이 보다 복잡함. 6월 항쟁은 ‘단일한 사건’이 아니기에 하나의 이야기로 직조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6월 항쟁을 제대로 다루자면, 특정한 단일 사건을 다룬다기보다 1987년에 있었던 폭발적인 시민의 항거가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 종합적으로 설명해야만 했다. 6월 항쟁의 전개는 국지적이기보다는 전국적이며, 일부라기보다는 훨씬 많은 다수의 투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1987년의 사건 전개는 실제로는 매우 복잡하고 대단히 많은 인물과 대단히 복잡한 사건들의 연쇄다. 이것들을 모두 영화가 다룰 수는 없다. 이러한 어려움이 있기에 6월 항쟁 전후의 이야기는 이제껏 상업 영화가 되지 못했다. 영화는 필연적으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했다.
영화는 1987년 1월에 일어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6월 <이한열 열사의 죽음>를 두 축으로 1987년 6월 항쟁의 서사를 통합한다. 사실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닌 복잡한 인과를 재구성한 ‘이야기’로 직조해낸 것이다. 이 그렇게 함으로써 영화는 선형적인 시간을 따라가듯 관객에게 이야기를 제시한다.
“모두가 주인공이었던 그때”
영화 <1987>의 메인 카피
들뢰즈는 저서 <시네마>에서 “큰 형식”의 해체가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큰 형식이란 역사적 큰 인물, 큰 사건, 뻔한 이야기의 도식을 의미한다. 그는 이러한 ‘자동 감각적 도식’이 붕괴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현대로 올수록 사회와 세계가 보다 복잡화, 탈형식화됐다. 그 점에서 들뢰즈의 진단은 적절하다. 어떤 큰 영웅적 서사로 현실의 변화를 설명할 수 없고, 도리어 무리하게 영웅 중심 ‘내러티브’를 구성하려는 유혹은 현실을 왜곡할 우려가 있다. 세상의 현실은 어떤 특정 인물의 역할보다는 개인들이 복잡하게 얽혀 만들어 낸 것에 가깝다.
영화도 큰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 어떤 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두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제 의식은 “어떤 한 명의 개인이 아닌 우리 각각이 모두가 역사적 변화의 동인이며 주인공이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 영화는 특정 한 두 명의 인물이 뚜렷한 주인공이라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영화 속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중요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영화의 재구성된 사건을 끌어가는 중심점과 인물은 필요하다. 영화가 택한 방식은 특이하게 안타고니스트를 중심축에 내세운다. 안타고니스트인 대공처장 박 처장은 영화의 시작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난 남영동의 책임자이자 사건 은폐의 주요한 배후이다. 그런데 박 처장은 단순한 절대 악이 아니다. 세련된 숏과 몽타쥬 구성으로 영화가 ‘보이는’ 공산당에 의해 죽은 그의 가족사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괴물이 된 이유를 납득하게 한다.
이러한 박 처장을 중심에 세운 의도를 알기 위해 감독의 말을 빌리지 않을 수 없다.
“안타고니스트인 박 처장(김윤석)을 등뼈처럼 쫙 세워놓고 그 이야기를 따라가는데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결국 하나의 커다란 사건으로 발전해가는 구조다. 예술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흥미로운 도전이 될 것 같았다. 나중에 관객이, 내가 주인공이라는 것을 목도하게 되는 신비롭고 재미있는 체험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씨네 21, “<1987> 장준환 감독 - 현실을 목도하는 힘과 에너지”, 2020.12.27
박 처장을 중심으로 나머지 인물들은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의 전말을 밝히기 위해 대립한다. 각 인물들은 사건의 전개를 위해 ‘자신의 역할만큼 기여’*하고 사라졌다가 다시 필요한 그 순간에 등장하고 사라진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어느 한 명의 영웅이 굴린 것이 아니다. 역사의 진보는 그보다는 묵묵히 자신의 신념을, 때로는 인간적, 직업적 양심을 따른 사람들의 크고 작은 기여로 이루어냈음을 보여주는 탁월한 구성이라고 생각한다. 각각의 인물들은 심지어 서로를 잘 모른다. 그러나 각자는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는데 역할을 했다.
주*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 평범한 인물, 평범한 기자로 보이길 바랐다” 윤상삼 기자 역의 이희준 배우 (영화 '1987 (1987:When the Day Comes, 2017)' 비하인드 - 캐릭터 영상) 영화에서는 실제로 실제 인물들도 재구성이 됐다. 실제로는 그 인물들 중 일부는 독재 체제의 부역자이기도 했다. 교도소 보안계장이었던 안유도 자신은 ‘선역’이 아니라고 말한다.
