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입학 후 한 달이 지났을 무렵 학교 급식이 시작됐다. 그렇게 엄마가 싸주던 도시락도 끝이 났다.
엄마는 식구 많고, 제사 많고, 친인척 많은, 심지어 4대가 모여사는 집의 맏며느리였다. 증조할머니가 계셨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형제들도 많아 우리 집에는 어른들이 수시로 방문했다. 제사나 명절에는 시골에서 온 방문객이 며칠을 머물고 가기도 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우리 집 밥상은 늘 어른들 입맛에 맞춘 토속적인 반찬이 가득했다. 나는 그 밥상을 시골밥상이라며 몹시 싫어했고 매일 같이 반찬 투정을 했다. 나이가 들고, 독립을 한 후에야 내가 시골밥상이라고 지칭했던 엄마의 밥상이 귀한 반찬으로 가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뒤늦게 생각해보니 식구 많은 집, 어른들 반찬을 매일 만들 때보다 엄마가 더 신경 써서 만든 반찬은 오빠와 나의 도시락 반찬이었을 것 같다. 학교에 가져가는 점심 도시락은 엄마의 솜씨와 정성을 확인하거나 때로는 비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엄마는 도시락 반찬으로 햄을 넣어도 꼭 계란옷을 입혀 구웠고, 참치캔은 양파, 고추, 깻잎 등을 넣은 참치전이 됐다. 어떤 날은 계란옷과 깻잎에 감싸진 후랑크소시지를 비스듬히 잘라 넣어주었다. 오래된 기억을 들쳐보면 학교 급식을 가장 반겼던 사람은 엄마가 아니었을까.
나의 점심은 도시락에서 급식으로, 그리고 학식을 거쳐 경로식당(첫 직장이 복지관이었다)으로, 또다시 학식(퇴사 후 대학원을 갔다)으로 대체되었다. 그렇게 10여 년을 보내니 엄마가 매일 고민하며 싸주던 도시락은 내 기억에서 멀어졌다. 가끔 생각나는 추억도 되지 못한 채.
고등학교 급식으로 종말을 고했던 도시락은 예상치 못하게 내 나이 서른에 부활했다.
서른에 안착한 두 번째 직장에는 도시락파가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도시락파가 외치는 "밥 먹읍시다~"가 신호가 되어 큰 테이블에 사람들이 모여 앉았다. 때로는 "배달 왔습니다~"가 신호가 되어 도시락파와 배달파가 점심을 함께 먹었다. 외출파도 있고 배달파도 있었는데 왜인지 나는 자연스럽게 도시락파가 되었다. 물론 틈틈이 외식파와 배달파가 되기도 했다.
서른의 도시락이 십 대의 도시락과 가장 달랐던 것은 도시락을 내가 쌌다는 것. 내가 스물여덟에 독립했으므로 서른의 나에게 도시락을 싸 줄 사람은 나 자신 말곤 없었다. 난처한 것은 독립 전까지 나는 밥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을 툴툴거리며 먹었을 뿐. 나는 집밥 만드는 것에는 무경력자였다.
엄마의 도시락에서 졸업한 지 10여 년 만에 시작된 나의 도시락은 마트표 반찬과 인스턴트로 채워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각종 밑반찬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트표 반찬은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있을 정도로 맛있었지만 빨간 양념과 간장에 절여진 반찬 외에 더 다양하고 풋풋한 반찬이 먹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지금에야 생각해보면 집밥 무경력자인 내가 도시락파가 된 이유는 잊고 있었던 엄마 도시락의 존재 덕분이다. 불만 가득했던 엄마의 시골밥상과 도시락을 떠올리며 나는 반찬을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나의 도시락은 어느새 엄마의 도시락을 닮아갔다.
내가 반찬을 만들고 점심 도시락을 싼다는 것을 알고 엄마와 아빠는 텃밭에서 기른 각종 채소와 과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엄마와 아빠가 보내온 택배 상자는 늘 온갖 채소로 가득하다. 엄마와 아빠가 보내온 채소를 제때 먹지 않아 버리게 되면 미안함과 죄책감이 2단 콤보로 온다. 그렇기 때문에 택배 상자가 도착하면 평소보다 더 열심히 반찬을 만든다.
택배가 도착하면 엄마에게 택배가 잘 도착했다는 소식과 우리 가족이 엄마와 아빠 덕분에 먹고 산다는 고마움을 전한다. 더러는 엄마에게 우리 식구가 2인 가구임을 상기시킨다.
아토모스를 운영하는 지금도 나는 점심 도시락을 싼다.
서른의 도시락이 신선한 반찬이 먹고 싶다는 욕구와 엄마 도시락의 기억에서 출발했다면 지금의 도시락은 아주 조금은 직업정신(제로 웨이스트 스토어 운영자니까)이 발휘된다. 배달용기와 포장용기와 조금이나마 이별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