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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밤토끼 Feb 04. 2022

프롤로그_다양성은 일상 곳곳에

뉴욕에서 본 것들 

2019년 가을 무렵 꽤 오래 다닌 직장을 그만뒀다. 나에게 일이란 애증이라 일을 멈추기까지 마음이 꽤나 복잡다단했다. 퇴사를 하고 무엇을 할지 결정하지 않은 상태로 불안하게 요동치는 마음속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조금 멀리 여행을 다녀오는 것뿐이었다. 여행을 계획하던 초기에는 몸과 마음이 장아찌처럼 절어있어 깨끗한 공기, 아름다운 자연 풍광으로 힐링하고 싶다는 욕구가 매우 컸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보고 난 후 아이슬란드 여행을 꼭 가고 싶었지만 다녀오고 나면 통장 잔고의 절반은 사라질 것 같아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돌리미티에 가야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돌로미티도 경비 부담이 적지 않았고 커피 일을 하는 김경준(남편)을 고려해 다양한 커피 트렌드를 볼 수 있는 미국 포틀랜드로 방향을 틀었다. 물론 커피의 성지는 이탈리아지만 꽤 오래전 파운드로 환전할 것을 달러로 환전한 어이없는 실수가 있어 여행지는 미국으로 변경되었다.


엉뚱하게도 우리는 후보지에 없던 뉴욕과 보스턴으로 여행(2019. 11. 27 ~ 12. 7)을 다녀왔다. 여행은 비행기 티켓 예매와 숙박시설 예약으로 시작되는데 뉴욕은 시작 비용이 어마어마했다. 경비 부담으로 포기했던 아이슬란드, 돌리미티와 뉴욕 여행 경비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아토모스를 오픈했던 2021년. 카페 겸 제로 웨이스트 스토어를 운영하게 된 계기를 물어보는 방문객들이 꽤 많았다. 10년 넘게 바리스타로 살아온 김경준 덕분에 언젠가 카페를 운영하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아토모스가 지금의 모습을 하게 된 가장 큰 레퍼런스는 뉴욕 여행에서 만난 다양한 매장 덕분이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영감을 받은 매장들은 '제로 웨이스트' 나 '리필스테이션' '플라스틱 프리' 등과 같은 문구를 드러나게 표기하지 않은 곳들이다. 여행 당시 제로 웨이스트, 리필스테이션이라는 용어도 몰랐고 제로 웨이스트 스토어를 본 적도 없는 상태였다. 뉴욕에도 다양한 제로 웨이스트 스토어가 있겠지만 우리의 이동 동선에 우연히라도 볼 수 있는 제로 웨이스트 스토어가  있지 않았다.


우리가 매력적으로 느꼈던 곳들은 카페 겸 식료품점, 마트, 몇몇의 옷가게들이다.  대부분의 매장들이 브루클린이나 소호에 위치하고 있어 매장의 인테리어나 분위기에서 힙함과 멋스러움이 가득했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다양성의 일상화였다.


어느 나라를 가도 마트 구경은 새로운 식자재와 낯선 것들이 많아 상당히 재밌는데, 처음 방문했던 Fairway Market에서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Fairway Market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엄청나게 다양한 원두와 올리브 절임, 각종 곡물을 파운드 단위로 판매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식으로 치면 쌀가게나 반찬가게와 비슷할 것인데 소분 판매하는 제품의 종류가 미국식이다 보니 새롭게 느껴졌다. 

맨해튼 첼시에 위치한 Fairway Market. 매우 다양한 산지의 원두를 소분 구입할 수 있다. 그리고 캐슈너트, 헤이즐넛, 헴프 등 다양한 대체 우유도 보기 쉽다.