한편, 영화는 유일한 허구의 인물 연희를 또 다른 한 축으로 세운다. 극 중 인물 거의 대부분은 이미 어느 정도 동기가 완성되어 있는 인물이다. 반면 연희는 극 중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이자 가장 큰 동기의 변화를 보이는 인물이다. 연희는 딱히 시대에 항거하는 투사도 아니고 큰 권력이나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학생이기에 아직 직업적 윤리가 딱히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어찌 보면 평범한 우리가 이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상이다. 그런데 감독은 그가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연희를 통해 평범한 관객인 우리는 영화에 보다 몰입할 수 있으며, 이 이야기가 영웅의 서사가 아님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주*감독은 연희도 허구의 인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연희가 있었다. 연희는 그 시대의 평범한 사람이자 대학생이자 여성이라는 역할을 짊어진 인물’이라는 것이다.
(엔터미디어, “‘1987’ 연희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 2018.01.04)
영화는 연희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이 언제든 악마적 권력의 크고 작은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팅을 위해 나간 거리에서 쫓길 수 있고, 갑작스레 교도관인 삼촌 병용(유해진)이 남영동에 끌려갈 수도 있다.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서 가족을 찾으러 간 사람들 속에 함께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다 시 외곽 교외에 홀연히 던져질 수 있다. 고장 난 시대는 평범한 인물들이 평온한 일상을 살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연희는 <이한열군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1987>의 세계로 불러올 수 있게 하는 인물이다.* 영화는 이한열 열사를 등장시키기 위해 이한열 열사를 재구성했다. 한열(배우 강동원)은 우연히 기습 집회 현장이 된 거리에서 전경들에게 쫓기는 연희를 구해내고, 같은 학교의 만화 동아리에서 광주의 진실을 담은 비디오 상영회에 연희를 초대한다. 연희는 우리의 의문을 대리해서 묻는 유일한 극 중 인물이기도 하다. 집회를 하고 비디오를 상영하는 ‘운동권 학생’ 한열에게 연희는 묻는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 가족들 생각은 안 해요?” 이에 한열은 말한다 “그걸 보고 어떻게 가만히 있어” (비슷한 말을 연희의 삼촌인 교도관 한병용도 한다. 영화는 우리의 인간으로서 양심을 찌른다.)
주* 반대로 한열은 연희(또는 관객)를 참여의 현장으로 초대한다. 연희(또는 관객)는 한열에게 왠지 자꾸 마음이 간다. 연희는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서 시위를 하다 시 외곽 교외에 버려질 때 한열에게 전화하여 도움을 요청한다. 물론 관객은 그가 이한열 임을 영화의 최후 반부 한열의 죽음의 순간까지 알지 못한다.
극에서 연희가 뒤틀린 세상을 마주할 때마다 연희는 우연히든 필연히든 한열을 만난다. 이런 한열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연희가 각성하는 계기가 된다. 한열의 소식을 접한 연희는 평범한 시민들이 모인 광장으로 달려간다. 물론 연희는 단지 한열의 죽음 때문에 광장에 뛰어든 것도, 부조리에 대한 투쟁의 의미를 깨달은 것도 아니다. 연희는 아버지가 노동 운동의 희생자이고, 남겨진 가족들은 고난을 겪어야만 했다. 오히려 너무나 그 의미를 잘 알고 있기에 연희는 선뜻 투사가 될 수 없었다. 연희는 이렇듯 우리가 시대에 맞서야 할 때 경험해야 할 두려움과 할 수 있는 선택까지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롤랑 바트르는 사진의 관객이 사진에 정서적으로 참여하는 국면을 푼크툼(punctum)이라고 명명했다. 이 푼크툼은 마치 예리한 핀이 찌르는 것처럼 사진 감상자의 감정을 찌르는 것이다. 감상자는 자신이 경험했던 모든 실질적인 상황 속에서 그 사진 속 이미지와 비슷한 장면들을 끄집어내고 그때의 자신의 감정과 사진 속 의지를 겹쳐 놓는다. (푼크툼은) 바로 기억과 상상이 겹치는 자리에서 만들어진다.”*
주* 나는 ‘기억과 상상이 겹치는 자리’를 앞서 인용한 들뢰즈의 ‘간격'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롤랑바트르가 말한 사진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는 관객의 마음을 찌르는 푼크툼이 담긴 숏으로 가득하다. 영화는 탁월한 숏과 몽타쥬 구성으로 관객의 감정을 찌른다. 많은 장면들이 그렇지만 특히 <박종철군의 죽음, 부검, 주검이 강물에 뿌려지는 과정>,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는 순간>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마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참여하게 하며, 극 중 인물이 느끼는 것과 다르지 않을 감정적 공명을 느끼게 한다.
