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출간 작가의 콘텐츠에 대한 생각과 유-우명해질 궁리
*이 글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자전적 글입니다.
글은 길고 신변잡기적 느낌이 있겠습니다만, 여러분께도 유익한 생각의 지점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은 태생이 쉽게 심심함(시간과 마음에 자극이 없는 공백감이라 해두자)을 느끼는 존재다. 그래서 인간은 재미를 원한다. 재밌는 것을 같이 하면 재밌지만 인간들은 늘 같이 할 수는 없으므로, 또 그것은 피곤할 수 있으므로, 같이하고도 (돈과 시간만 쓰고) 재미 획득에 실패할 수도 있으므로 혼자서도 손쉽게 재미를 채울 '뭔가'를 찾는다. 그 뭔가란 주로 콘텐츠다. 콘텐츠란 볼 것, 들을 것, 할 것이다. 최근에는 기술 발달로 우리는 언제든 일상의 공백을 채울 '뭔가'에 노출될 수 있게 됐다. 스마트폰으로 인해 우리는 텍스트, 영상, 게임을 어디서든 즉각적으로 소비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유튜브,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영상 콘텐츠는 거대한 파도처럼 몰려와서 우리 일상을 가득 채워버렸다. 이제 유튜브를 안 보는 사람들을 찾기란 어렵다. 하지만 나는 영상 콘텐츠가 크게 부상해서 전체 콘텐츠의 '분모'를 키웠을 뿐, 다른 콘텐츠(주로 텍스트)들의 파이가 줄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콘텐츠들은 늘어난 콘텐츠 '분모'만큼 분자가 늘지 않은 분수일 따름이다. 비영상 콘텐츠도 전체 콘텐츠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줄었으나 절대 크기는 늘었으면 늘었지 줄지 않았다. 오히려 뉴미디어 환경(인스타, 유튜브 등) 덕에 다른 창작자는 방송 없이도 발견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도 했다. 바야흐로 대 콘텐츠 시대가 열린 것이다.
대 콘텐츠 시대의 창작자들은 '알리고자 한다면' 뉴미디어 환경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새 시대의 심심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도 이해해야 한다. 쓰는 이에게 이슬아 작가는 대단히 영감을 주는 롤모델이다. 몇 해전 작가는 이메일로 주 5일 동안 에세이를 발행하는 <일간 이슬아>를 시작했다. 그렇게 몇 년을 꾸준히 했다. 작가는 누군가는 영상 말고 사람 냄새나는 글을 부단히 읽기를 바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과연 그녀는 부단히 썼고, 부단히 글을 이메일로 배달했다. 이메일로 배달되던 일상의 냄새가 나던 글은 이제는 인쇄된 책이 됐다. 부단히 꾸준히 쓴 그녀는 자신의 말처럼 "꾸준함 없는 재능이 어떻게 힘을 잃는지, 재능 없는 꾸준함이 의외로 얼마나 막강한지" 알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콘텐츠의 궁극은 그 자신이 콘텐츠가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글을 참 잘 쓰는 이슬아 작가는 이제는 그 자신이 콘텐츠가 되어 노래도 하고 대담도 한다. 아마 이슬아 작가의 팬들은 작가가 시나몬 라떼를 마시며 그냥 그날 있던 일을 말하는 모습만 봐도 즐거워할 것 같다. 나 역시 그렇다. 여담으로 최근 노홍철 씨가 유튜브를 시작했는데, 별다른 기획과 편집이 없지만 구독자들은 유튜브에 등장한 노홍철이라는 사람 자체를 좋아한다. 물론 이는 그가 오랫동안 부단히 강력한 캐릭터를 구축해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람들은 그의 캐릭터를 그리워했고 기다려왔던 것이다.
