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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철 Sep 23. 2020

작품 말고 상품.

그러나 상품 말고 작품

작품 말고 상품 만들어야지?

이 말은 광고하는 사람들, 온라인에서 커머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이 늘 새기는 말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누가 당신에게 돈을 주고 있는지 자각하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우리가 흔히 예술이라 말하는 문학, 미술, 음악도 본래 대중이 아닌 귀족과 왕족 같은 고귀한 후원자의 '메세나'(예술에 대한 재정 지원)로 유지되어왔다. 마키아밸리는 후원자인 메디치 가문에 간언 하고자 '대중'이 아닌 고귀한 한 분을 위해 <군주론>을 썼고, 헨델도 모차르트도 후원자를 위해 많은 곡을 썼다. 시대가 변하며 대중이 '주요한 소비' 주체가 되면서 메세나의 특권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나눠가질 수 있게 됐을 뿐, 창작자가 먹고사는 문제의 본질은 누군가가 창작물을 '사주는 것'이다.




탁월한 작품과 탁월한 상품이 꼭 충돌하는 관계는 아니다. 그 경계는 시대와 상황과 사주는 사람이 결정한다. 다만 만들어진 당대에 팔리면 상품이고, 그렇지 않으면 '상품이 아닐 뿐'이다. 그런데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작품인 것은 또 아니다. 작품은 내가 만든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이것을 향유하는 이들이 평가하고 느끼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작품을 하겠다는 꽤 많은 사람들의 태도에 상업성을 지나치게 경시하는 경우가 꽤 있다.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는 식'으로. 그리고 그들은 보통 대중을 무시한다. 그러나 상품은 나쁜 것이고, 작품은 고결한 것이라는 인식은 창작자를 스스로가 만든 동굴에 갇히게 한다. 결국 자기만족에서 그칠 것이 아니면 '누가 사줘야'한다. 사람들이 살만한 것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창작자는 자신이 원하는 '작품'도 할 수 있다.


88년 대학가요제에서 입상한 어린 신해철은 본대 밴드를 하길 바랐으나 당대 환경은 밴드를 하기에 좋지 않았다.(사실 거의 언제나 좋지 않았다.) 신해철이 '솔로'로 상업적 가치가 높다고 판단한 기획사들은 모두 솔로 계약을 제안했다. 음악을 계속하고 싶었던 신해철은 음악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일단은 솔로 앨범을 부단히 만들었다. 그런데 신해철의 '상업적'이고 '창작자 자신이 덜 희망한' 솔로 앨범이 '작품'으로서 가치가 못하는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그 앨범들은 작품이자 상품으로 분명한 가치가 있다.


드라마 닥터 후에서 후대에 재평가 받는 자신의 그림을 보고 우는 반 고흐


어떤 창작자의 작품이 너무나 '선진적'이어서 당대 대중이 이해를 하지 못하거나 시대의 수준보다 월등히 높은 작품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역사적으로 그런 작품은 원래 당대에 사랑을 받기는 원래 어려웠다. 정말 좋은 작품성이 있다면 언제든 누구에게든 사랑은 받는다고 믿는다. 다만 그 시대가 '당대'가 아닐 수도 있을 따름이다. (고흐가 그랬다.) 그런데 뉴미디어 시대가 도래했고, 예전보다 우리는 대중에 발견되기 쉬워진 것 같기도 하다. 창작자의 '나쁘지 않은' '부단하고 꾸준한' 시도가 있다면 누군가는 그 시도를 고평가하고 창작자를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연다. “꾸준함 없는 재능이 어떻게 힘을 잃는지, 재능 없는 꾸준함이 의외로 얼마나 막강한지‘알게 되었다는 이슬아 작가(<일간 이슬아> 발행인, 헤엄출판사 대표)는 창작자들에게 상품이 되는 작품의 새 모델을 제시했고, 오늘날 제법 많은 창작가들이 이슬아의 모델을 참고한다. 그들은 큰 성공은 아니어도 적어도 창작자 1명은 먹고 살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상품말고 작품


전업창작자가 아닌 나는 어떠할까? 솔직히 나는 대단한 작품을 지향할 만큼 대단한 예술혼은 없는 것 같다. 그저 매번 시도당 가능한 최선을 다할 따름이고, 그 과정과 결과를 대중이 사랑해주길 바랄 따름이다. 그런데 상업성의 딜레마랄까? ‘누가 좋아해줄지만 생각하면’ 창작은 길을 잃는다. ‘작가’는 사라진다. 이 지점에 괴로워하는 창작자들이 많다. 그저 자신은 장사꾼이 된 기분이라고.(많이 팔리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앞서 작품이 무엇인지는 향유하는 이들이 평가하고 느끼는 것이라 말한바 있다. 또 ‘잘 팔리면’ 상품이라고도 했다. 이러한 정의가 작품과 상품의 경계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창작자가 무엇을 ‘작품’이라 여기는지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 기준은 창작자가 ‘나’를 얼마나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투영시켰냐는 것. 많은 창작자들이 썩 별로인 작품을 내면서도, 작품에 대한 비판을 자신에 대한 비판과 동일시 여기는 현상은 이러한 이유 때문은 아닐까. (나도 좀 찔린다.) 작가가 작품이라 말하는 기준이 ‘나의 투영 정도’라면 작품은 많은 이에게 가치를 가지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창작자가 ‘나’를 잃으면 누군가 나와 나의 창작을 사야할 이유도 없어진다. 대단한 기술적인 성취로 감탄을, 대체못할 이야기로 감동을 주는 것이 어렵다면, 적어도 창작에는 ‘공감’이라도 있어야 한다. 공감조차 할 수 없다면 그 창작은 소비재로써 최소 가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창작에서는 ‘나’를 잃으면 안된다. 창작자로서 자신의 감성과 이야기, 심지어는 영향을 받은 것의 재해석도 ‘나’다. (그러나 자신이 아닌 것을 자신의 것인양 착각하면 아류가 되기 쉽다.) 어차피 창작의 과정은, 어쩌면 창작의 본질은 끊임없는 자기 의심이다.


그러니 창작자여 나를 믿자.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자. 창작자여. 나를 잃지 않도록,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그리고 ‘부단하고 꾸준한 노력’으로 묵묵히 쓰고, 그리고, 노래하고, 연주하자. 그 밖에 여러 방법으로 나아가자. 부디 우리의 창작이 아름다운 작품이 될 수 있길, 우리의 작품이 당대에 많은 사랑을 받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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