몇몇 장면과 해설을 싣는다.
[31:00-32:00] 종철의 부검 장면, 부검의는 부검 전 종철의 삼촌을 무표정으로 바라본다. 무심한 듯 하지만, 이는 그가 전문가로서 직업윤리를 잊지 않게 만드는 당위를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36:00-37:00]
부검의는 치안본부장 앞에서도 청와대의 금일봉을 거절하고 자신의 소견대로 부검 결과서를 작성한다.
[40:00-42:00] 화장된 박종철의 주검은 언 강물 위에 뿌려진다. 장면에 앞서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종철의 뼛가루는 마치 할 말이 있는 듯 언 강물 위에 머문다. 아버지는 강물 속으로 뼛가루를 뿌리며 “종철아 잘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1:41:32-1:44:08]* 박 처장은 한병용을 직접 신문한다. 신문하며 박 처장은 흑백 사진을 보여준다. 이 사진은 박 처장의 북쪽에서 죽은 가족들의 사진이다. 그는 담담히 말하다 격앙되어 그 날을 증언한다. 놀랍게도 구체적인 시각 그림인 플래시 백(회상 장면)은 없다. 그저 그 날을 말할 때 그 날의 ‘소리’가 들린다. 박 처장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그 순간 남영동 대공분실 안으로 지나는 기차 소리와 기차에서 반사된 빛이 흘러들어온다. 박 처장은 말한다. “진짜 지옥이 뭔지 알간? 내 식구들이 죽어나가는 판에 소리 하나 못 지르는 거. 그거이 바로 지옥이야” 박 처장은 자신에 가족사진 위로 연희와 연희 어머니의 사진을 겹친다. 이어서 연희에게로 장면이 전환된다.
주*해당 장면의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6U-luAzBX4g&t=29s
이 장면이 놀라운 까닭은 애써 가공한 구체적인 이미지보다 더 뛰어난 관객의 몰입을 만드는 그림을 우리 마음속에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이때 만들어진 우리 마음속 그림은 강렬한 푼크툼으로 작용하고, 우리는 박 처장이 괴물이 될만한 충분한 이유는 있었다고 납득하게 된다.
[2:00:00-2:04:00] 진압이 시작되고 내몰리는 학생들. 그때 최루탄 연기 탓에 고립된 동아리 부장이 고립된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한열은 시위대 선봉으로 뛰어든다. 날아든 최루탄을 피하지 못하고 한열은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벗겨진 한열의 신발과 남겨진 신발들 위로 전경들이 뛰어오고 한열의 신발을 짓밟는 전경의 발과 달리는 연희의 발이 디졸브로 교차한다. 연희는 어디론가 뛰어가는데 그곳은 한열의 노제가 열리는 광장이었다. 이 장면은 영화의 감정적, 주제의식 발현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한다. 연희가 광장에 이르면 관객은 이미 그 현장에 있다. 관객은 시민이고 시민은 관객이 된다.
영화는 대단히 명확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가르치듯 말하지 않고 있다. 말하지 않은 공간에서 관객이 그 의미를 스스로 채우도록 한다. 그리고 그것은 관객 자신의 주체가 행한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며 자연히 이루어진다. 영화의 많은 장면을 보며 관객은 현재와 과거,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이 지속적으로 교차하는 경험을 한다. ‘마치 보지 않았으나 본 것 같고’ '체험하지 않았으나 체험한 것’과 같다. 관객이 만든 이미지와 그 의미는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관객의 마음에서 그 자체로 ‘활성’되는 것이다.
영화는 역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는, 실제 사건의 재해석에 관해 주제 의식을 흐리거나 기계적 중립으로 일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직접적인 메시지 전달과 과잉으로 선전물이나 신파여도 안 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징’을 활용하여 말하지 않고도 의미를 투영할 수 있도록 한 것 같다. 나는 발견되는 상징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 ‘발’과 ‘신발’에 대한 시선 고정.
영화에서 발에 대한 시선은 의지나 운동을 드러내는 도구로 많이 활용됐다. 영화 <1987>에서는 신발도 함께 활용된다. 연희를 구하는 과정에서 한열은 오른쪽 신발을 잃어버린다. 신발 가게 주인은 운동화를 팔고, 연희가 신발값을 대신 지불한다. 양발은 완전해졌다. [1:00:00-1:03:00]
남영동에 끌려간 가족을 찾으러 몰려간 사람들은 진압되고 승합차에 강제로 태워진다. 그들이 남은 자리에는 미쳐 챙기지 못하고 버려진 신발들이 있다. 교외로 버려진 연희는 왼쪽 신발을 잃는다. 연희는 한쪽 신발을 잃어버린 채로 돌 밭을 걷는다. [1:39:08]
이것은 고난을 상징하는가? 한열은 연희에게 새 신발을 건넨다. 다시 양쪽 발이 완전해졌다.
