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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밤토끼 Mar 18. 2022

나의 월경 해방기

제로 웨이스트 월경용품이 가져다준 세계

숙박 워크숍이나 시외 출장과 월경이 겹치면 짐 쌀 생각에 골치가 아팠다. 갈아입을 옷, 세면도구, 노트북, 몇 가지 자료만으로도 배낭 하나가 거뜬히 채워지는데 일회용 생리대까지 챙겨야 한다니. 그래도 집으로 돌아갈 쯤엔 가방이 비워지니 조금은 홀가분했다. 다행히 나는 콸콸콸 스타일은 아니라서 적당량을 챙기면 됐지만 함께 일했던 어떤 동료는 가방 하나가 생리대로 가득 채워지기도 했다.


월경 중에는 침대에 누울 때부터 아침에 일어날 때까지 불안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바지 엉덩이 부분을 손으로 만져보거나 이불을 들춰보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자는 동안에도 느낌이 싸하면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났고 다음날 아침 부리나케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엉덩이를 넓게 감싸는 사이즈의 오버나이트 생리대가 출시되었을 때 나는 환호했고, 이전보다는 마음 편히 잠을 잘 수 있었다(대신 화장실 휴지통은 순식간에 가득 찼다).


일하느라, 귀찮아서 생리대 교체 타이밍을 놓쳐 찝찝함을 느낄 때도 있었고, 어떤 날은 가방 속에 상비해 둔 생리대가 없는 상태로 외출했다 월경이 시작되어 패닉 상태가 되기도 했다. 미리 챙겨놓은 생리대가 없을 때는 주변 사람들에게 생리대를 빌리고 다음날 생리대를 갚기도 했다. 월경을 하는 여성들에게 생리대 품앗이는 비일비재한 것이라 암묵적 연대감을 갖기도 했다.


10대 시절에는 슈퍼나 편의점에 남자 계산원이 있으면 민망함에 생리대를 구입하지 못했다. 20대에는 숨길 일도, 부끄러워할 일도 아닌데 뭐하는 짓인가 싶어 남자 계산원이 있더라도 꾸역꾸역 구입하기 시작했다. 다만 속이 비치지 않는 까만 봉투에 생리대를 담아 나왔다. 그리고 30대. 월경 경력 15년쯤 되니 생리대 구입의 민망함에서 조금 해방되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양이 많다/적다, 불/규칙적이다, 생리통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를 지인들과 종종 나눌 때가 있었다. 하지만 월경과 여성의 몸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손에 꼽힐 만큼 적었던 것 같다. 2017년에 있었던 생리대 유해물질 파동 때에도 분노의 감정과 어디 생리대가 그나마 괜찮다더라는 정보를 나누는 정도였다.


면생리대를 처음 접했을 때가 20대였지만 생리컵을 처음 사용한 36살에 면생리대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32살쯤 면생리대를 사이즈별로 구입했지만 두어 번 사용해본 뒤 면생리대는 서랍 속에서 나오는 일이 없었다. 면생리대에 대한 관심과 접촉의 경험이 이른 편이었음에도 내가 면생리대를 쉽게 사용하지 못한 이유는 주변에 면생리대를 사용하는 사람이 없었고, 나 역시 일회용 생리대만 사용해본 터라 빨아 쓴다는 것이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월경 기간 화장실 휴지통이 빠른 속도로 채워지는 것이 새삼스럽게 거슬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수영도 해요"라는 환상적인 말을 하며 생리컵 전도사(지인)가 나타났다.  


생리컵 전도사에게 생리컵을 통한 신세계와 사용법을 안내받고 생리컵 키트(누군가의 골든컵이 되지 못한 생리컵들)를 손에 넣었다. 난생처음으로 생리휴가를 사용해 하루 만에 이 컵, 저 컵을 폭풍같이 사용했다.

(좌) 서랍 속에 고이 보관 중이던 면생리대는 생리컵을 만나며 바깥으로 나왔다. (우) 생리컵 전도사가 빌려준 생리컵들. 생리컵 공유는 권하지 않음.

