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이 흐르는 수도원 회랑을 걸으며
벨렝(Belem) 지구에 내려 처음 들른 곳은
제로니무스 수도원.
후기 포르투갈 고딕 양식인
마누엘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1495년에 처음 지어져
500년이 넘는 역사를 품고 있는 이 곳은
한 때 부유했던 포르투갈의 국력을 대변하듯
화려하면서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니
회랑이 둘러싸고 있는 정원이 나오고,
나는 정원의 중간쯤에 멈춰 서서
고개를 살짝 든 채 시선을 앞으로 고정하곤
컴퍼스처럼 몸을 한 바퀴 빙 돌아본다.
컴퓨터로 작업한 것만 같은 회랑의
완벽한 대칭과 반복적 구조에서
절도 있는 기품이 느껴지면서
괜스레 마음이 경건해진다.
회랑 안 2층으로 올라가
조용한 이 길을 걷고 또 걷는다.
정사각형의 회랑 복도를 한 바퀴 두 바퀴 돌아
걷다보니 어느새 내가 여기서 얼마만큼이나
걸었는지 가늠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어쨌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에게도, 어떤 생각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 지금 여기 나, 이 시간이
너무 좋을 뿐이다. 더할나위없이 평온한 시간.
그렇게 나는 이곳의 일부가 된 것처럼
나 자신을 잠시 잊은 채 계속해서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