이후에도 이 ‘운동화’는 계속 나온다. 한열이 죽어가던 순간에도 한열은 운동화를 움켜쥐고 정문 앞에서 쓰러진다. 한열이 쓰러진 자리에 신발은 남겨지고, 전경들이 들이닥칠 때 신발은 짓밟힌다. 이어서 같은 신발은 신은 연희가 달린다. 광장을 향해 달리고 그 자리에는 시민들이 궐기하고 있다.
- 공간과 빛
유난히 박 처장의 씬에서 박 처장은 어두운 공간에 들어오는 ‘밝은 빛’을 등진다. 대공분실의 구성은 파놉티콘 같은 내부 구조를 갖고 있다. 밖에서 보이는 ’ 해양과학연구소’라는 이름은 기만이다. 이곳은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 박 처장의 한병용 취조 때 어두운 대공분실에서 한병용에게 창백한 손전등 불빛을 비춘다. 그는 빛조차 자신의 손으로 다룬다. [1:37:01]
두 번째 박 처장의 취조 때 지나는 기차에 의해 산란한 빛이 대공분실로 들어와 박 처장의 얼굴을 비춘다. 이때 빛은 어두운 대공분실로 드문드문 들어온다. 들어오는 빛을 막을 수는 없지만 이를 보는 관객의 마음은 복잡다단하다. [1:41:32-1:44:08]
박 처장은 한병용에게서 얻은 정보로 ‘조작할’ 간첩단 사건 수괴로 상정한 ‘김정남’의 거처를 알게 되었다. 박 처장은 김정남이 피신한 교회 안에 들어와 김정남을 찾는다. 교회 본당 벽에는 예수가 새겨진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다. 이때 스테인드 글라스를 지난 빛이 박 처장을 향하고 밝은 빛은 경미하게 그림자가 진다. 형사들에게 쫓기던 김정남이 교회 스테인드 글라스 밖에 매달려서 빛을 가린 것이다. 박 처장은 스테인드 글라스를 바라본다. 빨간빛과 파란빛이 교차한다. 박 처장은 눈을 뜨지 못한다. 이때 ‘신’은 그를 보고 있다. 곧이어 사건의 전말이 명동성당에서 폭로됐다는 소식을 부하가 전한다. 김정남은 간첩사건의 수괴로서의 가치를 잃는다.
[1:51:16-1:51:41]
연희가 다다른 시청 앞 광장에서 연희가 버스 위로 올라서자 아득히 밝은 태양이 떠오른다. 완전히 밝게 떠오른 빛을 피할 곳은 없다. [2:04:00]
- “그날이 오면”
한열은 연희를 포섭하려고 연희를 찾아온다. 그가 가져온 동아리 회보에는 ‘그날이 오면’의 악보가 있다. 연희는 말한다. “그 날 같은 거 안 와요.” 만약 이 이야기가 영웅의 이야기라면 ‘그 날’은 오지 않을지 모른다.
한편 이 곡은 영화 속 현실과 영화 밖과 우리의 연결 고리가 된다. 영화의 또 다른 표제이자 엔딩 크레딧에 활용된 ‘그 날이 오면’은 이한열 합창단이 부른 노래다. 합창단원 대부분은 이한열이 스러지던 그 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저마다 그날의 기억을 불러낸다. ‘그날’은 투쟁하던 날일 수도 있고, 더나은 세상이 온 날 일 수도 있겠다. ‘그날이 오면’은 비교적 명시적 상징이지만, ‘그 날’의 의미를 우리에게 생각하게 한다. 영화 속 이야기와 ‘나’를 생각하게 한다.
해당 영상의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CcBuarwGJq0
“1987과 2017이 교차하는 광장과 거리, 30년 만에 도래한 다시 그때”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연희는 버스 위로 오른다. 시청 앞 광장이 보인다. 광장에는 수 만의 시민들이 모여있다. 광장에는 태양이 뜬다. 광장에서 ‘1987’이라는 문구가 뜬다. 영화는 끝난다. 아니 끝나지 않는다. 크레딧이 올라가며 영화는 영화 이후 지나간 현실로 돌아온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그 당시의 화면을 VCR로 보여준다.
