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단지 시험공부일까?
공부(工夫)를 사전에서 찾으면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을 의미하는 명사라고 나옵니다. 사전적인 정의를 따르면 공부의 범위는 매우 넓어집니다. 사실 세상 모든 것에 대한 탐구가 공부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패션에 대한 공부’, ‘물고기 잡이에 대한 공부’, 하다못해 ‘게임에 대해 깊게 탐구하는 것’도 공부입니다. 다만 좋은 공부란 대상, 생각 또는 사물에 대한 깊은 탐구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러분에게 공부는 아마도 ‘시험 공부’일 것입니다. 한국의 교육 제도는 12년 동안의 초중고 과정에서 ‘시험 성적에 따라 학업 성취도’를 평가합니다. 그리고 시험 성적은 상위 학교 진학에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상위 학교의 진학 여부는 진로의 선택에 아주 많은 영향을 줍니다.
쉽게 말해 한국 교육 시스템의 핵심은 시험 잘 보고 좋은 전교 등수 받고 좋은 상위 학교에 진학하는 것입니다. 그 이후의 삶에도 좋은 영향을 줄 테니까요. 이것은 분명 경쟁적입니다. 입시 위주의 교육이 많은 폐해를 낳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적으로 ‘나쁘기만’ 한 것일까요?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발언을 단편적으로 보면 한국 교육을 받고 있는 여러분은 오바마가 ‘미쳤다(Mad)’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육 체계는 지나친 경쟁으로 분명히 엄청난 폐해가 있는 체제인 것도 사실이니까요. 오바마가 미치지 않았다면, 그가 말한 발언의 맥락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음 장에 발췌한 기사를 읽어보시죠.
‘오바마는 왜 한국 교육을 부러워할까?’ (2009.06.01.) 한겨레 신문 중
교육평론가 이 범
오바마가 개혁 대상으로 삼는 미국 교육의 실상을 살펴보면, 학력 수준은 국제 학력 비교평가에서 중하위권이고, 일부 지역은 고등학교 중도탈락률이 40%에 이른다. 그런데 미국 교육의 진짜 문제는 이런 거시적 지표의 이면에 있다. 바로 양극화가 지역별로 고착화되어, 교육을 통한 계층 상승 따위는 아예 포기해버린 지역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심지어 소수 인종 비율이 높은 저소득층 밀집 지역에서는 열심히 공부하면 친구들로부터 괴짜 취급을 받거나 경원시되기도 한다. 폭력 사건이 빈발해서 학생들을 금속탐지기로 검사하는 학교도 있고, 교사들이 호신용으로 권총을 지참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런 지역 학교들이 중도탈락률을 높이고 평균 학력을 까먹는 주범임은 불문가지다.
특히 지방분권적 교육재정으로 말미암아, 이런 문제가 보정되지 못하고 오히려 악화된다. 미국에서는 전체 공립학교 운영 예산 가운데 절반가량이 교육 구별로 걷히는 재산세로 충당된다.
그런데 미국의 교육 구는 교육 구당 평균 주민이 2만 명 정도이므로, 우리나라의 웬만한 동 수준밖에 안 되는 상당히 작은 단위이다. 고소득층 거주 지역은 재산세가 많이 걷히니 학교 시설과 교사진이 좋다. 하지만 저소득층 거주 지역의 학교는 가난하다. 극단적인 경우 (미국에서는 방학에는 교사 월급을 지급하지 않으므로)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해 방학 시작을 앞당기기도 한다.
미국에서 부유한 지역의 공립학교와 일부 사립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아주 질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MS를 세운 빌 게이츠와 Facebook의 설립자 마크 저커버그를 비롯하여 미국을 이끄는 수많은 인재들은 (최고 수준의 비용을 지불하고)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창의적으로 키운 환경이지요.
그러나 많은 경우에서 일반적인 미국 국민에게 돌아가는 교육은 뛰어난 학업 성취도 이전에 ‘평균적인 인재’를 만들어내는 기본적인 기능조차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현실에서 한국 교육을 보자면, 한국 교육은 상당히 괜찮은 것입니다.
거의 모든 국민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글을 읽고 쓸 줄 알며, 심지어 고교 졸업자의 대학 진학률은 80% 가까이에 이릅니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평균적인 인재’를 아주 안정적으로 많이 양성해낼 수 있는 시스템인 것입니다. 오바마가 부러워할 만 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여러분이 배우는 교과 과정을 잘 관찰해보면 상당히 잘 설계된 체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탐구 영역의 윤리와 사상, 그리고 법과 정치의 내용은 서로가 매우 강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실제 대학에서 더 높은 수준의 학문을 하는 데에 필요한 ‘자양분’들이 우리 교육 과정 곳곳에 심어져있습니다. 믿기 어렵지만 우리는 세계 평균으로는 제법 괜찮은 교육 시스템에 있는 셈입니다.
** (일례로 우리 수학 교과과정이 다루는 통계학은 자연계는 물론이거니와 모든 사회과학 분야에서 널리 활용됨. 아주 쉽게 말해서 모르면 ‘절대’ 안됨.)
물론 ‘입시 체제의 경쟁성’이 가져온 폐해는 앞서 언급한 한국 교육의 괜찮은 점들을 상쇄하고도 남습니다. 다른 칼럼에서 보다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이미 사회가 인정하는 룰을 완전히 배제하고 우리는 승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이기기 위한 공부는 ‘시험을 잘 보는 것’을 기본으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적용되는 다른 평가 기준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공부라는 말보다 ‘배움’이라는 말을 좀 더 좋아합니다. ‘시험을 통한 평가’가 공부의 전부는 아닌데, 공부는 마치 ‘공부=시험 잘 보기 위한 것’으로 용법이 굳어진 것 같거든요.
다음 글은 배움에 대한 제 생각을 담은 글입니다.
저는 배움을 크게 2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는 ‘텍스트를 읽고 쓰며 느끼는 깨달음’이며 또 다른 하나는 ‘경험에 의한 통찰’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공부’와 ‘경험에 의한 통찰’은 적절한 균형을 이룰 때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배움을 얻으면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 쉽습니다. 먼저, 텍스트만 익히는 것은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강의실과 책에서 익힌 깨달음을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고 검증하며 조정해나가야 합니다.
반대로 경험에 의한 통찰에만 의존하는 것은 사물과 대상에 대한 편견을 가지기에 쉬운 조건입니다. 사람은 일생 동안 세상의 극히 일부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없고, 어디에나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몰입하고 자신의 많은 것을 던질 수 있는 분야는 한계가 있습니다.
작은 조직에서는 이러한 한계를 가진 리더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본 것을 세상의 전부라 믿을 것입니다. 결국 두 배움은 적절한 균형과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됩니다.
창조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해왔던 것의 연결이고 조합입니다.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연결하고 융합하여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스마트폰도, 컴퓨터도, 자동차도 우리가 익숙해하는 거의 모든 혁신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연결 이전에 우리는 연결할 것들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많은 넓이와 깊이의 ‘배움’을 얻고자 노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영역에서, 더 나은 결과를 위한 탁월함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