한편 나는 올 초에 책을 냈다. 그리고 책을 내고 나서 콘텐츠를 만들고 싶은 사람으로서 또 그것이 업이 되길 바라는 사람으로서 고민은 더 깊어졌다. 앞으로 내가 만들 것이 '팔려야' 나도 계속 만드는 이로 살 수 있는 까닭이다. '나와 나의 작업물이 대중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는 것' 나는 그것을 해낼 수 있는 걸까?
올 2월 첫 책 <제대로 살기란 어렵다>를 냈다. 책을 내고 나면 한동안 판매 점수와 책에 대한 평가가 어떤지 이상하리만큼 관심을 가지게 된다. 사실 스타 작가가 아닌 이상 비평의 절대량도 성의 있는 비평자도 기대만큼 많지 않기 마련이다. 이때 ‘제대로 읽어준’ 이들의 좋은 평가는 창작자에게는 큰 힘이 된다. 감사하게도 존경하는 김창완 선생님이 아침 라디오에서 내 책을 낭독해주셨고, 정말 정말 팬인 북 튜버 공백님이 책을 소개해주셨다. 두 분은 꽤 긴 시간 동안 책을 비중 있게 다뤄주셨고 호평도 해주셨다. 또 반디엔루니스의 <오늘의 문장>으로도 선정되었고, 경제지인 이투데이와 지면 인터뷰도 하게 됐다. 이제 막 첫 책을 낸 신인작가에게는 모두 감사한 일이었다. 많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내가 쓴 글, 더 나아가 콘텐츠,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 그 가치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자뭇 아쉽다
명백히 말해 어떤 책 하나를 썼다고 (정말 문제작이나 불세출의 명작이 아니라면) 쓴 사람의 삶은 그다지 변하지는 않는다. 책을 내기 전에는 "책만 내면...!"을 되뇌며 만사가 잘 풀릴 것도 같지만, 금세 유명해지고 책이 바로 완판이 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무언가를 만드는 길로 들어선 이상 창작자는 더 많은 사랑을 받기를 원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문제는 기대만큼 대중에게 사랑받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얼마 전 이 문제(?)의 고견을 구하고자 퍼스널 브랜딩을 꽤 잘하고 있는 분을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은 인스타를 참 잘한다. 운동이라는 영역에서 '건강하고 밝은 이미지'를 잘 브랜딩하고 있는 분이었다. (어떤 분인지 특정될 수 있어 자세히 말하긴 어렵다.) 나를 만나본 그분의 평이자 조언은 이랬다.
희철 님의 콘텐츠들은 '자세히 보면' 다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희철 님이 알려지자면
하나의 키워드로 모이는 일을 해야 해요
동감한다. 내가 만든 것들을 자세히 하나하나를 보는 사람은 많지 않고, 당장 나부터 타인과 그 결과물을 볼 때 그렇다. 알려지자면 꾸준히 이어지고 누적되는 '어떤 기대'를 줘야 한다. 그리고 그 누적된 기대를 지속적으로 충족시켜줘야 한다. 어떠한 의미에서 그 기대는 '창작자'를 가두는 족쇄 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기대를 깨는 것은 창작자에게는 특히나 '기대된 자기'에 대해 파괴적이기 쉽다. 그래 나 책에도 그렇게 적었잖아.
선택의 누적은 나를 형성한다. 의도한 좋은 선택이 누적되면 '자기다움'이 생긴다. 화가의 작품 가격은 그 작가가 만든 사조에 충실할수록 대체로 높다. 사조를 벗어난 '의외작'은 잠시의 파격은 될 수 있어도 웬만해서는 사조를 이어간 작품의 가치를 넘어서지 못한다. 미술 하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당연하지"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그 이유가 좀처럼 이해가 안 됐다. 자기 사조를 만들고 그것을 벗어나는 선택을 하지 않게 되는 것. 나를 보는 이들에게는 일종의 예측 가능성이자 안정성이다.