지나간 현실을 다룬 영화인 <1987>은 영화를 현실로까지 이어지게 한다. “나 그때 거기 있었지” “그 공간이 저때는 저랬구나. 지금은 이런데..” 감독은 이 영화를 두고 “지극히 현실을 생각하며 만든 영화”*라 말한 바 있다.
주*씨네21, “<1987> 장준환 감독 - 현실을 목도하는 힘과 에너지”, 2020.12.27
수리오의 <영화 우주>는 "진지한 학문적 영화론의 성립에 필요한 영화론의 언어로서 기초적이지만 중요한 기본 개념들을 제시"(전동열,2008)했다. 이 ‘기본 개념’의 출발점은 “본질과 사물, 사실, 사건, 현상, 내용들의 총체”인 ‘영화 우주’이다. 이러한 영화에는 ‘영화적인 것’과 영화와는 긴장상태에 있는 ‘비영화적인 것’을 포괄한다. 이는 7가지 실존적 층위로 구분될 수 있다. 각각은 다음과 같다.
1번째 차원 - 영화 밖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일상적 세계(비영화적 현실)
2번째 차원 - “영화 촬영을 위한 현실”
3번째 차원 - “영화 필름의 시간”
4번째 차원 - “상영되는 영화”
5번째 차원 - “이야기의 차원”
6번째 차원 - “관람의 시간”
7번째 차원 - “구체화되지 않은 창작자의 의도”
주목하고 싶은 차원은 6번째 차원이다. 영화의 6번째 차원에서 관객은 스크린에 투사된 ‘이야기의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의 경험을 그 세계에 반영한다. 관람의 시간은 영화 상영 시간을 넘어선다. 영화는 현실로 이어진다.
영화는 2017년 12월에 개봉했다. 영화는 영화 내외적으로 1987년과 2017년 사이 30년의 간격과 동시에 유사성을 강조한다. 마침 우리는 다르지만 비슷한 경험을 한 시기였다. 1987년은 시민참여로 직선제 개헌을 성취해낸 시기였고, 영화 개봉 시기인 2017년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탄핵을 이루어낸 시기였다. 영화 개봉 시기는 시민의 정치적 효능감이 극대화됐던 시점이다. 당시 관객은 <1987>과 <2017>의 연속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날’ 변화의 주역은 모두 시민이었고, 그들이 모인 장소는 광장과 거리였다. 그 공간에 우리의 생각과 우리가 만든 이미지가 배어든다. 광장과 거리에서 30년을 가로질러 세계는 다시 만난다. 영화가 보여주는 1987년 연세대 정문 앞과 서울시청 앞 광장은 너무나 일상적인 오늘의 그 장소를 불러온다. 2017년의 우리는 그 자리가 얼마나 시민의 열망이 끓어오른 자리임을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었다. 영화 개봉 시점에서는 불과 몇 달 전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는 ‘큰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관객은 이야기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게 된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역사를 진보시키는 것은 어떤 한 개인의 희생과 영웅적 헌신으로는 역부족이다. 모두가 주인공이자 플레이어가 될 수 밖엔 없다. 그리고 이때 이야기는 어디로 흐를지 예측 불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복잡하게 연결된 대상들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양한 우리들이 부대끼며 시대는 어디로 흐를지 모르게 된다. 그리고 그 흐름은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중심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다양한 뿌리들이 얽혀있는 것이다. 광장은 그 뿌리들이 있는 곳이다. 변화가 있는 곳이다. ‘그날’을 부르는 곳이다.
광장과 거리에서 지금도 나는 가끔 경미한 PTSD에 시달린다. 2016년부터 2018년 나는 그 날 의경이었다. 나는 1987년의 광장을 경험한 바가 없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이미 본 것만 같다. 그들과 함께 했던 것만 같다. 영화 마지막 시민들은 광장에 모인다. 시민들은 저마다 구호가 적힌 현수막과 태극기를 든다. 광장에는 물을 주는 아주머니, 멈춰 선 택시기사들, 시민을 나르는 버스, 사무실에서 건물 밖으로 휴지를 던지며 ‘참여’하는 직장인들이 있다. 나는 그 순간 내가 광장에서 만난 시민들을 떠올렸다. 그 속에서 보았던 가장 평범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하며 모여들었던 정말 ‘평범한 사람들’의 그림은 잊히지 않는다. 어디선가 보았고 어디에나 있었던 사람들은 광장에 있었다.
영화를 보며 ‘그 날’을 생각한다. 이동진 평론가의 한 줄 평으로 영화 <1987> 비평을 마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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