처음 생리컵을 사용했을 때는 혈이  것에 대비해 일회용 생리대를 함께 사용했다. 나의 경우 경도가 소프트한 것은  안에서 펴지지 않았고, 사이즈가 작은 것은  안에 넣을  매우 수월했지만 제거할  손에 잡히지 않아 정말 정말 식겁했다. 이때는 119 불러야 하는 것인가 싶어 정신이 아득해졌다.  


 시도는 당연히 완벽하지 않았다. 혈이 샐까 , 컵을  뺄까  불안했지만 이상하게 계속 도전해볼 만한 느낌을 받았다. 며칠  '안녕월경컵' 팝업스토어에서 처음으로 생리컵을 구매했다. 팝업스토어 운영자였던 스투키스튜디오의 정유미작가로부터는 "요가를 해요"라고 말을 들었다.


3,4번의 월경을 생리컵으로 보낸  불안감이 줄었고, 감이 잡혔다.  이후부터 양이 많은 날은 생리컵과 면생리대를 함께 사용하고 양이 적은 날은 생리컵만 사용한다. 생리컵과 면생리대를 함께 사용하니 면생리대 세탁에 대한 부담이 줄어 정말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일회용 생리대를 사용하지 않는다.


생리컵과 면생리대를 사용한 후 몸과 마음이 매우 편해졌다. 일회용 생리대에 비해 생리컵은 교체(정확히는 비워주는) 시간이 길어 몸이 편했고, 혈이 샐까 밤낮으로 걱정하는 일이 거의 없다. 외부 숙박 시 짐도 매우 간소화됐다. 그녀들의 말처럼 운동도 편히 할 수 있었다.


가장 좋은 점은 내 몸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고, 월경에 대한 민망함과 터부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초경 후 무려 25년이 지나서야. 그리고 월경에 대해 말하는 것이 편해지니 남편도 월경과 월경용품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다. 남편과 대화를 하며 남성들이 월경에 대해 알 수 있는 접촉점이 매우 희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월경용품 선구자들이 그랬듯 나 역시 생리컵은 신세계라며 호들갑을 떨고 있다. 현실적인 몇 가지 이유에서 아토모스에서 생리컵 판매를 하지 않지만 정보는 공유하고 싶어 작년에는 생리컵을 종류별로 전시하고 워크숍도 했다.  

여성환경연대 활동가 모아나님에게 부탁해 제로 웨이스트 월경용품 워크숍도 했다. 사람들에게 사용법을 설명하니 의도치 않게 금기시 하던 언어로부터도 해방됐다


생리컵 판매에 대한 의지가 있었지만 나는 탄성이 강한 티읕컵만 4년째 사용하고 있어 말랑 계열의 페미사이클도 사용해보고, 포이컵도 사용해봤다. 이때 알게 된 것이 나는 확실한 단단파라는 사실(탄성이 강한 생리컵도 익숙해지면 이물감이나 방광압박이 그리 심하지 않다). 특히 디스크타입이 이물감과 방광 압박이 적고, 원사이즈라는 것이 매력적이라 포이컵을 사용해봤지만 나에게는 최상의 난이도였다.    

① 티읕컵(라지/스몰)  ②페미사이클(레귤러) ③루나컵(라지/스몰) ④메루나(스몰) ⑤포이컵(디스크) ⑥지기컵(디스크) ⑦ 릴리컵.


생리컵은 나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해방을 가져다준 신세계다. 안타깝게도 신세계는 도전한 사람만 만날 수 있다는 것. 생리컵, 면생리대에 관심이 있는데 아직 사용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도전해보시길. 한 번의 도전 결과가 탐탁지 않았다면 몇 번 더 끈기 있게 시도해보시길.


다음번 월경 때 나 역시 포이컵을 재도전해야지.


p.s_월경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가 넷플릭스에 올라와있어요. 여성환경연대에 접속하시면 월경과 관련한 다양한 정보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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