두 번째로 방문했던 마트는 유기농 식품 전문 마켓인 Whole Foods Market이었다. 이곳에서도 원두를 소분 판매하고 있었는데 Stumptown, Grumpy, Partners 등 뉴욕의 유명한 로컬 로스터리 원두가 종류별로 진열되어 있어 눈길이 갔다. Whole Foods Market에서 방문하지 않았던 Cafe Grumpy의 원두 조금과 에어로프레스를 구입하여 숙소에서 내려마셨다. 고객이 직접 원두를 소분하고 그라인딩 하여 구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 편하기도 했지만 다소 불편한 점(앞사람이 그라인더에 남겨놓고 간 원두가 있어 직원을 불러야 했다)도 있었다. 하지만 다양한 커피를 맛보는 것을 좋아하는 여행객에게 원두 소분 판매는 로컬 로스터리의 커피를 다양하게 맛볼 수 있는 방법이라 매우 매력적이었다. 또 하나 매우 신기했던 것 중 하나는 식물성 음료 자판기였는데 오트 밀크와 아몬드 밀크를 신선하게 바로 구입할 수 있는 자판기였다. 아토모스를 운영하면서 알게 된 LA에 거주하는 고객에게 식물성 음료 자판기 사진을 보여줬더니 웃으며 Whole Foods Market 스럽다고.

유명한 뉴욕의 로컬 로스터리의 원두를 고객이 직접 소분하고 그라인딩 하여 구입할 수 있었던 Whole Foods Market.  그리고 매우 신기했던 NuMilk 자판기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는 뉴욕에서 가장 핫한 장소인 만큼 개성 있는 매장들이 즐비해 그냥 지나치기 힘들 정도였다. 집 근처라면 참새방앗간 마냥 자주 방문할 곳들이 많았다.  여러 매장 중 우리에게 가장 강렬한 기억을 남긴 곳은 Dépanneur이다. 카페 겸 식료품점이라 생각하고 들어간 매장에서 처음으로 리필 방식으로 세제를 판매하는 것을 봤다. 그저 잘 꾸며진 카페 겸 식료품점인 줄 알았는데 리필 판매라는 새로운 것을 봤다.

브루클린의 카페 겸 식료품점 Dépanneur.  커피와 브런치를 즐길 수 있고 다양한 식료품과 생활용품까지 구입할 수 있어 거주민들이 사랑하는 곳일 것 같았다.


그리고 몇 벌의 옷을 구입했던 Pilgrim surf + Supply와 Noah. 브랜드 도장을 찍은 쇼핑백을 사용한다. 비닐포장이나 더스트백도 없다. 내가 매장을 운영해보니 브랜드명이나 상호를 인쇄하지 않은 쇼핑백과 종이컵을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결정인지 알게 되었다. 사실 저 두 곳은 브랜드 마니아가 확실히 있는 곳이라 무심한 쇼핑백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브랜드 로고가 찍힌 Pilgrim surf + Supply와 Noah의 쇼핑백. Pilgrim surf + Supply 쇼핑백은 눈을 맞아 브랜드명이 보이지도 않는다.


걷는 중에 커피 한잔을 하기 위해 들어갔던 Bluestone Lane Coffee. 브랜드 로고에 무지개색이 입혀져 있는 것이 반가웠다(이것이 다양성을 의미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5월도 아닌데 길 곳곳에 보이던 프라이드 깃발들. 이듬해 백인 경찰의 인종차별적 과잉진압으로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사건을 보면 다양성의 일상화가 절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기는 하다.

Bluestone Lane Coffee의 무지개색 로고. 걸어 다니는 동안 여기저기 곳곳에서 프라이드 깃발과 피스마크를 보았다.


특정한 지향을 크게 써붙이지 않아도 혹은 제로 웨이스트 스토어가 아니라도 길거리 곳곳에 위치한 매장들이 다양한 문화와 지속 가능한 라이프스타일을 녹여내고 있다는 것이 참 좋았다. 물론 엄청난 소비문화와 육식문화, 차별이 원인이 되어 변화의 역사성이 쌓여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어쨌든 뉴욕의 제로 웨이스트 스토어를 방문했었다면 그것대로 흥미로웠겠지만, 아마도 우리 부부가 제로 웨이스트 스토어만을 보았다면 '이런 것도 있구나' '좋다'라고 생각하고 끝나지 않았을까 싶다. 다양성이 있으면서도 일상성이 있는 여러 매장들을 보지 않았다면 지금의 아토모스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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