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을 맞은 오늘. 새삼스레 느끼는 감사함과 1인 몫의 책임
어제 밤에는 오랜만에 밤새 책을 읽다 늦잠을 잤다.
아침에 엄마가 보낸 카톡 하나를 받았다. 식탁 위에 5만원이 놓여있었다.
6월 17일. 오늘은 내 생일이다.
1990년 오늘 일요일. 저녁 8시 55분에 내가 태어났고 그 날은 참 더웠다고 했다.
내게는 19개월 앞서 태어난 형이 있었다.
엄마 말로 애기때 형은 나를 미워했다. 내 코에는 흉터가 하나있는데 3살 된 형이 긁은 거라고 하니 아마도 엄마 말이 맞을 것이다. 엄마는 형에게 미안해한다. 지금은 서른 두살이고 아들이 있는 형에게 더 사랑을 주지 못한 것 같아서 오늘도.
그때 엄마는 고작 스물 여덟이었다. 아빠는 스물 아홉이었다. 서른을 맞은 오늘 내가 아무 것도 모르니 그들도 그랬을 것 같다.
메신저와 SNS 서비스가 생일을 미리 알려준다지만 따로 설정해두지 않은 탓인지
예비군 동대와 치과에서 오는 생일 축하 문자가 오늘이 생일인가 내게 알릴 따름이었다.
오늘이 내 생일임을 아는 친구들은 축하한다 말했다. 그들은 20대 나와 창업을 함께한 동지들이다.
월요일인 6월 17일. 오늘 우리는 애써 만나지 않는다.
동지들은 각자 회사에 있다. 주말이 지난 오늘은 그들에게 가장 분주한 날일 것이다. 아직 졸업하지 못한, 출퇴근하는 일을 하지 않는 내게 오늘은 그렇지 않지만.
아무튼 서른 살은 우연하거나 애쓰지 않으면 서로 만나지 못한다. 그런 나이다.
저녁 7시 반인 지금 벤치에 앉아 이 글(고작 일기지만)을 쓰고 있는데 선선하다. 꼭 초가을 같다.
매주 에세이 하나는 쓰기로 마음 먹었는데 지난 한 달간은 그렇지 못했다.
5월은 몸과 마음 모두 바쁘기도 했지만 쓰려고 애쓰지 않았다.
쓰고 싶지 않았다에 가깝겠지.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는 박사 과정에 합격했다고 한다.
증권사에 다니는 친구는 석사 과정에 합격했다고 한다.
자퇴하고 제대 후 돌아온 나는 남은 학기를 다니고 있다.
시간을 밀도높게 보낸 서른 살 친구들은 달리고 있다.
나의 시간은 멈추어있거나 느리게 가고 있다.
서른 살 오늘 나는
작은 창업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매주 쓰다보니 내년 초에 책을 내게 됐다.
늦은 나이 다시 학교를 다니고 있다.
지각인생인 나의 졸업은 서른 한 살이다.
나는 나의 미래를 결코 비관하지 않으나 내 남은 생은 번듯하지 못할지도 별 볼일 없을지도 모르겠다
카톡을 보니 엄마는 엄마의 아들로 태어나서 고맙다고 했다.
나는 우리 집에 태어나서 같이 해낼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생전 할머니는 이 집에 돈만 있으면 좋겠네 라고 말하셨다는데,
정말 돈빼고 우리 집은 다있는 것 같다. 별 볼일 없는 우리집에 태어나서 나는 행복하다.
언젠가 친구 녀석이 번호를 바꾼 적이 있었다.
친구 번호의 새주인은 은퇴한지 10년은 족히 지났을 할아버지였다.
노년 특유의 꽃 사진과 더불어 대화명이 참 기억에 남는다.
"할 수 있을 때가 가장 좋을 때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괄목하게 잘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30년전 우리 엄마 아빠가 기대했던 오늘이 당신들이 바라던 모습은 아닐지 몰라도
당신들은 꽤나 괜찮은 30대 초반 아들 둘. 고3 딸 하나를 낳고 강아지도 잘 키우고 있다.
퍽 행복한 것을 보면 내 남은 여생도 엄마 아빠만큼은 해낸다면 잘 산 것이겠지.
별 볼일 없고 돈 없는 우리 집이어도 우린 행복하니까
내게도 꿈이 있다. 포기 하지 않겠으나 대단한 성공이나 꿈을 위해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
서른 살 생일 나는 생각한다.
다만 아파오는 엄마 무릎이, 아빠 치아를 치료받기에
1년에 한 두 번은 다같이 여행을 떠나기에 충분할만큼은 돈을 벌어야지
그러고도 하고 싶은 것을 할만큼은.
나는 아직 할 수 있는 때.
가장 좋은 시간을 지나고 있다
다시 쓰기
시작할 것이다.
내 삶의 1인 몫만큼의 책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