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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철 Aug 07. 2020

"영화는 예술이 아니다"

새로운 매체가 언제나 받아온 의심

*전동열 홍익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님의 논고 <문학에서 영화로, 또는 ‘대중’ 속으로 사라진 예술>를 읽고 주요 내용을 정리하고 창작자로서 느낀 바를 적어봤습니다. 다음 책에 논고가 실려있다고 하니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영화 발생기 영화와 문학의 관계 “영화는 예술이 아니다”

세게 최초의 영화 Arrival of a Train at La Ciotat (The Lumière Brothers, 1896)

20세기 초 영화 발생기에 영화는 독자적인 예술 장르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생산이 기계적으로 이루어져 ‘예술가의 사상’이 표현될 수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상업적 목적의 일일지언정 ‘삶의 형식’ 일 수는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

- 전동열  <문학에서 영화로, 또는 ‘대중’ 속으로 사라진 예술>, 9페이지 -


이러한 관념은 예술을 향유하는 일반은 ‘대중’이라기보다는 일부 ‘교양 시민’들이라는 인식과 함께했다. 그러나 물질적, 문화적 소비의 주체가 점차 ‘사회적 계급으로서의 시민’보다는 ‘통상적인 일반 대중’으로 옮겨가면서 예술성에 대한 인식은 달라질 수 밖엔 없었다.


그러나 영화와 예술에 대한 인식 전환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당대 창작자들, 특히 문학가(들과 평론가들, 종사자들)에게 영화는 “기존 규범과 도덕, 가치의 틀을 벗어난” “저질 영화”(같은 같은 논고 1페이지)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앞서 언급한 이유 때문이다. 문학가들의 영화에 대한 비토는 명분상 (일부) “저질영화”를 배척하는 형태로 다뤄졌지만, 실제로는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 전반에 대한 비토로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그들이 예술을 영화가 아니라고 본 이유는 영화가 너무 직접적이거나(*영상은 이미지를 직접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상상을 제한하고 내면의 과정을 표현하기 어렵다.) 창작자가 의도하지 않은 우연성에 기댔기 때문이다.(당시 되블린의 견해) 게다가 당대 문학 평론가들이 보기에 영화는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자본집약적으로 제작(일반적으로 문학 집필보다 제작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되기에 상업성이 예술성을 더럽힐 위험이 있었다. 고 생각했다.(예술은 순수하고 거의 신적이며 어떤 경우에도 상업적인 것이라는 낙인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는 의식이 바탕에 깔려있었다.” 같은 논고, 3페이지) 문학가들에게 영화는 “영화는 문화를 소비할 수 없고, 향유할 수 없는 사람들의 대체재”였을 따름이다.


다만 당대 독일의 생존 작가 중 가장 대가로 인정받았던 하우프트만은 자신의 작품 사용을 영화 제작을 위해 허락하기도 하였고, (영화에 대한 그의 관심에 비해 영화에 대한 이해도는 낮았으나) 영화의 역할에 대해 긍정하였다. 하지만 영화(그에 말에 따르면 '영화기술')를 독자적인 예술 장르로 인정하는 데는 유보적이었다.


“여전히 나는 영화기술 Kinematographie이 예술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영화는 항상 기계적 재생산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예술가의 사상과 맺는 관계는 언제나 간접적입니다. 그것은 대략 책 속의 화보와 [문자를 포함한] 책 자체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지요. (Hoefert 1996, 21) ”

- 같은 논고, 5페이지 -



영화만의 예술성을  단계 끌어올린 감독 무르나우의 시도와 문학의 영화화


감독 무르나우는 영화의 예술성을 한 단계 끌어올린 연출가로 평가받는다. 무르나우는 하우프트만의 소설 <판톰>(유령)을 영화로 만들어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는 하우프트만을 상당 부분 고무시켰다. 하우프트만은 영화를 위한 시나리오를 몇 편 더 쓰기도 하였으나 <판톰>의 성공 이후에도 영화 제작을 위한 기술적 고려(구체적 대화, 카메라 움직임, 조명, 공간 등)나 이해는 모자랐다. 때문에 하우프트만의 소설 <판톰>이 성공적인 영화가 되기 위해서는 연출가의 역량이 대단히 중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무르나우는 그러한 시도를 성공적으로 완수해냈다.


당시 영화가 예술성이 낮다고 평가받았던 주요한 이유는 ‘심리적 묘사’에 탁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당대에는 불가능하다에 가까웠음.) 문학이 섬세한 서술로 심리를 묘사하는데 탁월했다면, 영화는 기본적으로 시각 매체이기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하지만 이는 매체의 특성이지 영화의 한계라고 보기는 어려웠고, 무르나우는 시나리오의 지시를 따르면서도 독창적인 방식(촬영과 연기에서의 지도, 조명, 공간 활용, 교차하는 편집 등)으로 영화만이 가능한 방식으로 감정을 실현해냈다. 그는 시나리오를 ‘영상언어’로 독자적으로 해석하고 영화를 연출자의 예술로 만들어냈다. 그에 이러한 시도에 대해 당대에는 찬사가 이어졌지만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탁월함’에 그 공이 돌아갔다. 평론가들에게 연출가 무르나우는 단지 이야기의 탁월함을 탁월하게 시각화한 인물이었을 따름이었다. (영화를 호평한 러시아 잡지는 이 영화를 두고 작품의 역량을 영화가 표현한 것이며, 여전히 문학작품의 우위성을 전제하고 있음.) 하지만 무르나우는 영화를 소설이나 연극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매체라고 인식했다. 괴테의 고전 <파우스트> 조차도 영화에서는 다르게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르나우는 영화 <파우스트>의 시작에서 도발적으로 선언했다. 