피카소는 피카소식의 추상화를 그릴 때 가장 피카소답고 그래야 작품의 가치가 높다. 루벤스의 작품을 보면 루벤스(혹은 그의 조수들이)가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작품은 구분할 수 있는 독창성(오리지날리티)가 있다. 다른 분야 아티스트들도 그렇다. 오아시스는 오아시스다워야 하고, 들국화는 들국화다워야 한다. 무슨 유교의 정명론('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같기도 하지만 좋은 선택이 이어지고 그것이 일관적일 때 선택 주체의 가치는 극대화된다. 물론 큰 성취를 거둔 이들은 끊임없이 모험을 했다. 하지만 그 모험은 이전 세계를 단순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결정과 선택으로 형성한 자기 세계를 '넓히는' 과정에 가까웠다.
당신의 결정과 선택이 자기만의 오리지날리티를 만들 수 있는 과정이었으면 좋겠다. 당신이 무언가에서 좋은 시작을 했다면, 이어지는 선택에서 그 성취를 딛고 이어서 밀고 나가야 한다. 창작에서도 커리어도 마찬가지다. '하나'로는 부족하다. 운 좋은 한방은 결정과 선택 밖의 것이다. 결정과 선택은 하나의 점이 아니라 이어지는 선이어야 하고, 그 선은 '자기다움'을 짙게 만드는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제대로 살기란 어렵다> p.79
그런데 지금 문희철은 뭐하는 사람이지?라는 말에 나의 키워드를 바로 뽑아내기란 쉽지가 않다. (아 막 책 한 권 썼어요 정도?) 지금까지 나는 '하나의 키워드로 모이는 일'을 하지는 않았다. 하나의 길로 결정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고 솔직히 좀 게을렀기 때문이다. 새로 시작한 창업에 합류하랴, 2018년 9월에 재입학한 학교를 다니랴 2019년 한 해에는 책을 쓰느라 바빴다는 핑계가 주요했다. 이는 작년 하반기(책 다씀), 길게 봐야 올 상반기(막 학기 끝남)까지만 유효한 핑계였다. 이제는 더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시도를 안 한 것은 아니었다. 유튜브, 팟캐스트에서 제법 시도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충분히 유효한 시도는 아니었다. '재능 없는 꾸준함'을 해내지 못했던 탓이다. (반대로 내가 책을 쓸 수 있었던 가장 큰 동인은 1주 1 원고를 3달 동안 해낸 덕이었다.) 책도 냈고 이제는 쉴 만큼 쉬었다. 쓰는 이 이전에 콘텐츠 창작자, 그러니까 크리에이터로서 나에 대해 질문을 해봤다. 뭘 하자면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무엇을 잘하고 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야 하니까.
나의 정체성에서 가장 큰 고민은 내가 '기획자'인가 '창작자'인가 하는 것이다. 이게 무슨 JYP(박진영)는 가수인가요. 프로듀서인가요. 사장인가요. 같은 얘기인데 (전부 다 맞지만) 이 질문의 본질은 무엇에서 가장 탁월하고 잘하느냐는 것이다. 기획자와 창작자는 기본적으로 '없던 것을 있게 한다는 점'에서 같지만, 분명 차이가 있다. 굳이 나누자면 기획자는 콘텐츠가 얹히고 유통되는 구조를 만드는 사람이고, 창작자는 '재미를 채울 뭔가' 그러니까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다. 나는 사실 둘 다 좋다. 그리고 아직 내가 어느 쪽에서 더 탁월한지 판단을 내리기엔 아직 둘 다 너무 설익었다고도 생각한다.