영상으로 된 <파우스트>, 안 될 건 무엇인가?

그에게 괴테의 고전 <파우스트>와 영화 <파우스트>는 다른 것이며, 그에게 영화의 영상은 그 자체로 미술이었던 것이다.


                                  Friedrich Wilhelm Murnau - Faust (1926)

영화는 영화 자체로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속성은 영화를 비토하는 사람(토마스 만)들도, 영화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영화의 속성을 긍정하되, 평가를 유보하던 사람들도 동의하던 것(되블린)이다. 그 속성이란 영화의 직접성과 단순성이다. 영화는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어지는 (*감정전이의 ) 즉각성은 기존 문학과는 다른 예술적 느낌을 자아낼 수 있었다. 이 단순한 방식은 보다 ‘강렬’하게 감정을 전달할 가능성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과 감정은 ‘문장 언어’의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측면에서는 영화가 더 탁월함도 있다.

Friedrich Wilhelm Murnau - Faust (1926)

한편 되블린은 영화의 서술 방식(씬 중심)을 문학이 수용하는 것이 문학에도 유용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소위 '영화 양식'이라 불리는 것(사진의 현실묘사와 같은 ‘직접성’)을 문학에 도입할 수 있다면, 문학에도 긍정적일 것이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서사문학에서 심리적 설명을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인데, 되블린의 관점에서 문학이 심리적 설명에 (예술성을 이유로) 불필요한 힘을 쓰는 것보다는 영화적 요소를 도입해서 ‘직접’ 보여주는 것이 더 긴요했다.(*영화는 장면을 마치 햄버거처럼 섞을  있음씬들은 뒤섞이며 동시에 일어났음을 보여줄 수도감정의 흐름을 보여줄 수도 있음. 이러한 씬에 흐름을 문학에 담을  있음.) 이러한 사고의 흐름은 후대 로브 그리에가 시네 로망에서 시도한 아이디어와 일치한다.(그것은 마치 장면을 그리듯 소설을 쓴다)

로브 그리에가 각본을 쓴 영화 <지난해 마리 앙바드에서>(1961)



새로운 매체는 언제나 예술성을 의심받아왔다.

새로운 매체는 계속 탄생하기 마련이고, 새로운 매체는 새로운 전달 속성을 가진다. 매체의 속성은 매체가 담는 콘텐츠의 속성에도 영향을 준다. 가령 영상의 시대라고들 하지만, 유튜브에 알맞은 영상과 스크린에 걸리는 영화의 영상이 같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더군다나 넷플릭스는 ‘스크린’을 개인 소유 기기로 옮겨두었고, 영상 수용자들은 이제 영상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끊어보거나 몰아볼 수 있게 되었다.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라면, 매체 소비자들의 권한이 보다 강력해진 요즘의 영상 소비 양상은 영화 창작자들에게 영화의 존립에 대한 의구심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영화가 처음 탄생하던 시기 영화에 대한 문학가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창작자들에게 ‘창작자의 의도’는 대단히 중요해서 창작의 결과가 우연성에 기대거나 의도밖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을 것 같다. 그리고 많은 경우 창작에서 ‘의도하지 않은 결과’는 의도한 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콘텐츠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는 프로슈머 현상은 이제는 너무나 일상적이다. 어떤 매체나 장르에 대한 소비자가 많아지는 것은 무분별한 콘텐츠의 범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다만 그러면서도 ‘씬’(소비하는 사람들의 집단)의 확장을 가져오고 그만큼 좋은, 특히 예술성이 있는 창작도 늘어날 것이라 본다. 만들어본 사람은 더 잘 소비할 수 있다. 창작하는 소비자들이 많아지는 현상이 나쁠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분명히 영화는 문학보다 더 일반을 위한, 보통 사람들을 위해 열린 매체였을 것이다. 오늘날 영상 매체들도 결국엔 그러한 역할을 해내리라 본다. 기존 매체는 긴장하지 않아도 좋다. 새로운 이들은 어차피 당신의 창작을 ‘보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의 창작을 볼 수도 있는 사람이 될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돈과 예술을 분리할 수 있을까? ‘순수’ 예술 자체가 메세나가 없으면 돌아갈 수 없었는데 돈을 배격하려는 태도는 일견 위선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예술에서 돈 자체가 목적인 것은 유감인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의도는 누가 알 수 있을까? 아마 창작자 자신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창작자 문희철은 쓰기에도 새로운 영상 매체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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