좋은 기획자가 되자면 주변의 상황과 자원을 잘 파악하고, 이것들을 의도에 맞게 잘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기획자로서 내가 뭘 해봤나 생각해보면 7년 간 창업을 해봤었다. 비록 20대 내 삶을 꽤나 돌아가게 했지만(늦은 입대와 대학 자퇴 및 재입학) 덕분에 브랜드와 오프라인 행사를 기획하고 웹 서비스를 운영하는 경험을 해봤다. 그 밖에는 21살 때부터 내 머리를 해주셨던 헤어 디자이너 에스크 선생님(이하 '쌤')이 아프리카 방송과 유튜브를 하도록 강권하고 도왔던 것 정도겠다. 사석에서 쌤은 입담이 재밌는 사람이었고, 무엇보다도 머리를 정말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만 알고 있기 너무나 아까운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유명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유튜브보다는 아프리카 방송에 집중하기로 했다. 쌤과 방송을 시작했던 2016년 1월에는 아직 유튜브가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전이었고, 아직 완성된 영상을 업로드하는 것이 바로 결과로 돌아오지는 않았던 시기였다.(한국 유튜브에 실시간 방송도 슈퍼챗도 없었다.) 그래서 방송을 위한 좋은 연습으로 실시간 스트리밍이 가능한 아프리카 방송을 먼저 해보기로 했다. 당시 쌤이 부원장으로 있던 순시키 헤어를 장소로 활용하고, 스트리밍용 컴퓨터도 직접 조립해서 인프라도 갖췄다. 그때의 쌤은 '아직'은 시술과 말을 동시에 하는데 적응을 하기 전이어서 나는 방송의 주제를 스크립트로 만들고, 진행하는 '문 작가' 역할을 수행했다. 쌤께 약간의 수고비를 받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그냥 이 모든 과정이 즐거웠다.
시작하고 머잖아 아프리카 크리에이터 순위로 1000위 안까지 진입했다. 이어서는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다. 그러다 나는 2016년 10월에 미루고 미뤘던 군대를 갔다. 그 무렵 아프리카에서 헤어 콘텐츠를 같은 시기에 시작했던 금강연화 님이 너무나 잘되고 있고, 지금도 쌤과 금강연화 님은 긴밀히 잘 지내고 있다고 들었다. 비록 쌤이 지금 미용실 경영으로 바쁘지만 금강연화같이 인플루언서로도 더 잘 풀리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dapZEClDnbQ
그러고보니 흐지부지됐지만 형 친구가 리뷰 채널을 만들고 싶다고 해서 스크립트를 쓰고 출연하고 용돈을 받은 기억도 난다.(아 나 작년에 열심히 살았네..^^;;)
창작자로서는 2018년 7월 전역 후 미식 리뷰를 하는 회사의 콘텐츠 포트폴리오를 위해 만든 유튜브 영상도 내게는 좋은 경험이 됐다.
저 이후로 꾸준히 유튜브를 했으면 좋았겠지만, 그해에는 책 쓰기와 학교가 더 중요했다. 아무튼 책 한 권 집필을 마무리지었고, 나쁘지 않은 비평을 얻었으니 꽤나 성과는 있었다. 그런데 나는 나는 창작자, 그러니까 만드는 이로서 '쓰는 이'로만 살고 싶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무언가의 재능이 그 무언가에 몰두하는 정도라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나는 쓰기 이외에 하고 싶은 것이 많으니 쓰기가 (마치 한강 작가처럼) 나의 극강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쓰기만으로 나는 특별해지기 어렵다.
굳이 말하면 책날개 저자 소개에 적었듯 '말하고 쓰고 노래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데 각각은 나의 극강점은 아니다. 말하기 이외에, 쓰기 이외에, 노래하는 것 이외에 '하고 싶은 것'이 많은 탓이다. 나는 하나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일반인 치고는 그럭저럭인 노래실력(모자라나 그렇게 말할 자신이 있다.)에도 불구하고 프로 가수가 아니고 그래서 나는 프로 방송인(또는 아나운서)은 아니다. 다만 나는 더 많은 대중에게 사랑받길 바란다. 내가 만드는 것은 대중에게 다가가는 과정의 일환이어야 할 것이다.
작품 말고 상품 만들어야지?
이 말은 광고하는 사람들, 온라인에서 커머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이 늘 새기는 말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누가 당신에게 돈을 주고 있는지 자각하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우리가 흔히 예술이라 말하는 문학, 미술, 음악도 본래 귀족과 왕족 같은 고귀한 후원자의 '메세나'로 유지되어왔다. 후원자인 메디치 가문에 간언을 하고자 마키아밸리는 '대중'이 아닌 고귀한 한 분을 위해 <군주론>을 썼고, 헨델도 모차르트도 후원자를 위해 많은 곡을 썼다. 시대가 변하며 대중이 '주요한 소비' 주체가 되면서 메세나의 특권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나눠가질 수 있게 됐을 뿐, 창작자가 먹고사는 본질은 누군가가 나의 창작물을 '사주는 것'이다.
탁월한 작품과 탁월한 상품이 꼭 충돌하는 관계는 아니다. 그 경계는 시대와 상황과 사주는 사람이 결정한다. 다만 만들어진 당대에 팔리면 상품이고, 그렇지 않으면 '상품이 아닐 뿐'이다. 그런데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작품인 것은 또 아니다. 작품은 내가 만든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이것을 향유하는 이들이 평가하고 느끼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작품을 하겠다는 꽤 많은 사람들의 태도에 상업성을 지나치게 경시하는 경우가 꽤 있다.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는 식'으로. 그리고 그들은 보통 대중을 무시한다. 그러나 상품은 나쁜 것이고, 작품은 고결한 것이라는 인식은 창작자를 스스로가 만든 우물에 갇히게 한다. 결국 자기만족에서 그칠 것이 아니면 '누가 사줘야'한다. 사람들이 살만한 것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창작자는 자신이 원하는 '작품'도 할 수 있다.
88년 대학가요제에서 입상한 어린 신해철은 밴드를 하기를 바랐으나 당대 환경은 밴드를 하기에 좋지 않았다. 신해철이 '솔로'로 상업적 가치가 높다고 판단한 기획사들은 모두 솔로 계약을 제안했다. 음악을 계속하고 싶었던 신해철은 음악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일단은 솔로 앨범을 부단히 만들었다. 그런데 신해철의 '상업적'이고 '창작자 자신이 덜 희망한' 솔로 앨범이 '작품'으로서 가치가 못하는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그 앨범들은 작품이자 상품으로 분명한 가치가 있다.
어떤 창작자의 작품이 너무나 '선진적'이어서 당대 대중이 이해를 하지 못하거나 시대의 수준보다 월등히 높은 작품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역사적으로 그런 작품은 원래 당대에 사랑을 받기는 원래 어려웠다. 정말 좋은 작품성이 있다면 언제든 누구에게든 사랑은 받는다고 믿는다. 다만 그 시대가 '당대'가 아닐 수도 있을 따름이다. (고흐가 그랬다.) 그런데 적어도 뉴미디어 시대에는 창작자의 '나쁘지 않은' '부단하고 꾸준한' 시도가 있다면 누군가는 그 시도를 고평가하고 그 시도와 창작자를 위해 기꺼이 지출한다. 큰 성공은 아니어도 창작자 1명은 먹고 산다. 마침 나는 대단한 작품을 지향할 만큼 대단한 예술혼은 없다. 그저 시도당 가능한 최선을 다할 따름이고, 그것을 대중이 사랑해주길 바랄 따름이다. 그러니 나쁘지 않은 '상품'으로서의 창작물을 만들어야 한다. 꼭 새로운 것이 아닐 수 있겠다. 새로운 것보다는 내 관점으로 해석하고 연결하고 정리한 무엇이어도 되겠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일로 성공하자면, 아나운서 친구가 말하길 '캐릭터'가 좋든가 '콘텐츠'가 좋아야 한다더라. 또 둘 중에는 캐릭터가 더 효과가 강하단다. 앞서 말한 '그 자신이 콘텐츠'가 된 단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캐릭터 만들기가 억지로 될 것은 아니다. 캐릭터는 캐릭터인 대상이 가진 '속성'에 기반해서 '꾸준히 노출되어야'한다. 생각해보니 이슬아도 노홍철도 그랬겠다 싶다. 두 사람은 캐릭터를 쌓는 시대가 달랐지만, 이슬아는 뉴미디어 시대에 사람 냄새나는 긴 글을 썼고, 부단히 그것을 메일로 날랐다. 노홍철은 방송국의 PD가 그의 똘기를 보았을 테고, 꾸준히 그 캐릭터가 전파를 탔겠다. 나도 역시나 '부단히 꾸준히' 구축한 캐릭터가 노출돼서 팬들이 그것을 익숙하게 생각해야 한다. 내 캐릭터가 될 것의 근간은 내가 쓰고,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심심하면 노래도 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것들을 버리고 갈 수는 없겠지만 선후는 정해야 한다. 그것에 집중해야 한다. 다행히 내게는 '검증된' IP인 책이 있다. (마침 유튜브에서 어떤 분이 내 책을 낭독하고 있더라) 작가가 자신의 책을 직접 읽고 그 배경을 이야기하는 콘텐츠를 만들어야지 싶다. 그러니까 부단하고 본격적인 시도는 (보이는) 오디오 콘텐츠로 해봐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있다. 책을 내고 나서 한동안 글을 안 쓰고 구상(이라 쓰고 사실 놀았다고 읽는) 시간을 보내며 유튜브를 참 많이도 봤다. 또 막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장롱 면허였다) 운전을 하다 보니 왜 라디오가 망할 수 없는지 알 것 같았다. 한국인이 길에서 버리는 시간은 OECD에서 가장 길고 이들은 운전을 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마침 한국의 블루투스 이어폰은 특이할 정도로 많이 팔린다고 한다. 듣는 콘텐츠는 특히나 한국에서는 불멸이다.
보기가 주가 되는 콘텐츠보다 듣는 콘텐츠들은 '시간을 흘려보내기' 위해 듣는다. 유튜브 콘텐츠는 보통 5-10분 사이 클립으로 정말 길어봐야 20분대인데, 오디오 콘텐츠는 최소가 30분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콘텐츠의 유형은 아주 크게 보면 1) 자기 전에 "나긋나긋" 틀어놓는 감성 자극형 2) 정보를 주는 유용성/ 학습형 3) 재밌는 사람들의 재미있는 대화 정도가 아닌가 싶었다.
또 이 콘텐츠에 집중하게 된 이유는 촬영과 편집의 용이성도 있다. 작년 연말에 문득 생각이 나서 그것을 그냥 한 번 시도해봤다. 낭독한 글로는 12월 31일 서른이 되기 하루 전 쓴 글이었다.
https://brunch.co.kr/@moonlover/54
https://www.youtube.com/watch?v=1edChQA5VSQ&t=2s
이 콘텐츠가 사랑받을 수 있을까? 아직 잘 모르겠다. 안 해봤으니까. 사실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유효한 나의 최소 팬층이 생기기 전까지는 계속 책 낭독과 집필 과정에서 알아본 정보들의 콘텐츠로 가봐야겠다. 구상 과정에서 다음 채널들을 참고하고 있다.
https://www.youtube.com/user/dudtjs426
https://www.youtube.com/channel/UCvdvPu_7TTcrZz1nGh98Sqg
https://www.youtube.com/channel/UCraFvs6dqAMkWgxuZUVrlgg
결국 이 분들은 모두 '말'을 한다. 나는 쓰면서 말을 해야지. 누군가가 나와 나의 창작물을 소비해 것인지, 상품으로써 나와 나의 창작물은 어떠한 가치가 있을지 부단히 시도해봐야겠다. 만약 이 과정에서 누군가 내게 기대를 준다면, 그것을 배반하지 말아야지. 결국 인기와 관심은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 대가니까.
더 열심히 쓰고 열심히 찍자
스트러글!
p.s
긴 신변잡기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아직은 무명작가 문희철과 콘텐츠를 사주시옵길(구독 또는 책 구매)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할게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LWBGf7FmFQ7qXguhefGKK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